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표류(漂流)하는 실학, 부유(浮游)하는 서학?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흥미로운 자료를 찾았습니다. 이에 관해서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과 엮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조선 후기의 무신 이광빈, 이방익 부자는 매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이들은 제주도민인데, 아버지 광빈이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풍랑을 맞아 일본으로 표류하게 됩니다. 

방익의 부친은 전(前) 오위장(五衛將) 광빈(光彬)인데 일찍이 무과에 응시하려고 바다를 건너다가 표류되어 일본 장기도(長崎島)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외국 선박들이 많이 모이고 시장과 마을이 번화하였습니다. 그때 의사(醫士) 한 사람이 광빈을 맞아 그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잘 대접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광빈이 굳이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하니 의사가 내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예쁘장한 젊은 계집을 나오라 하여 광빈에게 절을 시키면서,
“내 집에 천금 재산을 쌓아 놓았으나 사내자식은 하나도 없고 다만 이 계집애가 있을 뿐이니, 원컨대 그대는 내 사위가 되어 달라. 내가 늙어서 죽게 되면 천금의 재산은 그대의 차지가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계집을 슬쩍 보니 치아가 서리같이 하얗고 아직 철즙(鐵汁)을 물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과연 처녀였습니다. 광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제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재물을 탐내고 여색에 연연해서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이는 개돼지만도 못한 자이다. 더구나 나는 내 나라에 돌아가면 과거에 올라 부귀를 누릴 수 있는데, 하필 그대의 재물과 그대의 딸을 탐내겠는가.”
했더니, 의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광빈이 비록 섬 속의 무인(武人)이지만 의젓하여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었으며, 그 부자(父子)가 멀리 이국에 노닐게 된 것도 역시 기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치아에 대해서는, 조선인이 과연 일본 여성의 풍습을 저렇게 잘 알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얼핏 들지만, 1800년대 초반 시를 읽어보아도,
勝歌妓臛出歌妓。勝歌妓。肉臛名。 造法先從黍齒

승가기 국물은 가기보다 낫다고 하는데, 
만드는 법은 앞서 일본(검게 칠한 이빨)으로부터 전해졌네

이 정도는 가볍게 시적 관용어구로도 커버하고 있습니다.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에 대해서, (http://dylanzhai.egloos.com/2935918)
 
이 사건은 보시다시피 굉장히 간략하게 서술되어있습니다. 언제 일어난 일인지도 명시되어있지 않습니다만, 이광빈은 1765년 무과에 급제한걸로 보아 그 전의 일이라고 추정할 뿐입니다(https://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1734_1_0021782). 원문은 사실 아버지 이광빈이 아니라, 아들 이방익의 표류 사건을 기록한 글인 까닭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아들이 표류를 합니다. 대만으로 말이죠. 
하지만 아들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우선은 아버지의 표류담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아마 제주도에서 나가사키로 직행(?) 표류를 했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습니다. 나가사키는 쇄국시대 일본의 유일한 개항지로, 중국인, 네덜란드인이 거주하는 곳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조선에서 표류해 오는 사람들을 송환할 때까지 보호하는 시설도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 국제선은 나가사키에서만 탈 수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광빈은 나가사키의 조선관(표류민 보호시설)에서 생활했을 것 같은데... 독특하게도 일본인 의사가 그를 극진히 대접하더니 자신의 딸과 혼인을 제안하고, 재산 상속을 약속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아무나 표류민을 함부로 만날 수 없었습니다. 번의(藩醫) 정도의 (재산과) 권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저 의사가 정확히 누구였는지 알 방도가 없지만, 나가사키의 의사라고 하면 혹시 난방의(蘭方醫)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이광진은 조선인 난학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상상이 나래를 펼칩니다.

아버지 광진의 이야기는 이쯤 일단락 짓고, 아들 이방익으로 넘어가 봅시다. 1796년 10월, 대만에 표착한 그와 동료들은 본토 중국으로 건너가, 복건성을 통과하고 항주(杭州, 항저우), 소주(蘇州, 쑤저우)를 지나 산동성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나긴 노정과 그 사이사이의 견문을 기록한 것은 이방익 본인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학자 연암 박지원입니다. 사실은 정조 임금이 일전에 그의 문체를 꾸짖은 이후로, "바른 문체를 이용한 글쓰기"를 연습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좋은 글쓰기 주제(이방익의 표류기)를 너에게 주겠으니, 어디 한번 반성했는지 보자."라며 하명한 것이죠. 대상 독자가 왕이기 때문에 글은 굉장히 공손하고, 정작 이방익의 경험담은 짤막한 토막들로 이루어져있는데 반해, 그 토막 마다 달린 박지원의 해석/추론/고증/주석이 오히려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방익이 "양악루(
岳陽樓)에 올라 동정호(洞庭湖)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걸 그대로 기록하면서도 "신이 생각컨대, 운치있게 시 좀 짓는다는 사람은 누구나 양악루와 동정호에 대해 떠들어대기를 좋아하니, 이건 아마도 이방익이 꾸며낸 이야기인듯 싶습니다."라고 디스를 하는 경우도 있죠.
제가 지도를 보면서 생각해보기에도, 본국으로 송환되는 사람을 직행코스에서 한참 서쪽에 있는 동정호까지 보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관심을 끄는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금산사(金山寺)는 오색의 채와(彩瓦)로써 지붕을 덮었으며 절 앞에는 석가산(石假山 인공으로 만든 돌산)이 있는데 높이가 백 길은 됨 직하고 또 섬돌을 5리나 빙 둘렀으며 이층의 누각을 세웠는데 아래층은 유생(儒生) 수천 명이 거주하면서 책을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고 위층에는 노랫소리 피리 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으며 낚시하는 사람들이 낚싯대를 잡고 열을 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석가산 위에는 십자형(十字形)의 구리기둥이 가로놓이고 석판(石版)으로써 대청을 만들었으니 바로 법당(法堂)이었으며, 또 종경(鐘磬) 14개가 있는데 목인(木人 나무 인형)이 때에 맞추어 저절로 치게 되어 있어 종 하나가 먼저 울면 뭇 종이 차례로 다 울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오색 빛깔의 휘황찬란한 지붕, 이층누각, 무언가를 필사하는 학생들,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대리석 타일(石版), 여러 개의 종이 시간 맞춰 울리는 종탑, 백 길이나 될 듯이 아득히 솟아있는 인공조형물, 그리고 그 위에 달린 십자형의 구리기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이 "금산사"라는 건 천주당이 아니었을까요?
더욱이 양악루나 동정호 같은 조선에서도 잘 알려져있는 명승지들을 이야기하다 말고, 이름도 생소한 금산사가 기록에 남은 이유는 이방익이 그만큼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이라고 (세로로) 써있는 현판을
?
이라고 잘못 읽은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만약, 이게 교회건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박지원은 이 금산사가 천주당이라는 걸 알아차렸을까요?
우선 박지원 본인도 중국사신단인 연행사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서 천주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친구 홍대용에게서 천주당의 파이프오르간에 대해 듣고 호기심이 동해서 간 것입니다. 
한국 고전 종합 DB의 열하일기 중 천주당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layout/contentsIframe.jsp;jsessionid=zzCNM1gGFJx9QpXgvhvvv0blyjHL6vFjgJFdJbyZT9n6pCTbJ0kT!423506397%3FbizName=MK%26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253FbizName=MK%2526seojiId=kc_mk_h047%2526gunchaId=av006%2526muncheId=01%2526finId=001)
이렇듯 천주당을 직접 방문하고 그곳에 대한 세세한 기록을 남긴 박지원은 이방익이 묘사하는 건물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요? 아무래도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엉뚱하게 중국 양쯔강에 있는 금산(山)이라는 지명을 고증하고 있는걸 보면 말이죠.
혹은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면천 군수였던 있던 박지원은 그의 부임지, 면천에서 교세를 넓히는 천주교도들을 교화하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습니다. 신유박해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천주교도들을 말로 타이르는 그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어째 되었든 박지원은 "천주교"라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과 피부를 맞대고 있었고, 그만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연암이 천주교/서학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지식 수준은 迪倫 님이 소개한 적 있습니다. (http://dylanzhai.egloos.com/3458338)
전문은 이쪽입니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layout/contentsIframe.jsp;jsessionid=zzCNM1gGFJx9QpXgvhvvv0blyjHL6vFjgJFdJbyZT9n6pCTbJ0kT!423506397%3FbizName=MK%26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253FbizName=MK%2526seojiId=kc_mk_h047%2526gunchaId=av006%2526muncheId=01%2526finId=001)

내가 보기에, 지금 중국에 있는 천주당(天主堂)의 서양 사람들은 비록 역법(曆法)에는 정통하지만 모두 요술쟁이이다. (중략) 사학의 이른바 ‘기리시단(伎離施端 크리스천)’이란 네 글자는 사람의 이름인지 법호인지 모르겠으나, 대저 극히 요망하고 괴이한 것이다. 처음에 일본 시마바라〔島原〕에 살면서 야소(耶蘇 예수)의 학으로써 선교하였다. 이에 일본 민중들이 그 설을 한 번 듣고서 염세적인 생각에 휩쓸리어 제 몸뚱이 보기를 표류하는 뗏목이나 부러진 갈대 줄기처럼 여겨, 세상일에 구애받지 않고, 사는 것이 즐거운 줄도 모르며, 칼에 죽거나 형(刑)에 죽는 것을 도리어 자신의 영화로 여겼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기리시단이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호칭이다.’라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그 술법을 배워 관백(關白) 미나모또 이에야스〔源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죽음을 당했다. 유키나가의 가신(家臣) 다섯 사람도 유키나가의 죄에 연좌되어 시마바라로 귀양을 갔는데 다시 사교(邪敎)를 선동하여 그 도당이 수만 명에 달하자, 히젠주〔肥田州〕를 습격하여 태수를 죽이니, 이에야스가 토벌하고 체포하여 다 죽여 버리고, 우리나라에 서계(書契)를 보내 통고하였다. 그래서 바닷가를 순시하여 잔당을 염탐해 체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후에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이에야스가 기요마사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기요마사가 마다하며 ‘스스로 야소교를 받드는 자가 자살한다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니 원컨대 칼날에 죽여 달라.’ 하므로, 마침내 베어 죽였다. 유키나가와 기요마사는 모두 왜놈의 날랜 장수로서, 임진년에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을 적에 가장 흉악하고 잔인하였다. 실로 우리나라로서는 자손 만대의 원수인데도 마침내 천벌을 모면하게 되어 죽은 원혼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원한과 분노를 씻을 수 없었는데, 끝내 스스로 사교에 빠져 모두 참형을 당했으니, 신령의 이치가 너무도 밝아서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이 정도로 상세히 공부를 한 연암이 과연 십자가가 달린, 풍금 음악이 흘러나오는 "절"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했을지... 는 의문입니다.

이 다음으로는 또다른 실학자와 또다른 표류민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정약용의 형 정약전과 홍어 상인 문순득의 이야기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신유박해의 피바람에 휘말렸습니다. 정약종은 배교하기를 거부하고 처형당했고, 배교를 선언한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유배를 가게 됩니다.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 중에 어류도감인 자산어보를 썼다는 건 유명한 사실입니다. 그에 비해 덜 유명한 사실은 한 마을에 살던 문순득이라는 장사꾼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필리핀까지 표류하고 돌아온 사건(1801년 12월~1805년 1월)이죠. 
문순득의 표류담은 바로 이 정약전이 글로 기록했습니다.

저는 바로 이 "전근대 표류민은 (그 당시 문맹률과 뱃사람들의 신분을 생각했을 때) 자신의 경험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우연히 인맥이 닿는, 그리고 호기심 많은 학자를 통해서만 그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다"는 현상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방익(과 그의 아버지)의 표류담, 그리고 문순득의 표류담 뿐만아니라, 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의 감옥에 갇혔을 때 옆 감방에 수감된 작가가 그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동방견문록"이라는 사실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정약전은 이 글에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표해시말의 본문 중, 이런 부분이 눈길을 끌어당깁니다.

"신묘(神廟)는 30~40칸의 긴 집으로 비할 곳 없이 크고 아름다웠으며 이로써 신을 모시는 대중을 대접하였다. 신상을 모셔 놓았다. 신묘 한쪽 꼭대기 앞에 탑을 세우고 탑 꼭대기에 금계(金鷄)를 세워 바람에 따라 머리가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스스로 돌게 하였다. 탑 꼭대기 아래 벽의 밖으로 크기가 같지 않은 종 4〜5개를 걸어 제사와 기도 등 일에 따라서 다른 종을 친다."
이 닭 모양 풍향계가 달려있는 신묘(神廟)는 (예상하셨겠지만) 필리핀에 있는 천주교 성당입니다.
St. Paul's Metropolitan Cathedral, 혹은 Vigan Cathedral이라고 불리죠.
자, 그렇다면 다시 같은 질문으로 돌아가봅니다.
한때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전은, 문순득의 묘사를 듣고, 그가 말하는 것이 성당이라는걸 알았을까요?
알았다면,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해서 의도적으로 간략한 기록만 남긴 걸까요?

또 제 공부가 부족한 까닭으로 여기서 상세히 다루지는 못하지만, 표류자와 실학자(아니, 이 경우에는 난학자?)의 조합은 우리나라에서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오오츠키 겐타쿠(大槻玄沢)의 아들 오오츠키 반케이(大槻
磐渓)가 글로 옮긴 여송국표류기(呂宋国漂流記)가 그것이지요.
(http://www.hh.em-net.ne.jp/~harry/komo_steamb_front.html)
센다이 (仙台, 지금의 미야기宮城 현) 출신의 두 표류민, 長次郎(52)와 喜兵衛(29)가 1841년 10월에서 문순득과 마찬가지로 필리핀까지 갔다가 1843년 12월에 나가사키에 이르기까지 표류한 기록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일본으로 송환되는 과정에서 아편전쟁 직후의 홍콩에서 머무르며 영국의 증기선을 보았다고 합니다. 일반 일본인들에게는 페리 제독의 흑선도래(1853)가 처음으로 증기선을 보게 되어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을거라는 통설과 달리, 이들의 경험담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막부에게 올리는 보고서, 오란다후우세츠가키에서 미국 함대가 오고 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어, (증기선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거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군요.

이웃 블로거 迪倫님의 이글루에서 오오츠키 겐타쿠가 언급된 포스팅 두 개를 링크하고 이만 줄이겠습니다.
(http://dylanzhai.egloos.com/3041301)
(http://dylanzhai.egloos.com/3099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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