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17세기에 만리장성, 자금성, 한양 도성(사대문)을 본 일본인들의 반응은? 橘南谿의 서유기(西遊記)

지난 37. 메가네바시 (나가사키) 포스팅에서 일본이 19세기 중엽이 되도록 아치 건축 기술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여기 관련된 또다른 사료를 발견했습니다. 위 포스팅에서 다뤘던 내용과 함께 나열해서 두 사료를 함께 소개드립니다.
과연 전근대 시대에 아치를 본 일본인들은 어떤 식으로 인식했을까요? 


사료1. 18세기 후반, 나가사키에서 아치형 다리(메가네바시)를 본 의사 타치바나 난케이(橘南渓)



三七 眼鏡橋 (長崎)

37. 메가네바시(나가사키)

 

長崎の橋はすべて唐風の作りようなり。両岸より切石(きりいし)を畳上げて、橋杭なしにかけ渡せる石橋なり。他国の石橋というは一枚石にてかけたるものなるに、長崎の石橋は小さき石を切りて、石がきのごとく畳みて両方より合わせたるなり。長き橋はふた筋に水を通ずるなり。是を目がね橋という。唐絵にえがく所の橋は大かた此風なり。下より水溢るれば崩るる事もあれども、上よりはいか程重き物をのするといえども動き破るる事なしという。誠に大河にはなるまじけれど、長崎の川は大かた京都の堀川(ほりかわ)程の大きさなり。万代不壊(ばんだいふえ)の橋なり。もとは唐人来たりて作れりという。彼地は柔らかなる石たくさんなるゆえにや。京などにても此ごとき橋を作らば破損の憂なくしてよかるべきものを。


나가사키의 다리는 모두 중국풍으로 지어졌다. 깎은 돌을 양쪽 강변에서 쌓아 올려, 다리를 바치는 기둥 없이 건너지른 돌다리다. 다른 지방의 돌다리라는 것은 한 장의 돌로 걸친 것을 말하는데, 나가사키의 돌다리는 작은 돌을 잘라, 돌담처럼 쌓아 양쪽에서 합친 것이다. 이 기다란 다리는 두 줄기로 물을 통과시키는데 이것을 메가네(眼鏡, 안경) 다리라고 한다. 중국 그림 속 다리는 대개 이런 식이다. 아래에서 물이 넘쳐흘러서 무너지는 일은 있더라도[1] 위에서는 아무리 무거운 물건을 올려도 무너져 내리는 일은 없다고 한다. 정말 큰 강에는 지을 수 없겠지만, 나가사키의 냇물은 대개 교토의 호리카와(堀川) 정도 크기이다. 만고불변의 다리이다. 원래는 중국인이 와서 지었다고 한다. 그 땅은 부드러운 돌[2]이 많은 까닭(에 이렇게 다리를 짓는 것)이다. 교토()같은 곳에서도 이처럼 다리를 지으면 파손될 걱정이 없어 좋을 것을.


[1]  포스팅 37. 메가네바시 (나가사키)에서 천하귀남 님의 덧글

"기술적으로는 타이코바시라는 목구조 아치교 쪽이 교각간의 거리인 경간을 최대로 하기 좋고 내진면에서도 좋으니 굳이 석조 아치가 필요 없지않나 합니다.

석조는 일단 비용이 어마무지하게 들어가는데 지진에 취약한 부분도 있고 또 한가지문제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여름철 장마에 물이 불어나는 수량은 갈수기의 200배라는 어마무지한 수량입니다. (유럽은 2~30배정도) 이러니쓸려가도 다시 짓기 편하고 비용도 적은 쪽으로 지은것 아닌가 합니다.

19세기 말 이후의 케이슨 잠함으로 바닥 기반암까지 파고 내려가 파일박고 철근 콘크리트로 올라오는 수준이면 몰라도 과거의 저런 석교는 제일바닥 기반부는 나무말뚝을 박고 위에 돌로 기반 쌓은 것인데 이러면 한국이나 일본은 수십년주기 대홍수에서 버틴다는 보장이 안될겁니다

실례로 위에 언급한 긴타이교도 여지껏 3번이나교각이 유실됬습니다. 대략 100년주기 홍수는 못버틴다는군요. 경주에도 돌로된 교각을 가진 다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교각상부는 안남았습니다.뭐 현대의 콘크리트 교각도 일부가 쓸려내려가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그만큼 한국이나 일본의 장마철 수량이 어마무시합니다."



[2] 타치바나 난케이는 돌이 "유연해서" 휘어진 석조 아치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부드러운 돌이니까 깎기 쉬우리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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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2. 17세기 중반, 중국(만리장성, 자금성)과 조선(한양 도성)에서 아치형 문을 본 표류민


달단이야기(韃靼物語) 혹은 달단 표류기(韃靼漂流記)라고 불리는 기록입니다.
때는 위 메가네바시(1634)가 처음 지어진지 겨우 10년 뒤, 1644년! 에치젠(越前, 현재 후쿠이 현) 출신 상인들이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근처까지 표류를 했다가, 청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혀 당시 청나라가 갓 정복한 명나라 수도 북경에 따라갑니다. 이후 조선(한양, 왜관)을 통해 귀국하죠.
그러니까 에도 초기에 극동 시베리아(만주), 중국, 조선 지역을 다 돌아본 일본인들입니다. 
아치 이야기를 하는 한 부분만 발췌/번역하겠습니다.


一、韃靼と大明との国境に、石垣築申候。万里在候、高さ拾二三間ほどに見へ申候。但石にては築瓦の様成物、厚さ三寸四寸にして重ね、しつくひ詰に仕候。堅く滑に候事焼物にくすりを懸け置候ごとくにて候。事の外古く見へ申候得ども、すこしもそこね不申候。道通の所は、此石垣を丸くくりぬき其上に門矢倉立申候。此丸く候処も薬を懸け候ごとくに爪もかゝり不申候。
一、大明北京の王城は、日本道六里四方も御座候。北京の人申候は大明の道積りにて申候。総廻りは国境に築申候石垣の如くにて候。我等共北京へ参候時と、朝鮮へ参り候時と王城の両方を通申候。何方も此通りのよし申候口には石垣丸くくり抜、上に門矢倉を立、総廻りに石火矢を仕掛け申候処御座候。

하나, 달단과 명나라(大明)과의 국경에, 돌담(이시가키)을 쌓았습니다. 만리나 됩니다. 높이는 12,3칸 정도로 보입니다. 다만 돌 대신 기와처럼 생긴 물건[3]을, 두께 3,4 촌으로 겹쳐서, 회칠을 합니다. 단단하고 매끄럽도록 이 물건을 구운 뒤 약을 칠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의외로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길이 난 곳은 이 돌담을 둥글게 도려내고 그 위에 문루(門矢倉)를 세웠습니다. 이 둥근 곳도 약을 칠한 듯 손톱도 들어가지 않습니다.[4]
하나, 명나라 북경의 왕성(王城)은, 일본 척도로 육리사방(6x6)이나 됩니다. 북경의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명나라의 길을 가득 메웁니다. 왕성의 둘레는 모두 국경에 쌓은 돌담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들은 북경에 갔을 때와, 조선에 갔을 때 왕성의 양쪽을 지나갔습니다. 어느 쪽(출입구)도 이와 같이 말씀드린 대로 출입구에는 돌담을 둥글게 도려내고, 위에 문루를 세우고, 둘레에는 모두 돌과 불화살을 설치해 놓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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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벽돌...

타치바나 난케이의 
"깎은 돌을 양쪽 강변에서 쌓아 올려, 다리를 바치는 기둥 없이 건너지른 돌다리"
"작은 돌을 잘라, 돌담처럼 쌓아 양쪽에서 합친 것"
는 그래도 (배우신 분의) 관찰에 기반한 합리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는데...


"길이 난 곳은 이 돌담을 둥글게 도려내고 그 위에 문루(門矢倉)를 세웠습니다. 이 둥근 곳도 약을 칠한 듯 손톱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조선에 갔을 때 왕성의 양쪽을 지나갔습니다. 어느 쪽(출입구)도 이와 같이 말씀드린 대로 출입구에는 돌담을 둥글게 도려내고,"


돌담을 둥글게 도려내고...
돌담을 둥글게 도려내고...
돌담을 둥글게 도려내고...

어디 한 번 아치를 만들어볼까?


핑백

  • 남중생 : "테크트리" 역사관(觀)의 위험성 2018-02-12 00:20:31 #

    ... 본은 19세기까지 아치 건축 기술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이미 여러 번 했습니다.(서유기의 37. 메가네바시와 17세기 만리장성, 자금성, 한양 도성(사대문)을 본 일본인들의 반응은? 포스팅 참조!) 중국이나 조선도 오랫동안 (적어도 19세기보다는 한~참 이전에) 아치 건축을 해왔고,유구국 ... more

덧글

  • 홍차도둑 2017/07/23 11:14 # 답글

    이것이 배운 분과 아닌 분의 클라스...
  • 남중생 2017/07/23 14:41 #

    역시 사람은 많이 배워야... 그런데 족히 150년 격차가 나는 기록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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