유사역사학 사절



[네덜란드 풍설서] 에도 막부가 보고받은 프랑스 혁명 (127-129) 아란타 풍설서

일본 근세 사학자 마츠카타 후유코(松方冬子)의 저서, オランダ風説書 중 일부를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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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프랑스 대혁명의 정보

프랑스 대혁명이 최초로 언급되는 것은 1794년이다. 같은 해의 풍설서에서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フランス国臣下之者共徒党仕、国王並王子を弑し国中乱妨におよび申候に付、阿蘭陀国其外近国よりも同所え押寄及合戦申候段、申越候に付、カラバ表よりも軍船等差越申候、
"프랑스국 신하들이 도당(徒党)을 세워, 국왕과 왕자를 시해하니 온 나라에 난리(乱妨)가 일었다고 하였기에, 네덜란드국과 그 밖의 가까운 나라들도 프랑스(同所)를 침공하여 전쟁을 벌인 소식을 전해드리는 바이며, 카라파[1]에서도 군선 등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和蘭風説書集成』)

일반적으로, 머나먼 유럽의 소식이더라도 1년 후에는 풍설서에 언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의 보고는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에서 5년 가까이 걸렸다. 이 점을 강조하는 연구도 있다. 다만 글의 내용을 보면, "국왕과 왕자를 시해"라는 부분에 주안점이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것은 1793년이었는데, 네덜란드인도 그때까지는 보고할 만한 대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근대적인 의미의 "혁명"이라는 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일어난 일의 의미 같은 것을 충분히 파악했을리도 없기 때문이다.

이듬해 1794년의 풍설서는, 제1장에서 소개했듯이 "하나, 작년 말씀드린 프랑스국 전쟁은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으니, (후략)"[2]라고 되어 있는데, 혁명보다는 프랑스 주변 여러 나라와의 전쟁을 주로 삼은 서술 방식이다. 1794년에 프랑스 혁명군의 침공을 받은 네덜란드로서는, 혁명보다도 전쟁 쪽이 중대한 관심사였다.

1796년에는 네덜란드 선이 내항하지 않아서, 풍설서는 없다. 현존하는 유일한 정본(正本)이 있는 1797년의 풍설서는 다음과 같다.

一、フランス国臣下之者共徒党仕、国王並王子を弑し国中乱妨におよひ候に付阿蘭陀国其外近国よりも同所え押寄及合戦申候段、去る寅年申上候末、臣下逆徒之者共追討仕、王孫之内国主に相立、旧臣之者守護仕、国中漸平和に相成候に付、近国和睦仕候、然る処エゲレス国より大軍を発し、阿蘭陀国え押寄合戦におよび候末、阿蘭陀之所領商館之向々え乱入仕、剰弁柄国並コスト之両商館横領仕候に付、弥戦争相募り罷在候、
"하나, 프랑스국 신하들이 도당(徒党)을 세워, 국왕과 왕자를 시해하니 온 나라에 난리(乱妨)가 일었기에 네덜란드국과 그 밖의 가까운 나라들도 프랑스(同所)를 침공하여 전쟁을 벌인 소식은, 지난 호랑이 해(寅年, 1794 갑인년)에 말씀올린 바, 신하 역도들을 토벌해, 왕손을 국왕으로 옹립하고, 옛 신하가 수호하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점점 평화로워 지고 있으니, 주변국과도 화목합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대군을 일으켜, 네덜란드국을 침공해 전쟁에 이른 바, 네덜란드 령의 상관(商館)에 각각 난입하여, 벵갈(弁柄)국과 코스트(コスト, 코로만델 해안)의 상관 두 곳을 가로챘으니, 점점 전쟁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和蘭風説書集成』)

앞 부분은 1794년의 풍설서와 대체로 같다. 이 화문(和文, 일본어) 풍설서를 읽으면 이 해까지 왕정복고 운동이 일어났다는 듯이 읽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또, 이 풍설서에는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대군이 향했다고 되어있지만[3], 본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따라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군대가 벵갈과 코로만델 해안(인도 동해안)의 네덜란드 상관을 점령한 것에 중점이 놓여있다고 읽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네덜란드인도 본국이 위기에 처해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12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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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카르타
好交易于遠國。置官於咬口+留吧。通市舶於日本。及諸國。每十歲一度。爲総計勘定。
먼 나라와 무역하기를 좋아하여, 교류파(口+留)에 관(官)을 두고 일본과 그 밖의 여러 나라에 상선을 보내는데, 10년마다 한 번 회계(會計)한다.
교류파는 지금의 자카르타이다. 원래 지역명은 바타비아로 VOC에서 이름 붙이기 이전에는 Suma Calapa였고 여기서 교류파라는 이름이 전해졌다. 10년마다 한번씩 회계를 한다는 것은 실은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 두가지 가능성은 하나는 VOC 자체의 결산이 10년마다 각 지역을 교차연결한 무역거래의 손익으로 처리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고, 두번째 가능성은 10년에 한번 정도씩 나가사키의 상인들과 은을 선대 차입하여 거래하는 것을 정산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3] 이 사료해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阿蘭陀之所領商館은 네덜란드가 소유한 영지(식민지)에 자리잡은 상관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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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진냥 2018/01/19 09:41 # 답글

    풍설서를 엮어 번역한 책도 재미있겠군요! ...하지만 안팔리겠지요 압니다...
  • 남중생 2018/01/19 13:03 #

    네에... 조선이 엮이거나, 위처럼 프랑스 혁명, 흑선도래같은 묵직묵직한 사건이 언급되어야 국내에서도 읽힐텐데;; 마츠카타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작성 당시”에는 묵직한 사건이라는걸 모르니까 되려 간략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8/01/19 21:15 # 답글

    아무래도 당시의 유럽국가들에겐 프랑스 혁명 자체보단 국왕 부처가 처형당한 게 훨씬 크나큰 쇼크로 받아들여졌던 거군요.
  • 남중생 2018/01/20 00:02 #

    "혁명"이란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을거라는게 마츠카타 후유코 선생님의 주장입니다. 저도 어느 정도 동감하고요.

    한편으로 부르봉 왕정복고는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 1814년에야 일어나는데 1797년에 "왕손을 옹립하고 ☆평화☆를 되찾았어!"라고 보고한 이유도 알 법합니다.
    일본 예수회가 쫓겨난 이유가 폭군을 죽이거나 몰아낼 수 있다는 혁명사상을 주장한다고 (네덜란드에 의해) 소문이 났기 때문인데, 그렇게 비집고 들어온만큼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겠죠.^^
  • 섹사 2018/01/21 11:55 # 답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 남중생 2018/01/21 13:38 #

    감사합니다. 섹사님의 글도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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