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조선으로 파견된 중국의 늑대인간 부대, 낭병(狼兵) 혹은 원병(猿兵)?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주의: 이 게시물에는 한문 사료가 오독되어 있습니다. 
이후에 오독을 고친 [주워담는 글] 임진왜란에 참전한 원병(猿兵)을 먼저 읽는 것을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2018. 0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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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심 님의 수인부대(?)와 해귀海鬼 (임진왜란 특수부대) (http://luckcrow.egloos.com/2505788)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되어 씁니다.

저 "XX三百"이라고 써있는 깃발을 처음 봤을 때, 저도 '두 번째 글자는 (맥락을 염두에 뒀을 때) 병兵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글자는 흐릿한 것도 있지만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더군요. 역사관심 님은 처음에 시기할 시(猜)자로 읽으셨다고 하셨고, 초록불 님은 문맥 상 정병(精兵)의 정(精)자일거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글자에서 부수를 뺀 나머지 오른쪽 부분이 푸를 청(靑)일거라는 추측을 이어나가신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부수를 뺀 부분이 과연 청(靑)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사관심 님이 처음에 시(猜)자로 읽으셨듯이, 글자 왼쪽 부분이 짐승을 뜻하는 큰 개 견(犭)자 부수로 읽는 것은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실제로 병사들이 짐승(이리, 승냥이, 혹은 늑대)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늑대인간 군단 같은 녀석들은 누굴까... 하는 궁리 끝에 "큰 개 견 부수를 쓰는 한자+병(兵)"같은 식으로 조어를 해서 검색해보던중 이리 낭(狼)자에서 뭔가 걸려들었습니다!

중국어 위키피디아(http://zh.wikipedia.org/wiki/%E7%8B%BC%E5%85%B5)는 낭병(狼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항상 그렇듯이 야매 번역입니다.)

낭병(狼兵), 기원은 명조 중엽, 광서 지방에서 유래, 광동 일대 초모 이래의 군대, 명조의 정예 부대다. 주요 구성원은 장족, 요족[1]이 주를 이뤘고, 토관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 낭병은 병적(兵籍) 안에 없고, 원래 비정규 군대로, 용맹하고 잘 싸웠기 때문에,  명나라 왕조는 여러번 그들을 각지의 비적 토벌과 왜구에 대항하는 전쟁에 썼다. 그러나 군 기강이 아름답지 않아서, 백성의 두려움와 원망을 받았다.

狼兵,起源於明朝中葉,為由廣西廣東一帶招募而來的軍隊,是明朝的精銳部隊。主要以壯族瑶族成員為主,受土官節制。狼兵不在兵籍之內,原非正規軍隊,因為勇猛善戰,明朝多次將他們用於各地剿匪與對抗倭寇的戰爭之中。但也因為軍紀不佳,受到百姓的畏懼與怨言。

[1] 광동성의 소수민족.

역사

역사상 낭병이 출현하는 최초의 기록은, 명나라 영종 정통 2년, 광서 지방에서 조정에 상소하기를, 낭병의 활용을 제안하여, 비적을 토벌하는데 함께 썼다. 그 후, 명나라 조정은 여러번 낭병을 이용하는 작전을 쓴다[1]. 낭병은 정식 군대 편제 안에 없고[2], 일개 특수병력으로, 토관 관리 대상이며, 일반 관리의 통제를 받지 않아[3], 조정 편제의 관병이나, 각 지방에 속한 토병과 다르다.

낭병은 주로 광서 지방 출신이지만, 광동도 그들의 낭병이 있었다[4].

주석

  1. ^ 정덕(正德) 12년 4월 초8일, 왕양명의 <민광첩음소閩廣捷音疏>: 각 초소에 의지하는 것에 대해 아뢰어 칭하길: "적의 소굴은 험악하고,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는데, 우리 병사들은 만나면 꺽이고, 적세는 날로 강해집니다. 간절히 아뢰건데 낭병을 더하여, 다음 가을에 다시 (토벌군을) 일으키시옵소서"라고 신하들에게 갖춰 올렸다.
  2. ^ 명조 관군은 토병과 낭병을 함께 부르는데, 낭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규 관병 밖의 부대다. 정덕 12년 7월 초5일, 왕양명의 <의래 칙병 양소>에서 같이: "그 양광(광동과 광서), 남, 간(贛, 간저우), 여전히 각각 관군과 낭병을 거느려서, 협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자보호광 순무우부도어사 진협공사조咨報湖廣巡撫右副都御史秦夾攻事宜>: "왕년에 크게 정복할 때, 더 이상 선악을 분별할 수 없고, 양민에게 깃발을 주었고, 병사를 거느려 방어하는데 이르러서, 낭병, 토병, 관병이 공훈을 탐내어 함부로 죽이니, 옥과 돌을 구분할 수 없었다[2].
  3. ^ 《명사明史》권211〈심희의沈希儀 전〉:「희의希儀가 일찍이 조정에 글을 올리기를, 낭병을 말하고 또 와 동[3] 말하였다. 와 동은 도적에 속하는데, 낭병은 죽을지언정 도적이 되지 않으니, 낭병은 순종하지만, 와 동僮은 거스릅니다. 낭병은 토관에 예속되어있고, 와 동僮은 유관(流官)[4]에 예속되어있습니다. 토관은 냉엄하여 충분히 낭병을 다스리지만, 유관(流官)은 힘이 약해 요와 동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만약 와 동僮을 나눠 가까운 지방의 토관에게 따로 예속되게 하면, 토관은 대대로 부귀롭고, 감히 남들이 원망하지 않을것입니다. 국가의 힘으로 토관을 제어하고, 토관의 힘으로 요瑤, 동僮을 제어하여, 모두 낭병으로 만든다면, 양광(광동과 광서)는 대대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4. ^ 정덕正德 12년 9월 15일, 왕양명 <의협칙방약소> : "단 지금 광동의 낭병이 곳곳의 부와 강에서 군사를 다시 일으켜 돌아와, 전처럼 거느리기를 원하니, 한 달포도 안 되어 실현될까봐 두렵다.」
[2] 옥석혼효,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지 못함.
[3] 마찬가지로 소수민족 이름.
[4] 해당 지역 출신으로 종신제 세습직인 토관과 달리, 유관은 중앙정부에서 타지인을 일정 임기 동안 파견되는 관리를 일컫는다.

歷史上最早出現狼兵的記載,起於明英宗正統二年,廣西向朝廷所上的奏折,提到狼兵的存用,並用以剿匪。此後,明朝多次調用狼兵作戰[1]。狼兵不在正式軍隊編制之中[2],是一個特殊兵種,由土官管理,不受一般官吏控制[3],與朝廷編制的官兵、各地方編練的土兵不同。

狼兵主要出於廣西,但廣東也有自己的狼兵[4]

  1. ^ 正德12年5月初8日,王陽明<閩廣捷音疏>:「及據各哨呈稱:『賊寨險惡,天氣漸暄,我兵遭挫,賊勢日盛。乞要奏添狼兵,候秋再舉』備呈到臣。」
  2. ^ 明朝以官軍、土兵與狼兵並稱,顯見狼兵是正規官兵之外的部隊。如正德12年7月初5日,王陽明〈議夾剿兵糧疏〉:「其兩廣、南、贛,仍須各調官軍狼兵,把截夾攻,協濟大事。」〈咨報湖廣巡撫右副都御史秦夾攻事宜〉:「往年大征,不曾分別善惡,給與良民旗號,及撥兵護守,以致狼、土、官兵,貪功妄殺,玉石不分。」
  3. ^ 《明史》卷211〈沈希儀傳〉:「希儀嘗上書於朝,言狼兵亦瑤、僮耳。瑤、僮所在為賊,而狼兵死不敢為非,非狼兵順,而瑤、僮逆也。狼兵隸土官,瑤、僮隸流官。土官令嚴足以制狼兵,流官勢輕不能制瑤、僮。若割瑤、僮分隸之旁近土官,土官世世富貴,不敢有他望。以國家之力制土官,以土官之力制瑤、僮,皆為狼兵,兩廣世世無患矣。」
  4. ^ 正德12年9月15日,王陽明〈議夾剿方略疏〉:「但今廣東狼兵方自府江班師而歸,欲復調集,恐非旬月所能。

다음은 바이두 백과(http://baike.baidu.com/subview/780869/15199501.htm)의 낭병 항목을 봅시다.

2. 명대낭병고(明代狼兵考)
낭병 제도는 명대에 시작했고, 명대 군제를 조성하는 주요 일환이다. 낭병은 오로지 광서 출신의 전투인원을 가리키며, 이 루인 불강 군적, 한발 무용, 우 명대의 도적 토벌, 왜적 방어에 여러번 사용되었고, 전적도 평범하지 않았다. 다만 효과적인 통제 수단의 결핍으로 인해, 군기가 혼란했고, 민가를 태우고 백성을 살해하는 일도 많아서, 백성이 낭병을 도적보다 더 두려워했다는 설도 있으며, 광서 후병(广西猴兵), 원병(猿兵) 등으로도 불렸다. 잠시 사료를 살펴보아, 조략하게 고증한 것은 아래와 같다.    
狼兵制度肇始于明代,是明代军制的重要组成环节。狼兵,专指广西出身之战斗人员,此类人不隶军籍,彪悍武勇,于明代“剿贼”、“御倭”多有使用,且战绩不俗。但由于缺乏有效的管束手段,军纪混乱,烧杀害民之举亦所在多多,以至百姓有惧狼兵甚于贼之说,亦称广西猴兵、猿兵等。姑就过眼史料,粗略考证如下──

그 "아래"의 고증 중에서 "4. 낭병의 전적(戦績) 및 위해(為害)"를 보시면,
"만력야획편"이라는 책을 인용하였습니다.
 
<만력야획편萬曆野獲編 보유> 권4 <오랑캐 병사夷兵>: "다스리기 가장 어려운 토사병(土司兵), 그들이 중국을 어지럽히는 것이 호로(胡虏, 흉노족)보다 심하다. 가정(嘉靖) 연간에 왜(倭)를 경계하려고, 양마병(陽麻兵)과 와씨 낭병(瓦氏狼兵)을 거느렸는데, 동남 지방에 해를 끼치는 것이 가장 참혹하여, 결국쓰지 못했다. 얼마전에 조선을 구하는데, 또 파주(보저우, 播州) 양응룡의 죄를 사하려고, 병사 오천을 거느렸지만, 도중에 쓰지 않고 돌려보냈고, 이로써 원망하여 다시 배반하였다. 정덕(正德) 연간, 유적(流贼) 유륙, 유칠의 난에, 또 영순(융순, 永顺), 보정(바오징, 保靖)의 두 현(縣)을 동원해, 양 선위(宣慰)의 병사들이 협공하니, 한데 모여 겁탈하여, 사람들이 견뎌낼 수 없었다. 유적이 놀리길 우리 백성 말로는: 우리들(유적)이 오면, 얼레빗에 불과한데; 저 토사병은 참빗이로다. 그들이 긁어내는 것이 더 촘촘하다며 몰래 비난하였다."

《万历野获编补遗》卷4《夷兵》:“土司兵最不宜调,其扰中国甚于胡虏。嘉靖间倭警,调阳麻兵,调瓦氏狼兵,俱贻害东南最惨,而终不得其用。顷救朝鲜,又赦播州杨应龙之罪,调其兵五千,半途不用遣归,以此恨望再叛。正德间,流贼刘六、刘七之乱,亦调永顺、保靖两宣慰兵协剿,一路聚劫,人不能堪。流贼戏谓我民曰:吾辈来,不过为汝梳;彼土司兵乃为汝篦矣。盖诮其搜剔之愈密也。”

밑줄 친 부분들에 유의해서 읽어보시면 역사관심 님의 원 포스팅 중, 특히 성호 이익의 글과의 유사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초원(楚猿)이라고 불린 것도 이 낭병/원병이 아닐까 합니다. 한편, 임진/정유 왜란 때 낭병을 파견했지만 도중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과연 도중이라는건 어디까지 갔던걸 말하는 걸까요? 천조장사전별도에 낭병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서울(한양)까지는 왔지만 실제로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던게 아닐까... 하고 추측해봅니다.

그런고로 제 결론은, 천조장수전별도 그림 속 깃발의 글자는 낭병삼백, 혹은 원병/후병삼백이라고 생각된다는 겁니다..

낭병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은 아래의 블로그를,
http://blog.naver.com/shanghaicrab/20128064512
양응룡에 대해서는 이 링크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4371&cid=40942&categoryId=31787
만력야획편의 저자 심덕부에 대해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04050&cid=42981&categoryId=42981
만력야획편은 최근 임진왜란 관련 저술을 활발히 하고 계시는 김시덕 교수님께서도 인용하셨군요. 
http://academic.naver.com/view.nhn?doc_id=47046115&dir_id=0&page=0&query=%EB%A7%8C%EB%A0%A5%EC%95%BC%ED%9A%8D%ED%8E%B8&ndsCategoryId=10113&library=40

마지막으로, 천조장사전별도는 1992년 5월 19일자 경향신문 9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52900329109002&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2-05-29&officeId=00032&pageNo=9&printNo=14419&publishType=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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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역사관심 2014/12/06 03:10 # 답글

    아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건 충분한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다시 시간날때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낭병의 이명인 광서후병의 후나 원병의 원자로 보이기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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