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제국과 결혼할 수 없는 여자들 - Matt Matsuda의 Empire of Love 인도차이나 ~Indochine~

제국과 결혼한 남자들 - Matt Matsuda의 Empire of Love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로써 타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것은 왜 나쁜가 - Matt Matusda의 Empire of Love에서 중간에 생략된 부분이 메워집니다. 이 포스팅의 마지막 문단은 위 포스팅에서 다시 끌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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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잘 풀리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툴루즈(Toulouse)에서 콰익 반 쟈이(Quach Van Giai)라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했던 마드모아젤 쿠시(Cousy)의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코친차이나 경찰 조사서[1]가 주장하기로는 신랑 될 사람이 "사실상, 몹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절도, 절도 공모, 폭력 및 상해 용의자로 지목되었습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 남자는 "직장이 없으며, 유곽을 드나든다는 것이었다."[2] 이 경우에 식민지 총독부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덧붙였다. "이를 허락함으로써 이 남자가 프랑스 여성과 결혼을 한다면[3] 불행을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부서를 대표해서 이 상황에 개입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 또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면, 이 원주민[indigène]과 마드모아젤 쿠시의 혼약을 저지하도록 요청합니다." 보고서 말미에 가서는 마드모아젤 쿠시 만이 이름으로 표기되었다. 총독부는 (프랑스 여성이 연루되었다면 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긴 혼약에 개입하고자 하는 의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부이-타잉-반(Bui-Thanh-Van)도 1921년 한 젊은 프랑스 여성이 투란(Tourane, 현재 다낭)와 파이포(Faifo, 현재 호이안)로  "사랑의 과실"[4]을 임신한 채 안남인 남편을 찾으러 온 사례를 수기에 적었다. "황인종" 마을주민이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백인들의 방해공작에 맞닥드렸다. 이들은 여자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결국 자신들의 인종적 우위에 흠이 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금이 떨어지고 좌절한 채, 이 여성은 프랑스로 돌아가야만 했다. 부이에 따르면, "식민지 프랑스인들은, 원주민과 한 지붕 아래서 사는 누이들을 차별했다." 아무래도 프랑스 독자들을 고려했는지, 그 다음에는 수위를 조절해서 시대를 초월한 사랑에 대한 고찰로 수기를 매듭지었다. "사랑은 ... 항상 홀로, 유일하게 세기를 초월해서 사랑만의 고유 영토에 머물러있다. 사랑은 영원히 스스로 호흡하며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갈 것이다." 부이도 알고있다시피 '사랑의 제국(Empire of Love)'에서 식민지 실태가 실제로 표현될 수 있는 수위에는 한계가 있었다.
 
유럽인들도 이 한계를 시험했다. 프랑스 남성들은 인도차이나를 사랑하고 꽁까이(congaï)를 둘 수 있었지만, 프랑스 여성의 역할은 프랑스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시바스-바론(Clotilde Chivas-Baron, 1876-1956)은 la femme 지에 식민지 생활을 다룬 비판적인 수기를 연재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제국에서 프랑스 여성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경험에 기반한 평이한 문체로 적었다. 그것은 바로 가정 내에서 프랑스 문명을 재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 자기 주변이라면 어디든지, 프랑스를 창조해낸다. 프랑스의 습관과 프랑스의 비전으로, 작은 물건들과 원대한 감성으로, 은제 차 도구와 루이-필립(Louis-Phillipes) 램프로, 프랑스의 우아함과 프랑스의 윤리로, 자기자신의 선함과 용기로 창조해낸다." 문명의 위대한 우화극은 일상적인 의미와 평범한 물건들에 대입되었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남성들은 식민지 내 프랑스 여성의 존재를 떨떠름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이들 남자가 식민지에서 우위를 차지하게끔 만들어진 계획에 가정적인 모습은 포함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베르 드 푸부르빌(Albert de Pouvourville, 1861-1939)이라는 학자는 유럽 여성들이 물심양면으로 지나치게 세심히 따지는 바람에 식민지배를 망쳐버렸다는 의견을 냈는데, 이는 프랑스가  20세기에 들어 정식으로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이 되면서 고리타분한 논쟁거리가 될 주장의 시초였다. 드 푸부르빌의 주장은 "프랑스 여인들의 여성스러움이 우리 남정네들의 거친 성질과 상스러운 영혼을 곱상하고 아기자기한 매력으로 덮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이 여인들은 남자들이 '책임지지 않는 자녀들'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프랑스 여성들은 혼혈아를 몹시나 싫어했는데, 드 푸부르빌에 따르면 이런 반감은 '안남의 전통 법률에 따르면 환매(還買)할 수 있는 한시적인 혼인관계는 합법이라는 것을 무시하는'[5] 것이었다. 시바스-바론은 그녀의 글에서 "백인 여성은 ... 혼혈 여성을 사근사근하게 대하지 않는다. 몇몇은 심지어 무서울 정도로 질투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적었다. 알베르 드 푸부르빌은 '마음 사로잡기' 계획[6]이 실패했음을 지적하며  "우리가 맡은 임무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다. 심지어 쉬운 임무도 아니었다. 이제 백인과 황인 사이에는 ... 깊은 골이 파였는데, 아름다운 우리 프랑스 여인들의 질투심 때문에 이 골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진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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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 전 신원조사는 많은 사례에서 보인다. 어쩌면 당연시 되는 행정절차였을지도 모른다.

[2] 사실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에 반대하는게 맞지 않나 싶은데, Matsuda는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보다 뻔뻔한 인종차별의 사례를 찾지 못한 듯 싶다.

[3]식민지 병사가 감히 프랑스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15일 영창 감이었다. '감히' 제국을 사랑한 남자들 참조.

[4] 1차대전 시기에 프랑스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로 파병된 병사는 당시 자연재해가 겹쳐서 경제사정이 안 좋은 안남(다낭과 호이안이 포함된 베트남 중부) 지역이 가장 많았다. 역시 '감히' 제국을 사랑한 남자들 참조.

[5] Albert de Pouvourville,L’Annamite aujourd’hui, (Paris: Ed. de la Rose, 1932), 113-7.

[6] '마음 사로잡기' 계획에 대해서는 죽이지 못할 바에야 사랑하라! - Matt Matsuda의 Empire of Love 참조.


출처: Matt Matsuda, Empire of Love: Histories of France and the Pacific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chapter 6, “Indochina,” 15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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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3인칭관찰자 2017/08/21 21:59 # 답글

    프랑스 남자가 식민지 여자와 관계를 갖는 건 괜찮지만, 프랑스 여자가 식민지 남자와 관계를 갖는 건 금기시되는군요.
  • 남중생 2017/08/21 22:15 #

    맷 마츠다가 제시한 프레임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킴로안 힐의 글을 보면 정작 프랑스 본토에서는 베트남 신랑감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가족들)도 있는듯 합니다. 어쩌면 식민지라서 인종차별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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