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심님의 얼마 전 포스팅 아스트랄한 20년대 호떡집 (호떡집에 불났다!)을 읽자마자 떠오른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1959년 作 "이름 없는 별들"인데요.
1929년 11월 3일 광주를 기점으로 일어난 전국적인 동맹휴학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11.3 맹휴(동맹휴학), 혹은 광주학생독립운동/항일운동 등으로 불립니다.
11.3 맹휴(동맹휴학), 혹은 광주학생독립운동/항일운동 등으로 불립니다.
제가 이 사건의 '역사적' 배경을 일일히 설명하기는 어려우니 두산백과를 인용하겠습니다.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福田修三]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朴己玉) 등을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朴準埰) 등과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광주고보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고,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고보 학생들은 11월 3일 광주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11월 3일(음력 10월 3일)은 일왕 메이지[明治, 재위 1867~1912]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어서 학생들은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고보 학생들은 11월 3일 광주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11월 3일(음력 10월 3일)은 일왕 메이지[明治, 재위 1867~1912]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어서 학생들은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주학생항일운동 [光州學生抗日運動] (두산백과)
여기에 조금 더 앞뒤로 살을 붙이자면 이미 몇달 전에 등교 열차에서 (영화에도 나오지만 이 당시에는 기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습니다. 웬지 멋있다...) "개를 먹는 조선인은 야만인이다"라는 일본학생의 발언이 있었고, 이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과 내지인 학생들 사이가 틀어져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10월 30일의 저 여학생 희롱 사건이 있어 반일정서가 한껏 고조된 때에, 11월 3일 명치절이 마침 (음력) 10월 3일 개천절과 겹쳐버린 것이 계기가 되어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기 시작합니다. 주요 구호는 저 호떡집 장면에서도 나오듯이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였습니다.
(여기까지의 정황 설명은 11.3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최성원 씨가 집필한 "11.3 운동 : 광주 학생 독립 운동사" (대한교과서, 2004)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 (고려원, 2001)을 참고한 기술입니다. 이 "개천절"의 언급은 상당히 뜬금없어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활발하고 신도가 많은 종교는 단군교(대종교)나 증산도 같은 민족종교였다고 합니다.)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라고 하니, 동등한 교육이 기회! 좋은 것! 같이 들리지만, 1929년 조선에서는 교련 교육을 일본인 학교를 대상으로만 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 말은 즉 군사교육을 받고 각목 등의 무기를 쥐어진 일본인 학생과 군사교육을 받지 못한/않은 조선인 학생의 대립구도도 있다는 것이죠.
(슈타인호프 님의 일제시대 조선인에 대한 교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참조)
무엇보다 이 영화를 소개하고 싶은 이유는, 해방이 된지 얼마 안 된 때라 그런지 영화 속의 고증이 상당한 수준으로 되어있습니다. 영화 뒷부분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나올 때 보면 명치절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카도마츠(門松, 일본 전통 축제에서의 소나무 장식)도 제대로 되어있고 길거리도 세트장이 아니라 그냥 해방 이후로 그대로 남아있는 거리를 찍은 것일텐데도 식민지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아마 호떡집의 풍경도 일제시대 당시와 상당히 근사할 것이라고 봅니다. 아무튼, 소개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영화 속 장면을 보도록 합시다.
아마 호떡집의 풍경도 일제시대 당시와 상당히 근사할 것이라고 봅니다. 아무튼, 소개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영화 속 장면을 보도록 합시다.
(28분 50초부터 호떡집이 등장합니다.)

간판에 보면 만두(饅頭)라고 쓰인 걸 보면 호떡 이외에도 여러가지 음식을 파는 듯 싶습니다.
가게 밖에는 메뉴 진열대가 있습니다. 일본식?이라고 느껴지네요.

여기서 파는 호떡은 저희가 흔히 아는 호떡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조청이나 다른 소스에 찍어먹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냥 손으로 집어먹는군요.
조청이나 다른 소스에 찍어먹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냥 손으로 집어먹는군요.

중국인 부부가 운영을 하고 있군요. 남편은 "왕 서방"이라고 불립니다.
가게의 주 고객층인 학생들은 자신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왕 서방 내외에게 반말을 합니다.
가게의 주 고객층인 학생들은 자신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왕 서방 내외에게 반말을 합니다.
왕서방과 그의 아내도 부족한 조선어 실력으로나마 (모든 말을 과거형으로 한다거나, 중국어 표현을 섞어 쓰거나) 반말로 대꾸하고요.
그렇다면 역사관심님의 포스팅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었던 만보산 사건(1931)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29년에서 불과 2년 뒤의 일입니다) 이 당시 조선사람들은 중국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던 걸까요?
이렇게 속단하기 전에 이 가게의 비밀이 숨겨져있는 다락방으로 가봅시다.

바로 이곳, 성진회(11.3 운동의 주역이 된 독서토론회)가 모이는 아지트입니다.
앗! 뒤에는 중국 국민당 깃발과 쑨원의 얼굴이 찍힌 포스터가 있군요.
사진과 문구 배치 등을 따져보았을 때, 아무래도 아래와 비슷한 포스터가 아니었을까 추정됩니다.
(문구는 대체로 동일하고 위에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고 쓰인 부분에 깃발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음 (革命尙未成功)’을 탄식하면서 '동지들이 혁명의 성공을 위해 계속 힘써줄 것 (同志仍須努力)'을 당부하는 쑨원의 유언(1924)를 담은 포스터입니다.
뒷배경이 클로즈업될 때를 각각 살펴보면,
(사진들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이렇듯 서로 글씨가 유사해 보입니다. (두번째 화면의 오른쪽 가에 보이는 것이 포스터의 왼쪽 문구입니다.)
사실 이건 제가 정황상 근거를 짜맞춰본 데에 불과합니다.
위의 포스터처럼 쑨원의 자필을 그대로 담은 포스터라는 가정 하에,
상(尙)자의 오른쪽 다리?를 둥글게 말아쓴 부분(마치 위爲처럼 보입니다.),
동지의 동(同)자가 마치 간체자 나라 국(国)과 오인할 정도로 굵고 정사각형으로 쓴 부분,
그리고 마지막 력(力)자가 다른 자들에 비해 가냘프게 그려진 것 등등이 (실제로 그 글자들이라면) 닮았습니다.
정작 알아보기 쉬워야할 "혁명"이라던가 "성공" 따위의 글자는 잘 안 보이는 탓에, 오히려 (다른 자로 오인하게 생긴) 독특한 글씨체를 갖고 알아보게 되네요.
이 밖에도, 쑨원 초상화의 양 옆에 6자+6자로 자주 쓰이는 문구라면 저 유언이 맞는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의견을 갖고 있거나, 더 잘 알고 계신 분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중국인 호떡 가게는 실제로 독립운동의 아지트로 쓰였을까요? 국민당을 지지하는 중국인 상인이 조선의 학생독립운동을 지원했을 가능성 말입니다.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지만 최성원 씨의 기억에 의존한 기록에는 그런 언급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가 (비록 고증이 놀라울 정도로 잘 되어있지만) 50년대라는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되새겨보아야합니다. 한국전쟁을 겪은 대한민국과 대만으로 쫓겨난 중화민국이 공유하고 있는 비슷한 역사를, "일제에 대항하는 중국인과 조선인의 연합"이라는 역사에 투영시켜서 그린 영화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죠.
분명히 여기에 영화계의 한중합작 분위기(이건 적륜님의 합작영화 포스팅을 참조)라던가 덧붙여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을 것 같은데, 그러기엔 한 포스팅이 너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일단 "호떡집을 배경으로 한 일제시대 영화 소개"라는 본분에 충실하게, 여기서 줄이고
앞으로 또 한 번 이 영화를 이야기할 일이 있으면 그 때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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