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영국식 불교 - 홍차 같은걸 끼얹나?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17세기 초,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일본과 무역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죠. 일본 현지의 시장 조사가 안 돼있었으니까 정작 뭘 팔아야할지를 몰랐다는거죠.

그래서 회사의 높으신 분들은 '세계 어딜 가든 무난하게 잘 팔릴 상품'을 싣고 가는걸로 결정하는데,
그렇게 생각해낸게 헐벗은 여자 그림입니다.

물론 명색이 공기업인데 대놓고 포르노를 팔 수는 없으니까, 그리스-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누드화를 싣고가기로 하죠.

그리고 그 결과...

"신분 높은 여인 여럿을 선장실에 들어오도록 했다. 캐빈 내부에는 굉장히 '야하게' 그려진 비너스 그림이 커다란 액자에 담겨 걸려있었는데, 그 여인들은 그 앞에서 경건하게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그림을 성모상으로 여긴 것이었다. (신자가 아닌, 그들의 동행이 듣지 못하도록) 자신들이 기독교도라고 내게 속삭여 말했는데, 이로써 우리는 이들이 포르투갈인들이 만든 교황쟁이들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존 사리스(John Saris) 선장의 일본 항해기,1613.-

네...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한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성지순례를 옵니다.

전근대 동아시아 문화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유명하고 흥미를 돋구는 이야기인데요.
구글북스에 올라와 있는 (페이지 순서는 같지만) 서로 다른 두 권의 "사리스 선장 항해기"를 보아도, 해당 부분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죠.


이 비너스 이야기가 제대로 소개된 것은, Timon Screech의 아래 논문이 최초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뒤로 동 저자의 책에도 등장하고, 이후에는 Timothy Brook같은 중국사 전문가의 책에도 등장하지요. (맨 밑, 참고문헌을 달아놨습니다.)

원래 영어로 쓰인 사리스 선장의 항해기는 더 큰 규모의 여행기 모음집에 포함되어서 출간된 이후,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또 이 프랑스어 번역본은 네덜란드어로... 그리고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채셨겠죠? 네덜란드어 번역본은 일본 난학자들의 손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유럽 순회를 하고 온 일본여행기가 다시 일본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거의 200년이 지나있었습니다.
한때 네덜란드와 영국 두 나라의 동인도 회사(VOC & EIC)가 상관장을 세웠던 히라도(平戸)는 국제도시로서의 번영을 잃은지 오래였죠.

당시 히라도 번주(藩主) 마츠라 세이잔(松浦靜山, 사리스 선장이 만난 히라도 번주의 5대손)은 이 책의 소식을 접하고는,

위대한 상고사 복원하자! 

☆조상님들의 찬란했던 과거☆를 빛내기 위해 네덜란드어에서 일본어로 번역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이영돈 PD 시바 코칸(司馬江漢)이 
"네덜란드 책...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하고는 자기 일기장에다가 세 줄 요약을 해놓습니다.

물론 시바 코칸의 눈길을 끈 내용 역시 영어권 독자들이 밑줄 쫙, 체크, 별표, 방점 달아놓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其の中にイギリス船平島に入津したる事を誌す、其の頃松浦法眼と云ふ人居して政事を取る、或時婦女をへ、イギリスの船にる、船の内数品の額あり。其の中にありけるを、婦人是を熟視せずしてす。イギリス人おもへらく、「頃吾法、此の日本にる事あり。其ならん事を思ひてするかと。」

책 속에는 영국 배가 히라도(平戸) 섬에 입항한 일이 적혀있었다. 그 당시에는 마츠라 호우겐(松浦法眼)이라는 사람이 은거하면서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여인들을 데리고 영국 배에 올라탄 적이 있었다. 배 안에는 액자가 여러 개 걸려있었는데, 그 중에는 춘화(画)도 있는 것이었다. 여인들이 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삼가는 모습을 보이니, 영국 사람이 생각하기를, "옛날 우리나라의 불법(法)이 이곳 일본에 들어온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일을 떠올려서 춘화를 섬기는 것인가."

이 일기장이라는 건 바로 적륜님께서 시바 코칸을 다룬 포스팅(어두운 방, 그리고 빛이 만들어 내는 그림...)에서 소개하신 
“슌파로-힛키(春波樓筆記)"입니다. 春波樓筆記는 그 서문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영국 불교(法)"라는 건 도대체 뭐죠?
유럽의 기독교(그것도 맥락상 가톨릭)를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18세기 난학자도 기독교는 "영국식 불교"로 인식했다는 것이죠.


"영국식 불교? 물 같은 걸 끼얹나...?"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타이먼 스크리치가 시바 코칸의 기록을 다시 영어로 번역함으로써 "영어-프랑스어-네덜란드어-일본어-영어" 루프가 완성되지요.

"It contained the story of the arrival of the English ship at Hirado. At that time government was under the control of Matsura Hogen [actually, Hoin, or Shigenobu], though he was nominally in retirement. On one occasion he took his ladies aboard the English vessel, where many framed pictures were hung. One was a shunga [see below]. The ladies stared at it intently, and worshiped it. The English thought to themselves, “Now, Buddhism arrived in their country of Japan some while ago, so how peculiar that they should venerate shunga!

그러나... "우리나라의 불법"을 그냥 불교(Buddhism)라고 오역하는 바람에, 원문의 의미가 완전히 왜곡되어버렸습니다. ㅠㅜ

비너스한테 기도하는 여인들을 본 영국인들의 리액션이 "일본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클-린 불교의 나라인데, 어찌 춘화를 섬긴단 말인가!"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중역에 중역을 거치다보면 로뎅이 오뎅이 되는 수 밖에 없는 법이지요.

- 카쿠레 키리시탄과 불교의 관계를 다룬 포스팅, 구원받기 위해서 먹으면 안되는 것 - 텐치하지마리노코토 참조.
- 타치바나 난케이의 서유기 중 101. 성상밟기 에서 언급된 "키리시탄 본존(切死丹の本尊)".
- 적륜님의 포스팅, 쇼미더 트루스! 최척의 인생유전 이야기(상편)에서는 비록 문학이지만,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 있던 나가사키의 무역상인 돈우(頓于)가 섬기는 "부처님"도 언급됩니다. 
- 일본 기독교와 불교는 아니지만, 상당히 비슷한 사례인 가톨릭과 부두교의 관계도 이선생 님의 블로그에서 참조.
(같은 날에 같은 짤방을 올리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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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Timon Screech의 Sex and the Floating World: Erotic Images in Japan, 1700-1820.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102-103 페이지.
Timon Screech의 "Pictures (The Most Part Bawdy)": The Anglo-Japanese Painting Trade in the Early 1600s. 
The Art Bulletin  Vol. 87, No. 1 (2005년 3월호), 52-54 페이지. 
Timothy Brook의 Mr. Selden's Map of China: Decoding the Secrets of a Vanished Cartographer. (New York: Bloomsbury Press, 2013) 71 페이지.

Timon Screech의 다른 책들은 
등에서 소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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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역사관심 2017/07/20 12:43 # 답글

    와, 이게 이렇게 되는군요. 진짜 웃긴 에피소드지만, 실제로 번역-번역-번(태) 되온 많은 사서들을 생각하면...OTL
  • 남중생 2017/07/20 14:23 #

    그렇습니다 ㅋㅋㅋ 이미 원 소재부터가 "이미지의 오역"에 대한 이야긴데, 그게 또 오역에 빠지니까 말이죠...
  • Ca 2017/07/21 06:42 # 삭제 답글

    음... 제 생각에는 기독교를 '영국불교로 인식'했다기 보다는 일종의 모자이크 같은 용도 아닐까요?
    기독교가 엄격히 금지된 상황에서는 문헌에 기독교라는 표현이 있는 그 자체로도 불안하니 문자 그대로의 자체 검열을 해놓은게 아닐까요...
    (알만한 사람들은 어차피 다 눈치채겠거니 하는 식으로...)
  • 남중생 2017/08/02 00:53 #

    이렇게라도 늦게 답글을 달면 확인하실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ㅠㅜ (정말 죄송합니다.)
    Ca님의 의문점에 대답하는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http://inuitshut.egloos.com/1925334)
    일본어 원문을 확인하고 싶어 끙끙대느라 답변이 늦은 점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 mori 2017/07/21 07:44 # 답글

    재밌는 얘기네요!!! 비너스와 성모라니 ㅎㅎ 오해와 오역을 살펴보는 것도 재밌구요!! 17세기 영국인이나 18세기 네덜란드 사람이나 둘 다 (가톨릭교인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가톨릭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혹은 미개하다는 색의 태도를 취했을텐데 이런 것도 신기하군요!
  • 남중생 2017/08/01 23:07 #

    mori님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새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http://inuitshut.egloos.com/1925328)
    그 전에 배경 설명을 위해 사리스 선장 항해기의 여러 영어 판본을 짚고 넘어가는 포스팅(http://inuitshut.egloos.com/1925176)을 먼저 읽는게 순서상 편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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