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창작물의 원형을 찾아서~


두 그림 사이의 유사성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방 왼쪽의 공주침대,
그 옆에 서있는 인물1,
열린 문 틈으로 빼꼼히 내다보는 인물2,
그 사이의 쓰레기통(?)... 
과연 누가 누굴 따라 그린 걸까요?

오른쪽 그림은 제가 지난 포스팅 조선 말 섬뜩한 성교육 교재 - 태상감응편도설언해에서 소개한 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옛적에 진일청의 처가 연이어 세 딸을 낳아 세 번 다 죽였더니 갑오년에 또 한 딸을 낳았거늘 또 죽이려 하여 그릇 속에 넣고 그릇 어귀를 봉하였다가 이윽고 열고 보니 홀연 한 붉은 뱀이 튀어나와 그 좌편 다리에 감기거늘 (아내가) 크게 놀라 떼려 하나 단단하여 풀 길이 없는지라. 드디어 뱀과 함께 죽으니라."

낙태와 영아살해를 하지 말라는 교훈의 텍스트였지요.
제목도 태상감응편이라는 도교적인 성격이 역력한 책이었습니다.
같은 그림을 게렉터 블로그의 용재어우 괴물열전 (1~37) 中 17. 연처위사에 붙어있는 삽화로 아시는 분도 있을 수 있겠네요.
(그림만의 비교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게렉터 님이 크롭한 버전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왼쪽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중국화가 진소매(陳少梅, 1909-1954)가 "24효" 중 정란(丁蘭)의 일화를 그린 그림입니다.
"24효"는 중국의 유명한 효행 이야기 24개를 추린 책이지요.

정란 이야기는 재빨리 한 문장 요약을 하고 넘어갑니다.
정란(정난)은 한나라 하내(河內) 사람이니 일찍 부모를 잃어 미처 공양하지 못하니 이에 나무를 새겨 어버이 얼굴을 만들어 섬기기를 생시 같이 하여 아침저녁으로 정성(부모께 뵈옵는 예라)하더니 후에 이웃 사람 장숙의 처가 (정)난의 처더러 빌리려 하는 바 있거늘, 난의 처 꿇어 목상께 절하여 고하건대 목상이 기꺼이 (여기지) 아니하거늘 빌려주지 아니하였더니 장숙이 크게 취하여 목상을 꾸짖고 막대로 그 머리를 치거늘, 난이 돌아와 듣고 칼을 빼어 장숙을 죽이니 관가에서 난을 잡아 갈새, 난이 목상에게 하직하건대, 목상이 난을 보고 눈물을 드리우니 군현이 그 지극한 효성이 신명에 통함을 아름답게 여겨 나라에 주문하니 조서하시어 그 얼굴을 그려 올리라 하시다.
(오륜행실도, 1797)

분명 한 문장이다. 거짓말은 안 했다.

그렇담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와서,
과연 누가 누굴 따라 그린 걸까요?

우선, 그림의 퀄리티만 따지고 보면 당연히 왼쪽 올컬러 일러스트가 원본(도장도 찍혀있는 예술작품인걸요), 오른쪽이 양산형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연대를 따져본다면...?

태상감응편도설언해는 1852년에 중국의 "만(滿)·한(漢)자의 『선악소보도설(善惡所報圖說)』 일부를 구하여 그 도상(圖像)과 한문은 원본대로 두고 만주글자만 한글로 고쳐 인출(印出)"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렇다면 20세기 화가 진소매가 1852년 이전에 중국에서 출간된 선악소보도설을 따라 그린 것이군... 하고 단언하기 전에,
그림을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청나라 화가 왕소(王素, 1794-1877)의 "24효 도책(二十四孝圖冊)"의 정란 이야기(오른쪽)입니다.
엇, 이건 왼쪽의 진소매 그림과 정말 흡사하네요.
쓰레기통이 두 개로 늘었고, 아내가 방안으로 들어왔다던가, 발깔개가 생겼다던가 하는 디테일이 추가되었습니다.
새 그림을 소개할 때마다 아내가 점점 남편 등 뒤로 다가가 식칼을 들고...  그런건 아닙니다;;;

하지만, 진소매의 24효 그림이 왕소의 24효 그림을 상당부분 모방했다는 것은 중국 미술사에 잘 알려진 사살입니다. 
그리고 왕소의 활동시기를 바탕으로 파악해보면 다시 새로운 연대추정이 가능해지지요.
여기에 추가로 '정란 그림'은 정란의 부모 공양 의식을 문 밖에서 아내나 이웃이 몰래 훔쳐보는 구도로 흔히 그려진다는 미술사적 배경지식도 살짝 끼얹겟습니다. 

다시 말해,
왕소의 그림을 베낀 선악소보도설! (을 베낀 태상감응편도설언해!)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전근대 중국 출판에서는 한 가지 삽화를 이곳 저곳에 '트레이싱'해서 사용했습니다. 
2. 심지어 유교적 가치관(효도)을 전파하는 그림이 도교적 가치관(영아살해 금지)을 전파하는 책에서 재사용되기도 했습니다.
3. 각 텍스트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그림이 충분히 표현한다면 그림의 원래 맥락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게렉터 님께서 "상사뱀"을 설명하는데 태상감응편도설언해의 "다리를 휘감는 뱀"의 이미지를 활용하셨듯이 말이죠)


깔끔하게 정리되었지만, 마지막 미스터리가 남아있습니다.
바로, 태상감응편도설언해의 삽화(그리고 아마 선악소보도설의 삽화)가 왕소의 그림 보다는 진소매의 그림에 더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ㄱ-
어쩌면, 왕소와 선악소보 도설이 공동으로 모방한 또다른 원본이라도 있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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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만주어와 한문으로 되어있다는 "선악소보도설"은 검색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혹시 이 책의 원문을 열람하실 수 있다면 부디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P.S. 2
왕소의 24효도 진소매의 24효도 의 미묘한 차이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덧글

  • rumic71 2017/08/25 15:34 # 답글

    유럽에서도 삽화 목판을 이 책 저 책에 돌려쓰기 하던 시절이 있었죠...
  • 홍차도둑 2017/08/25 16:16 #

    그 덕분에 하멜표류기에 "한국엔 악어가 산다더라"는 헛정보가 나돌기도...초판엔 "이 악어그림은 빈 페이지 메꾸려고 한거임~ 데헷~"이었으나 그 뒤 판본부턴 그말이 싹 빠지고...
  • 남중생 2017/08/25 18:29 #

    그리고 환빠들이 "이걸 보라! 조선에 악어가 살았다! 대륙 조오서어어어어언!"
  • ㅇㅇ 2017/08/25 16:45 # 삭제 답글

    일반적인 미술사적 견지에서는 선악소보도설 그림과 진소매(또는 왕소)의 그림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도상과 구도의 차용 자체야 드물지 않은 일이나, 언급하신 유사성 정도는 보편적인 요소들이라.. 대체 누구들 사이에서의 통념이냐 물으신다면 글쎄요.
  • 남중생 2017/08/25 21:26 #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술사학계의 통념을 말씀을 하시는것이겠지요. 그런 만큼 "대체 누구들 사이에서의 통념이냐 물으시면 글쎄요" 같은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전문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근대 인물화인만큼) 알레고리/스토리를 가진 동시대의 두 그림이 공유하는 "문 틈으로 훔쳐보는 배우자"라는 요소가 유사한 도상과 구도로 표현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거기에 추가로 다른 디테일들도 반복되어 보이구요. 비슷한 시기의 다른 정란 그림들은 저렇게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훔쳐보는 아내/이웃은 아예 건물 밖에 있다거나 하는 식이죠. 진일청의 아내는 유명 인물도 아니라 별도의 도상이랄게 애초부터 없고요.ㅎㅎ
    게다가 진일청 아내 이야기에서는 문에서 기웃거리는 사람을 그려넣을 필요가 처음부터 없습니다. 이야기(한문/한글 모두)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를 굳이 그려넣었다는 것이 트레이싱 의혹을 갖게된 또다른 이유입니다.위 포스팅에 이런 자질구레한 생각의 흐름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습니다만, 여기에 대해 ㅇㅇ님의 의견을 더욱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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