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열하일기에 언급된 동아시아 당대 최고의 의서, 소아경험방.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상당히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데 그중 금료소초(金蓼小抄)는 의학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청나라에서 발달된 의술, 의서를 찾아와 조선에서 보급하려던 의도가 서문에서부터 보입니다.
이 서문, 그러니까 금료소초서(金蓼小抄序)는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나라 의학(醫學) 지식은 그다지 넓지 못하고 약 재료도 그다지 많지 못하므로, 모두 중국의 약재를 수입해다 쓰면서도, 항시 그것이 진품이 아닌 것을 걱정하였다. 이와 같은 넓지 못한 의학 지식을 가지고, 또 진품이 아닌 약재를 쓰고 있으니, 병은 으레 낫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에 대리시경(大理寺卿) 윤가전(尹嘉銓)에게,

“요즘 의서(醫書)들 중에, 새로운 경험방(經驗方)으로 사서 갈 만한 책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경(尹卿)은,
“근세의 일본(日本) 판각 《소아경험방(小兒經驗方)》이 가장 좋은 책인데, 이 책은 서남 해양 중에 있는 하란원(荷蘭院)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또 서양의 《수로방(收露方)》이란 책이 극히 정미로우나, 시험해 보니 그다지 효력이 없었는데, 이는 대체로 사방의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기품과 성질이 다른 까닭입니다. 방문만 따라서 약을 준다는 것은, 조괄(趙括)의 병법(兵法) 이야기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정속금릉쇄사(正續金陵瑣事)》에는 역시 근세의 경험들을 많이 수록하였고, 또 《요주만록(蓼洲漫錄)》이란 책이 있고, 또 《초비초목주(苕翡草木注)》ㆍ《귤옹초사략(橘翁草史略)》ㆍ《한계태교(寒溪胎敎)》ㆍ《영추외경(靈樞外經)》ㆍ《금석동이고(金石同異考)》ㆍ《기백후청(岐伯侯鯖)》ㆍ《의학감주(醫學紺珠)》ㆍ《백화정영(百華精英)》ㆍ《소아진치방(小兒診治方) 등은 모두 근세의 저명한 학자들이 지은 책이어서, 북경 책사에서는 무엇이나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연경으로 돌아와 하란(荷蘭)의 《소아방(小兒方)》과 서양의 《수로방》을 구해 보았으나 모두 얻지 못하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책들도 더러는 광동(廣東) 지방 각본(刻本)들이라 말했으나, 책사들에서도 모두 그 명목조차 몰랐다. 우연히 《향조필기(香祖筆記 청의 왕사진(王士稹) 저)》를 들추다가 그 중에서 《금릉쇄사(金陵瑣事)》와 《요주만록》의 기록을 발견했으나, 그 원서(元書)는 모두가 의학 관계의 내용은 아니었고, 《이상(貽上 왕사진 저)》의 기록은 전부가 경험에 관계되는 기록이었으므로, 나는 수십 종의 법을 따서 베끼고, 이 밖의 잡지와 필기 중에 실린 옛날 방문과 잡록들을 아울러 초록하여, 〈금료소초〉라 이름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산중에는 의서도 없고 약제도 없으므로, 가다가 이질이나 학질에 걸리면 무엇이든 가늠으로 대중하여 치료를 하는데, 때로는 맞히는 것도 있기에 역시 아래에 붙여 산골 속에서 쓰는 경험방을 삼으려 한다. 연암(燕巖)은 쓰다.

(출처: 한국고전종합DB)


여기서 한 문장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근세의 일본(日本) 판각 《소아경험방(小兒經驗方)》이 가장 좋은 책인데, 이 책은 서남 해양 중에 있는 하란원(荷蘭院)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란(荷蘭)"은 네덜란드를 말하는 것일테고, 그렇다면 이 "소아경험방"은 난학 의서라는 걸 유추할 수 있습니다. 중국까지 수출될 정도로 유명한 난학 서적이었다면 일본 쪽에서도 몇번 다뤘을 법한데, 구글 검색을 해보면 이 "소아경험방"이라는 제목의 책은 연암집 이외의 출처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난학에 대해서는 적륜 님의  조선의 난학: 이덕무의 사례 참조)

한편, 서문 후반에서는 책 제목을 "하란(荷蘭)의 《소아방(小兒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윤가전이 열거한 여러 책 제목들 중, 소아경험방과
《소아진치방(小兒診治方)》을 합쳐부른 것 같습니다.
"경험방"은 말그대로 의사의 경험을 축적하여 일종의 경험 통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진치방"은 의학 이론에 따른 진료/치료 방법을 서술한게 아닐까 싶네요.

"소아방(小兒方)"으로 책 제목을 검색했을 때 부합하는 검색결과는,
하령소아방(遐齢小児方
-칼라 ver. http://base1.nijl.ac.jp/iview/Frame.jsp?DB_ID=G0003917KTM&C_CODE=KNIK-00010&IMG_SIZE=&IMG_NO=1
- 흑백 (정자체) ver. http://edb.kulib.kyoto-u.ac.jp/exhibit/me5/image/me5shf/me5sh0001.html
소아방휘(小児方彙)
소아방감(小児方鑑) - http://www.wul.waseda.ac.jp/kotenseki/html/ya09/ya09_01088/index.html
소아방간(小児方幹)
이 정도로 정리됩니다.
 
한편, 야후 옥션에 유년방간이라는 고서가 매물로 나와있는데, 알고보니 이게 바로 유력후보(?) 중 하나인 소아방간이었습니다.
(http://page10.auctions.yahoo.co.jp/jp/auction/m130119802 )

유년방간(幼年方幹, 요우넨호우칸)이라는 제목의 책은 비록 얼핏 볼때는 소아경험방이라는 제목과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책 속을 들여다보면 문장이 소아(小兒)로 시작하는 경우가 사뭇 자주 보입니다. 물론, 제목도 제목인 만큼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처방을 적은 책이라 그런 것도 있겠습니다만, 결국 "소아경험방"이라는 제목의 의서가 없다는 것은 윤가전(尹嘉銓)이라는 사람이 책 제목을 헷갈려서 잘못 가르쳐준 것이거나 박지원이 잘못 알아듣거나 잘못 받아적은 것이겠지요. 
그러니 유년방간 = 소년경험방이라고 섣불리 주장하고 싶은건 아닙니다. 오히려 맥락상 일본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네덜란드의 소아과 분야의 의학서적이라고 보는게 더 안전한 추측이겠죠. 


아래 이미지도 왼쪽 페이지 셋째 줄부터 "소아"로 시작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심지어 (맛을 가미한) 인삼탕의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네요... 흥미롭습니다.
(에도시대 인삼에 대해서는 
迪倫님의 목숨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인삼 - 17-18세기 에도의 인삼붐을 참조)
또 옥션사이트에서는 매물을 소개하기를,
柴田玄泰は柴田元泰のことだと思います。土生玄碩は江戸時代後期の眼科医。国禁を侵して開瞳術を施した西洋眼科の始祖。シーボルト事件にかかわる。迎翠堂は土生玄碩の私塾のようです。
"柴田玄泰는柴田元泰라고 생각됩니다."라는 애매모호한 비문?을 써놓았는데, 아마도 표지에 써있는 柴田氏方, 그러니 "시바타(柴田) 씨의 처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책의 저자는 시바타 겐타(柴田玄泰)라는 거겠죠. 
시바타 겐타는 많은 곳에서 시바타 겐요우(柴田元養)로 소개되어있기도 한데, 아무래도 클 태 자()와 기를 양 자(養)가 헷갈리기 쉬운 글자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쪽이 맞는지는 현재로썬 모르겠습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소아방간(小児方幹)의 저자도 시바타 겐요우(柴田元養)로 알려져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소아방간이 유년방간과 동일 작가의 동일 저술(의 다른 판본)이라고 보는게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한편, 하부 겐세키(土生玄碩)는 지볼트 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일본최초의 서양 안과 의사였다는 설명을 하는데, 그 이름은 아래 사진에서 보입니다. 
(지볼트 사건에 대해서는 
迪倫님의 1866년 젊은 부부의 초상, 그리고 woorden van liefde(사랑의 말)를 참조)
바로 밑에 있는 法眼(호우간)은 시바타 겐타(겐요우)의 통칭이었다고 합니다.
한 줄을 주욱 해석하자면, "안과(의사)  하부 겐세키와 호우안(시바타 겐타/겐요우)가 사용하는 처방이다." 정도로 번역되지 않을까요?

연암이 그토록 찾으려했지만 결국 못찾은 (어쩌면 제목을 잘못 알아서? ㅠㅜ) 의서, 중국에서도 "근래에 출간된 가장 좋은 의서"라고 인정받던 "소아경험방"의 정체는 바로 이 유년방간(幼年方幹), 혹은 소아방간(小児方幹)이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한중일 지식인들이 두루 인정한 "동아시아 최고의 의서"라고 부를만합니다. 시대는 다소 차이나지만, 이시진의 본초강목이나 허균의 동의보감 이래로 이렇게 임팩트 있는 의학 서적이 일본에서 나왔다면 괄목할만하네요.

덧글

  • 진냥 2015/02/12 21:03 # 답글

    오오,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유년방간]이 정말로 [소아경험방]이라면 과연 어떤 내용이기에 그토록 찬사를 얻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 남중생 2015/02/13 00:18 #

    흥미롭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조금 더 조사를 하고 글의 내용을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유년방간은 "소아방간"이라는 제목으로도 (혹은 더 널리) 배포되었던것 같습니다.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에 대한 조사를 마친 뒤, 제 능력껏 써보이겠습니다.
  • 아인 2015/02/13 04:00 # 삭제 답글

    三木榮의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서도 언급되었나 보군요. 구글링해보니 의학사에 있어서 선재적 연구가 있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입니다.
  • 남중생 2015/02/13 18:33 #

    오오, 감사합니다. 일본에서도 다룬적이 있긴 하군요!
  • 역사관심 2015/02/13 08:16 # 답글

    흥미로운 가설입니다!
  • 남중생 2015/02/13 18:33 #

    감사합니다. 다만 말씀하신 대로 가설일뿐이라 좀더 실증을 찾아봐야겠습니다.
  • 迪倫 2015/02/14 13:28 # 답글

    재미있습니다. 조금만 더 연결고리가 나오면 좋겠군요.... 관심이 가는군요^^
  • 남중생 2015/02/14 17:30 #

    감사합니다! 정말 뭔가 결정적인 연결고리 하나를 딱! 찾아내고 싶습니다.
  • Nocchi 2015/05/20 16:55 # 답글

    안녕하세요 재미있는 글 잘 읽고 갑니다
    옥션에 올라온 저런 책은 제가 한 권 정도 갖고 있어도 좋을 거 같네요 ^^
    3만엔 이라는 가격은 .. 흠 .. 조금 여유가 있으면 ㅠㅠ
    다행(?)이도 3월 2일에 팔려나가 종료가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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