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벨기에가 필리핀을 지배했다면? (부제: 뒤끝 있는 레오폴 2세) 있잖아, 근대

"학생의 질문은 가정형인데, 꽤 좋은 질문이다.
무엇이 역사를 움직이는지 사고하는 훈련을 돕기 때문이다."

이글루스에 티모시 브룩을 검색해봤다가, 연성재거사 님의 역사적 사건의 설정놀음에 관하여 를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도 북토크 자리에 있었지요. (후후)
저는 브룩 교수님께 "용"에 대해 좀 더 질문을 드려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ㅠㅜ

이번 글은 용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연성재거사 님의 질문에 대한 티모시 브룩의 답변과 상당히 흡사한 말을 베네딕트 앤더슨이 했기에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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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가 필리핀을 지배했다면? (The Philippines under Belgium?)
Inquirer지, 2016년 6월 24일자. 
필리핀 역사가 Ambeth Ocampo의 정기투고 사설.

역사적 상상이나 추측을 보면 역사학자들은 자연스레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데, 이런 상상이나 추측은 1차 사료에 보이는 사실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떼오도로 아곤시요(Teodoro Agoncillo)는 내게 필리핀 역사의 가상 시나리오(what-if)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조언한 적이 있었다. 아곤시요는 "도대체 왜 일어나지 않은 일과 일어날 뻔한 일을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이미 일어난 일을 확정짓기도 어려운데..."라고 짜증을 내곤 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내게 정반대의 조언을 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이 더 재미있을 때도 있기 때문이지!"라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자한 미소를 띤 베네딕트 앤더슨, "더 재미있을 때도 있기 때문이NGEEE!!!"

1762-1764 연간에 영국이 스페인령 마닐라를 점령한 사건을 다룬 최근 칼럼을 두고 열띤 대화와 토론이 벌어진 페이스북 글타래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는 좋은 떡밥이다. 누군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필리핀 식민지배 계획을 발굴해낸다면, 여기에 또 하나의 가상 시나리오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호세 리살(Jose Rizal)의 소설 "체제전복(El Filibusterismo)" 벨기에에서 초판이 인쇄된지 125주년 기념 강연을 하기 위해 올해 9월에 벨기에를 방문할 때, 브뤼셀 왕궁 근처에 있는 중국 누각(Chinese Pavillion)을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다. 이 누각에는 19세기 중국과 일본의 미술을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나는 1980년대 초에 처음으로 이 박물관에 가보았는데, 벨기에의 왕 레오폴 2세가 지은 것이라고 들었다. 레오폴 2세는 동양뽕에 흠뻑 빠진 나머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구입할 생각까지 했다는 것이다.

(동양뽕이요...)

레오폴 2세는 왕위에 오른 1865년, 필리핀을 시작으로 해서 동양에 미치는 벨기에의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을 구상했다. 필리핀은 시장성이 아주 좋아보였는데, 중국과 일본 양쪽으로 진입로를 제공하는 전략적 위치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벨기에 정부(특히 의회)는 레오폴 국왕만큼 식민지를 갖는데 열정적이지 않았는데,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식민지에서 벨기에의 국익을 수호하려면 좋은 장비를 갖춘 해군과 육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 복잡한 문제는 벨기에의 소위 "중립국 선언"이었다. 이 선언으로 인해 벨기에는 해외 식민지를 두고 겨루던 영불독 삼국의 경쟁구도에 끼어들 수 없었다.

1866년 레오폴 2세는 스페인 주재대사에게 왕명으로 지시를 내렸는데, 스페인 여왕에게 필리핀을 양도할 것을 제안하라는 것이었다. 벨기에 대사는 지시사항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벨기에 의회가 필리핀 양도 계획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고, 스페인 여왕은 그 제안을 듣고 비웃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잘 알았기 때문이다. 대사의 불복종 행위를 알아차린 레오폴 2세는 그를 다른 직위로 이전시키고 자신의 비밀계획에 동참할 만한 사람을 앉혔다.

의회에게 승인을 받기는 커녕 알리지도 않은 상태로 레오폴 2세는 1억 5000만 프랑(약 2조원[1]) 상당의 비자금(이 금액은 필리핀 식민지의 1년치 운용비용에도 미치지 못했다)을 국고에서 빼돌린 뒤, 여러 영국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으로 돌려막기를 시도했다. 노력은 가상했지만 이 계획도 실패했다. 벨기에 정부가 아니라 레오폴 국왕이 동양뽕에 취해 추진한 계획이라는 걸 눈치챈 은행들이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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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당시 벨기에와 프랑스는 모두 프랑(franc)화를 금본위제로 고정해서 쓰고 있었다.  
타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것은 왜 나쁜가 - Matt Matusda의 Empire of Love의 주석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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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는 왕좌에서 쫓겨났다. 이 기회를 틈타서 레오폴 2세는 스페인의 신정부와 필리핀 매매 협상에 들어갔다. 레오폴 국왕에겐 자금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실패했다. 
레오폴 2세가 구상한 세번째 계획은 필리핀을 벨기에 국왕이 다스리는 독립국으로 두는 것이었다. 필리핀은 해외 회사가 운영하는데 90년 조차(租借) 계약 하에 한시적으로 권리를 보유한다는 계획이었다. 외교권과 재정권은 벨기에 왕국이 담당한다.

조차 기간이 만료되면 회사는 필리핀을 벨기에에게 양도하고, 이로써 식민지화 및 합병 절차는 문제 제기되는 일 없이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문제를 지나치게 복잡하게 풀려고 한 감이 있는데, 이 계획도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레오폴 2세는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고, 식민지 확보의 꿈은 이곳 아프리카에서 이뤄졌다. 1885년 "콩고 자유국"이라는 이름의 아프리카 식민지는 레오폴 2세의 개인 식민지로 여겨졌다. 이후, 중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이 식민지는 1908년에서 1960년까지 "벨기에령 콩고"로 명명되었고, 현재는 콩고 민주 공화국이다. 

이 단편적인 역사는 더 많이 연구할 만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오폴 2세가 필리핀 계획에 관한 모든 문서를 파괴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어렵게 되었다. 우리가 그나마 알 수 있는 소량의 정보는 아직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 책 “독립국가의 구상: 레오폴 2세와 필리핀 (A La recherché d’un Etat Independent: Leopold II et les Philippines)”에서 나온 것이다. 1962년에 초판된 이 책은 레오폴 국왕의 개인 식민지 사업에 주요 교섭가로 활동한 쥘 그라인들(Jules Greindl) 백작이 작성한 문서가 실려있다. 그라인들 백작이 벨기에령 콩고 사업을 담당하러 파견된 1875년 이후의 문서 기록은 없다.
마드리드에 위치한 스페인 외교부 서고에서 독일 주재 스페인 대사가 스페인 총리에게 작성한 극비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888년 그라인들 백작이 사임하고 벨기에령 필리핀 계획이 보류되었다는 상황판단에도 불구하고 레오폴 2세는 필리핀 식민지를 확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한다. 도대체 레오폴 국왕은 필리핀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길래 그토록 집착에 가까운 소유욕을 보였는지 궁금해진다. 낙관주의자인 레오폴 2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L’affair que je porsuis irrealisable aujourd-hui, peut-etre faisable une autre fois. (내가 추구하는 계획은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계획이 성공해서 필리핀이 벨기에 국왕령이 되었다면 필리핀은 어떻게 되었을까?
***
"내가 추구하는 계획은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 유체이탈 화법의 선구자,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1835-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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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후기]
어떻게 되긴요... 루손섬에 손목이 나뒹굴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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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존다리안 2017/07/21 07:55 # 답글

    가능성은 아주 작겠지만 조선을 지배하겠다고 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후덜덜....
    광화문 저잣거리에 손목들이....
  • 남중생 2017/07/21 11:16 #

    사실 중국이랑 일본뽕에 취해있었으니, "그 사이에 만만한 나라가 끼어있다고?!" 했으면 충분히 가능했다고 봅니다.
  • 존다리안 2017/07/21 11:22 #

    훗날 현실의 반일감정 이상으로 반 벨기에 감정이 생길 것 같습니다.
  • 남중생 2017/07/25 01:23 #

    그쵸... 다시 생각해보니 벨기에의 아프리카 인종정책(툿시와 후투) 비슷한걸 필리핀에서 시행했다라면 필리핀-스페인 혼혈만 등용되고 우대받았겠지만 조선에서라면... 일본이 남조선/북조선의 민족적 특징을 구분해내려고 했던건 장난스러울 정도로 헬게이트가 펼쳐졌겠군요... 피부 희고 키큰 조선인들만 다른 종족이자 지배계급 취급이라;;;
  • 파파라치 2017/07/21 09:32 # 답글

    레오폴 2세가 콩고에서 한 짓을 생각하면 그리 "재미있는 상상"은 아닐것 같은데...
  • 남중생 2017/07/21 11:18 #

    그렇죠... 하지만 필리핀 처럼 베테랑(?) 식민지 경력이 있는 나라는 우리와 생각하는 것도 다른 것 같습니다.
  • 찐따 2018/04/09 22:28 # 삭제 답글

    스페인화된 루손이야 그렇다 쳐도, 남부의 모로나 술루의 저항은 미국도 골치아팠는데 벨기에 정부도 아닌 국왕 개인의 여력으로는 지구 반대편의 저항을 분쇄시킬 수 있을런지는.... 손목 자르는 건 그나마 콩고니까 가능했지...
  • 남중생 2018/04/09 23:13 #

    "이 금액은 필리핀 식민지의 1년치 운용비용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문장이 모든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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