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저도) 조선의 오딧세이아를 읽어보겠습니다.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제 블로그 활동에 끊임없이 영감을 주시는 이웃 블로거, 적륜님은 최근 "태원지"라는 고전소설을 강독하는 연재를 마치셨는데요.

"조선의 오딧세이아라고 생각이 들었을 정도" (반란자들의 섬, 이슬라 칼리포르니아),
"그야말로 오디세이아처럼 여러가지 모험을 거쳐가며 동으로 동으로 배를 타고 흘러갑니다." (태원지의 마무리, 그리고 고담 강독사도 마무리.)

이렇게 여러 포스팅에 걸쳐 언급하셨듯이 태원지는 "오디세이아 ver. 조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해양어드벤처 소설입니다.

여기에 발맞추어 제가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는 조선의 (원조 정통 이조 갈비) 오디세이입니다.
왜 이렇게 수식어를 많이 붙여서 강조하는지는 아마 읽어보시면 알게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아마 눈치가 빠르시거나 기억력이 좋으신 분은 이미 "이조"에서 제가 이전에 소개한 "이조한문단편집(李朝漢文短篇集)"을 기억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박포장(朴砲匠)과 거대 뱀, 그리고 용골? 에서 다룬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 책이죠. 바로 이 25. 박포장 (pg. 120~124) 다음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26. 대인도 (pg. 125~127)입니다. 책의 엮은이가 연관성 있는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놓은 것같은데요. (이거 어째 귤선생님의 서유기 느낌으로 흘러가는 듯하네요...) 소개는 우선 이 정도로 하고 대인도(大人島)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죠. 일단은 원문의 70년대 문법, 맞춤법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청주(淸州) 상인이 연전에 미역을 사려고 제주도(濟州島)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땅에 딱 붙어 궁글러와서 손으로 뱃전을 잡고 뛰어드는데, 백발동안(白髮童顔)의 두 다리가 없는 남자였다.
    상인이
    "영감님 어찌하여 두 다리가 없오?"
하고 물었더니,
    "내 소시에 표류(漂流)하여 악어에게 먹힌 바 되었다오."
하여, 자세한 사정을 물어본즉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어느 섬에 표박(漂泊)했었지요. 언덕 위로 높다란 대문의 큰집이 있어서 배에 동승한 20여 인이 여러 날 표류한 나머지 기갈을 이기지 못해 일제히 하선하여 모두 그 집으로 달려갔읍죠. 그 집에 사람이 하나 있는데, 신장이 수십여 길이요, 허리통은 열 아름이 넘고, 숯검정 낯바닥에 쑥들어간 고리눈, 말소리는 당나귀 울음 같아 알아들을 수 없읍디다.
    우리들이 입을 가리키고 마실 것을 청하자, 궐물(厥物)은 아무 말도 없이 바로 대문으로 가서 대문을 굳게 닫고, 뒤안으로 가서 땔나무 한 짐을 가져다가 마당 가운데 쌓아놓고, 불을 피워 불길이 오르자, 우리들 총중으로 돌입하여 그 중 키큰 총각 하나를 잡아다가 불 속에 던져 구워먹지 않겠읍니까. 우리들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놀람을 이기지 못해 혼비 백산(魂飛魄散)하고 모골이 송연하여, 다만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었죠.
    궐물이 다 씹어먹고 나서 마루 위로 올라가 독을 열고 무엇을 고래처럼 퍼마시는데 술인갑디다. 다 마시고는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더니, 이윽고 시꺼먼 낯바닥이 뻘겋게 달아올라가지고 마루에 쓰러져 우뢰같이 코를 고는 것이 아니겟오.
    우리들은 이때다 싶어 탈출하려고 대문을 열어보았으나, 한 짝의 크기가 거의 삼간이 되는데다가, 높고도 무거워 힘을 모아 밀어도 꿈쩍도 않고, 담정 높이는 30길이나 되어 뛰어넘기도 도저히 불가능했읍니다. 그때 신세가 그야말로 가마솥에 든 생선이요, 도마에 놓인 고기라 서로 붙들고 통곡하는데, 한 사람이 계교를 내어
    "우리 일행에 칼을 가진 분이 있으니, 저놈이 골아떨어진 틈을 타서 칼로 두 눈을 찌르고 나서 목통을 땀이 어떻겠오?"
    모두들
    "그럽시다. 죽기야 일반이니 실패한들 상관있오."
    하고 일제히 마루로 뛰어올라가, 먼저 두 눈을 찌르니 궐물이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 일어나 손을 더듬어 우리를 잡으려 하나, 이미 실명을 했고, 우리가 요리저리 피하니 잡을 재간이 있나요. 우리들이 모두 흩어져 뒤안으로 가보니, 우리 속에 양과 돼지 5,60두가 있읍디다. 우리들은 양과 돼지를 전부 내몰아 온 집안에 뿔뿔이 흩어지니, 궐물이 뜰로 내려와 사방으로 손을 휘저어 우리들을 찾는데, 사람은 하나도 안 걸리고 잡히는 건 돼지 아니면 양이라, 궐물이 대문을 열어놓고 돼지와 양을 내보내는 것이었읍니다. 우리들은 양이나 돼지 한 마리 씩을 등에 지고 빠져나간즉, 궐물이 손으로 더듬어 양과 돼지인 줄로만 여기고, 으례 내보내서 전부 무사히 빠져나와 급급히 배에 올랐지요.
    이윽고 궐물이 해안에 서서 홀연 크게 울부짖자, 금방 세 놈 대인(大人)이 어느 구석에서 나와가지고 한 발짝에 5,6간씩 성큼성큼 뛰어서 삽시간에 뱃머리로 다가가 뱃전을 잡지 않겟오. 우리들은 사력을 다하여 그놈 손가락을 도끼로 찍고 정신없이 노질을 하여 빠져나왔읍니다.
    또 중간에서 악풍(惡風)을 만나 배가 바위에 부딪쳐 조각조각 부서지고, 배에 탄 사람도 모두 빠져죽었는데, 오직 나 하나만 요행으로 뱃조각을 타고 무변 대해에서 천신 만고 끝에 악어에 먹혀 두 다리는 잃고 가까스로 집에 돌아왔다오.
    그때 광경들은 지금 생각해도 두려운 기가 상기 남아 있어 몸서리가 나고, 치가 떨리고 뼈가 오슬오슬합니다.
    이게 다 팔자가 흉악한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영감은 긴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어떠신지요? 저는 이걸 처음 읽으면서 계속 불안불안했습니다.

거인(대인)이 나오는 대목까지만 해도,
"그래 그럴 수 있지. 대인국 이야기가 한 두갠가?"
술에 취한 사이에 눈을 찌른다고 해도,
"뭐 그것도 충분히 생각해 낼수 있는 계략이지. 이 정도는 우연의 일치라고 보아도..."
라고 열심히 합리화하려고 했지만, 
양(그리고 돼지) 밑에 숨어서 탈출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 정도면 이 "대인도" 이야기 뒤에 오디세이아라는 원전이 있다는 걸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더군요.
 
물론 단순히 비슷한 줄거리라는 것 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할 수도 있겠지요. 이 "대인도"가 오디세이아 제 9서에 등장하는 키클로프스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고 추측하는 이유는 한 번 들은/읽은 이야기를 다시 구연하는 (re-telling) 흔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디세이아에서는 폴리페모스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굴 문을 열어서 양떼를 밖으로 내보내 방목시키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들여오고 문을 닫는다는 치밀한 설정이 먼저 주어지고, 이것을 이용한 오디세우스의 지략!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반면 대인도 이야기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가축들이 뒤안에서 갑툭튀하죠. 너무 뻔뻔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입니다. 한 번 들었거나 읽은 이야기라서 대략적인 줄거리는 알고 있지만 세세한 디테일을 재구성할 정도는 못 되는 이야기꾼이 그려지는군요.
뿐만 아니라 "악어"라는 너무나도 이국적인 동물이 등장하는 것에도 눈길이 갑니다. 악어가 (불교설화 같은게 아니라) 실재하는 동물로 등장하는 야담이 조선에 과연 몇 개나 될까요... 

사실, 이조한문단편집의 엮은이도 저와 마찬가지의 의문을 품었습니다. 대인도 이야기의 <해설>을 보시죠.

<해설>
    「해동야서
」(海東野書)에서 뽑은 것으로 「청구야담」(靑邱野談) 권4 (栖碧外史 海外蒐佚本)에도 수록되어 있다. 원제는 '大人島 商客逃殘命)'인데, 여기서는 「대인도」(大人島)만을 제목을 삼았다.
    이 작품은 청주(淸州)의 미역장수가 연전에 제주도 갔을 때 만난 두 다리가 없는 어떤 노인으로부터 들은 그 노인 자신의 경험담이다. 작품에서 노인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면서 실제 화자(話者)요, 미역장수는 이야기의 전달자(傳達者)이다. 기록자(=作者)가 작품의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청주 상인이 연전에......" 하고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전달자(=미역장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서술한 형식이다.
    그 노인이 대인도에서 식인(食人)하는 대인(大人)으로부터 탈출하는 이야기는 「오딧세이
」에 나오는 것과 유사하다. 이 대인도 이야기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동양인이 상상해낸 대인국(大人國) 전설이 결부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매우 특이한 내용이다.
    이 「대인도」나  「박포장」 및 다음의 「표류기」(漂流記)처럼 바다에서의 모험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해상(海上)의 상업 활동이 활기를 띠면서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해동야서(1864)에 수록된 것은 제가 영인본으로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한국문헌설화전집6, pg. 536-537,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태학사) 아마 청구야담도 확인은 안 해보았지만 제대로 수록되어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오딧세이의 에피소드가 도대체 어떻게 조선의 야담집에 수록되게 된 것일까요?
한 포스팅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다음 게시물에 이어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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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haind 2016/04/09 20:53 # 답글

    저도 중간에 양, 돼지 이야기 나오는 대목에서 소름돋았네요. 더군다나 조선에서는 양이 매우 드물었는데...
  • 남중생 2016/04/09 20:57 #

    그쵸! 또 악어는 어떻습니까, 악어는!!ㅋㅋ
  • 얼어죽을 축덕 2016/04/10 00:29 # 답글

    17세기 초부터 청나라와 교역하면서 이리저리 들은게 많으니...저쪽에서 따운게 아닐까 합니다만..? 오디세이 이후에 그렇게 신나고 재미나는 (?)이야기도 없으니까요
  • 남중생 2016/04/10 18:09 #

    저도 아무래도 중국 쪽 루트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따끈따끈한 다음 포스팅에서 17세기 초 이후의 중국, 그리고 일본의 케이스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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