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미야나가 타카시(宮永孝), 마카오의 성 파울로 교회와 일본인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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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노트

마카오의 성파울로 교회와 일본인

성미카엘 대천사를 그린 수수께끼의 화가

 

宮永 
미야나가 타카시

홍콩 섬의마카오페리 」(港澳輸船碼頭(カンアウルンツアンマウトウ)에서 하이드로포일(수중익선)을 타고,서쪽으로 가는 것 64 킬로미터, 그곳에 포르투갈의식민지로 약 사백수십년의 역사를 가진 마카오 Macau (중국어로는 아오먼澳門(1)이 있다. 고속선을 이용하면, 홍콩에서 마카오까지는 약 한 시간의 노정이다. 마카오는 중국령에서 돌출한 반도와 부근의 두 섬 (타이파辶水仔(タムチャイ)와 콜로안路環(ロウワン))으로 이루어져, 현재의 인구는 약 오십만으로 추정된다.

그 마카오의 대략 중앙부에 위치한언덕 위에, 오늘날 주요 관광지 하나가 된 유적(도면I)이 있다.

다싼바파이팡大三巴牌坊(Ruinas de S. Paulo

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의미는,“성 바오로 교회 터이다. 필자는,작년 이 땅에 잠시 체재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이 식민지에 한층 친밀감을 느끼게되었다. 가장 필자의 흥미를 끈 것은, 마카오와 일본인과의 연결고리다.

흔히 알려져있듯이,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극동무역과 크리스트교 전도의거점으로, 포르투갈 상선은, 해 마다 당지에서 일본에 내항하고,또 선교사들도 여기서 우리나라로 도항했다. 일본인 중에도 상선 등에 편승하거나,스스로 배를 조종해 건너오는 자도 적지 않게 있었다. 특히 케이쵸19(1614) 9, 토쿠가와 막부 일본에체류한 각파(프란시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의 선교사 (전도사수도사)나 키리시탄 신도를 해외에 추방하는 폭권에 쫓겨, 그들은 각각 마닐라나 마카오에 송치되었다.특히 마카오에 추방된 일본인의 정확한 수나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불명한 점을많이 남기고있다. 하지만, 케이쵸 19년의 대추방大追放에서칸에이 13(1636)년까지의 이십 몇 년만으로도, 같은 땅에 추방된 일본인의 수는 족히 수백 명을 넘길 것이다(2). 1618(겐나 4) 6월에는 21 , 이듬 해 1619(겐나 5) 1월에는 40명의 일본인이, 마카오에 체류하고 있다, 고 하는 보고가 예수회 본부로 되었다고 한다(3).

본고의 의도는,고국에서 쫓긴 일본인 키리시탄의 수를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파울로 교회의 역사를간략히 보고, 더욱이 그 건설에 관련되었다고 하는 일본인, 또 그 땅에잔류한 일본인 화가(키리시탄)이 그린 성 미카엘 대천사” The Archangel Michael의 유화에 대해 기술한는 데에 있다.

1952(쇼와27) 6, 홍콩대학의 건설학 교실의 교수진과 학생들은, 성 파울로 교회(삼파사三巴寺)의 유적-교회의 정면” fachada를 조사하기 위해 마카오를 방문해, 그 땅에 몇 주 동안 체재하였다. 그들은 대나무로 발판을 달고, 건축학 상의 과학적 조사를 면밀히 행해, 그 성과오문 성보록 고당 건축지 연구” (원문은 영문으로,그 표제는 An Architectual Survey of the Jesuit Seminary Churchof St. paul’s, Macao라고 한다. 백허고[M.Hugo-Brunt]의 이름으로 발표)를 공개했다. 동 논문은, 교회의 정면을 각층 별로 정밀 조사해, 도판과사진을 풍부히 첨가한 것으로, 극히 정밀하고 뛰어난 연구다.

동논문에 의하면, 마카오를 처음으로 붕문한 예수회사는,프란시스코 페레스, 마누에르 테세이라, 안드레핀토 신부들이었다. 그들은 1562년부터 이듬해1563 (영록 5~6)에 걸쳐,교회 건설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들이야말로 성파울로교회의 원형을 만든 사람들이다.초기의 교회당은, 성 안토니오 교회의 사제관이 있는 곳에, 나무와 석재를 사용해 만든 것으로, 형상은 큰 헛간 같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머지않아 소실失되었다.1580(텐쇼 8), 이번에는 현재의 성파울로 교회의 유적이 있는 지점에, 중국인 개종자를 위해 작은 가옥이 지어져, 그 후 더욱 그곳에 작은 예배당을 증축했다. 1594 (분로쿠 3), 일본에서 돌아온 순찰사 발리냐노에 의해, 예수회의제시설은 이분되어, 새로이 (콜레)(지오)도 만들어졌지만,이것도 이듬해 1595년의 화재에 의해 사라졌다. 그러나 같은 해 머지않아 재건되었다.

1601(케이쵸 6), 교회의 여러 시설은 또 다시 화재에 의해소실되었기에, 마카오의 시민이나 상인들은, 거금하여, 새로이 교회당을 세우기로 했다. 1603(케이쵸 8),성파울로 교회와 부속의 학원은, 면목을 일신하고, 위용을 나타냈지만, “정면은 아직 건설 중에 있어,그것이 완성된 것은 1640(칸에이 17)년의일이다. 당시 교회의 형상에 대해서는 정밀한 도면(4)이 남아있지 않아 불명하지만, 교회의 설계와 감독을 담당한 것은, 카를로 스피노라 신부인 듯 하다. 교회에는 부속의 학원(“신학교”), 대포대 (“몬테의 울타리”) 밑에 있어, 그 건물은2층 집으로, 탑 모양의 건물을 갖지않았다(5).

성파울로 교회의 건물 그 자체의 양식은, 포르투갈 풍이 아니라, 이탈리아 예수회 교회에 많이 보이는 양식을 답습한 듯 하다. 그것은 카를로 스피노라 신부의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동양에 로마의 예수회 풍의 교회를 재현하고자 한다는 목적이었다. 건물의 정면에 닿은 돌층계(130)를 예로 들어도,그것이 안젤로 풍이라고 한다. 오늘날, 유일한유물이 된 건물의 정면, 플라테레스크 양식(16세기 경, 스페인에서 유행한 기교적인건축양식)에 닮아있다(6), 는 것이다.재료는 화강암으로, 측벽(7)은 벽돌, 석회, 모래, 점토 등을 사용했고, “정면의 건설에 요구되는 비용은삼만 Tales(은화)였다. 흥미를일으키는 것은, 정면의 후배부, 즉 성당의 부분이다. 그 외향이나 내부에 대해서 기술한 자료는 적지만, 성 파울로 교회가 완성되려는 찰나에 마카오에체재한 영국인 여행자 피터 먼디, Peter Mundy(8)의 여행기(9)에 그것이 언급된 것이 있다. 먼디는 16364, 존 웨델 선장이 지휘한 선단에 합류해, 영국에서 출범해, 도중 인도의 고아에 들른 뒤, 1637(관영 14) 6월 쯤, 마카오 바다에 도착했다. 선단은 마카오 근처에서 반 년 간 머물렀지만, 먼디는 중매인(위탁판매인)으로서 마카오에서 수 주 간지냈다. 그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었기에 그 고장의 주민이나 명사들과 자유롭게 회화를 즐기고,한편 주민의 일상생활, 풍속습관 등에도 눈길을 주고, 그 관찰을 때로는 삽화를 더해 기록했다. 그 기술은, 인간미와 유머로 가득하고, 꽤나 재미있다.

피터먼디가, 존 마운트니(생몰년 미상), 토마스 로빈슨(생몰년 미상)들과, 국왕폐하의서한과 마카오 총독 오민고스 다 카마라 앞으로의 그것을 지녀, 거룻배로 마카오에 상륙한 것은1637 6 28(관영 14/5/6)의 일이다. 일행은 총독관저에 머문뒤, 성파울로교회의 학원에 가, 그곳에서 차과자나 과일(리치) “콜레지오 (성 폴이라고 불린다.)에 인접한 교회의 지붕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치형의 것으로,멋진 솜씨였다. 그것은 중국인이 만든 것으로, 나무를 조각해, 신기하게도 금을 입혀, 하늘색이나 붉은색 따위의 멋진 도료가 칠해져있다(10), 기록하고있다.교회의 내부는 바실리카 풍으로 만들어져, 마루에는 돌을  깔아, 신랑身廊 외진外陣(けじん)후진後陣측랑側廊제단합창대 석소성당성구실聖具室 따위를 갖춰,또 일본에서 옮겨온 목재를 써 부조로 세공을 해, 소용돌이 모양당초 풍의 장식 곡선둥근 꽃 장식 따위를,금색이나 청색의 도료로 칠했다(11).

먼디는 성 파울로교회와 부속 건물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공연되는 연극 따위도 보았다.1637 11 25 (관영 14/10/9), 선단의 간부와 먼디 들은, “사제(파드레)의 초대에 의해 교회로 향하자, 중국 옷을 입은 마을의 아이들이 공연하는 연극(사비에르의 생애를극으로 만든 것)를 보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훌륭한 의상과 보석 따위를몸에 걸치고 출연했지만, 부모도 출석하여, 시간 맞춰,교회 안에서 상연되었다, 고 기록되어있다(12).


한편, 마카오로 추방된 일본인은, 당지 도착 후, 어떤 생활을보냈던걸까. 당시,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도판II), 일본인이 용감무쌍한 것을 들어알고있던 듯이,어떤 자는 무역선에 타 해적의 방어를 담당하거나, 교회나 사저의 경비가 되어,또 교회, 포대, 성벽 등의 건설에 종사했다고한다(13). 피터 먼디는, 마카오 체재 중에 일본인(Japonian)(사무라이)를 보고, 그 모습을 스케치(도판III)했을 뿐만 아니라,일본인의 특징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마을(마카오-인용자)에서 몇 명의 일본인을 발견했다.일본인의 대부분은 키리시탄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정수리에서 앞머리까지 머리의 반을 삭발했다.머리카락의 나머지 부분은, 작은 끈으로 묶여있다. (중략) 일본인은 부드럽거나, 혹은 단단한 종이에 코를푼다. 그들은 작게 만든 종이를 몸에 지니고있다. 코를 푸는 종이는,더러운 것이라하여 버린다. 또 아마포의 손수건을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얼굴이나 손을 닦는다(14).

먼디에 의하면,사무라이는 샌달을 신고, 민소매 외투(하오리羽織인듯?)를 입고, 허리에 칼을 차고있다고 한다. 그는 귀에 들리는일본어를 몇 개 적어두었다. 예를 들어,

Sagashoo gooseeka = how Doe you?(〃いかがでござる라는 뜻인듯

Yungosere = well orgoodようござる)

Varoogoosere = ill or bad(わるうござる)

Goodaree = Com[e](ござれ)

Mundalee = goe行く라는 뜻인듯

따위가 그것이다.(15)

마카오로추방된 자, 또 키리시탄 탄압을 피해 이곳에 온 일본인 중에는화가, 조각가, 직인들도 포함되어있던 듯 하고, 이 중에는 성 파울로 교회의 건설에 종사한 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일본인이 동 교회의 건설에 종사했다는 의거할 만한 사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듯하다.(16) 일본인이 실제 건설에 관련된 것은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운 것은,먼저 서술한 白許高 씨의 논문이 최초이다. 이하,白許高 씨가 몇 개의구체적인 예를 들은 설에 귀를 기울여 보자.

먼저건물의 정면에 있는층계참이 달린 화강암의 돌층계는, 그 공사의 감독은, 예수회원이 했다고하더라도, 전체의 설계는 일본인 기술자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한다. 교회 인구의 층계참의 포석의 크기는, 조금 가지런하지 않는 것에서, 감독의 눈이 충분히 골고루 미쳐있지 않고, 돌의 크기나 양식에도 동양풍인 것이 느껴진다는 것이다.白許高 씨는 명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돌층계의 공사 감독시행은 일본인이 한 것인가. 다음으로 건물의 정면으로 이야기를 옮기면, 그것은 오층()으로 되어있다. 일본풍인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제 이층()와 제 삼층()에 보이는 장식과 문자의 조각이다. 제 이층의 정면에향해 좌측의 맞배지붕 아래의 벽감에, 그리스도의 조상이 있고, 그 조상의두부 뒤 부분에 붓꽃과 국화의 띠 모양 장식이 달려있다. (도판IV). 붓꽃이나 국화라고 하면, 그것은 순결을 상징하는 것인데, 양쪽 다 키리시탄 신도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제 삼층()의 정면에 향해 좌측의 코린트 식 지주 사이에, 일곱개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괴물의 벽판이 있다. 기도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그 괴물의 머리를 밟고 있는데,그 마리아의 몸의 곁에 중국어로 성모답룡두聖母踏龍頭(シュンモウタロント)라고 새겨진 글자가 보인다(도판V). 이 명각의 서투른글자체에 주목한 白許高 씨는, 여러 사람에 의견을 불러들인 결과, 중국인에의한 작업이 아니다, 라는 결론에 달했다고 한다. 도판(사진)을 보아도 명확하듯이 글자체는 조금 가지런하지 않은 데에, 강력함이 부족하다. 중국인이라면 결코 묘석이나 기념비에도, 이렇게 서투른 작업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반드시 일본인의 작업이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17)

예수회에속한 일본인이 지녔다고 생각되는 것은 교회의 공사만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실은 성 파울로 교회 내부(성당)의 장식의 작업에도 종사한듯하여, 그들은 특히 성화의 제작에 가담하였다. 이 일을 필자에게 가려쳐준것은, 마카오 체재중에 면식을 얻은 포르투갈인 마누엘 테셰이라 신부(중국이름 문덕천文徳泉, 1912~)이다(도판VI). 이 사제는 저명한 동양학자로,저작(18)도 많은데, 하루는 성요셉신학교” (Seminario S. Jose = 중국 이름 성약슬수원)로 이 신부를 방문했을 때, 보물실이라고할 법한 회화실로 안내받아, 그곳에서 멋진 성화를 여러 점 볼 수 있었다. 먼저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에 쳐해진 일본의 순교자들” (1640년에 마테우스 판이 제작)을그린 유화와 성 미카엘 대천사의 그림이다. 더욱이 후자는, 설명을 받기 까지는, 대체 누가,어느 시절, 무엇을 위해 그런 것인가, 전혀알지 못했다. “성 미카엘 대천사, 성 파울로 교회의 천정 그림의 부분(19)를 이루는, 판 위에 그린 유채화다. 크기는 202cmX133.제작 년대는 1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도판VII).필자는, 헤이세이 5(1993)4 8일부터 5 23일 사이, 이케부쿠로의 세존미술관에서 개최된 포르투갈과 남만 미술전의 회장에서,이 유화와 의도치 않게 재회하여, 감개무량하였다. 그리하여 그 때, 가까이서 이 성화를 다시 지긋이 바라보았다.

화상전체는, 인물의 얼굴이나 손의 부분을 지우면,흑색 또은 갈색이 기본색이다. 대천사의 인물상은 병사의 옷차림을 하고,성역의 경비 역을 연출하고 있다. 대천사의 머리 뒤에는, 광배 같은 것이 보여, 몸 뒤에는 커다란 날개와, 왼손에는자물쇠로 이어진 성체현시대(색은 금색)를 들고, 오른손에는 불꽃 처럼 보이는 검을 잡고있다. 인물전체의 옷차림은 환상적이고, 포스트 르네상스 양식(20)인 것이다. 또한, 그림의 구석구석까지 눈으로 훑으면, 정면에서 바라보아오른 편의 화판 구석에 세로로 간격을 두고 5개소, 왼 편에 세로로1개소, 인물의 발치에 21개소,못 구멍이 남아있다. 이 구멍들은, 그림을성당의 천정에 못박았을 때의 흔적일 것이다.

한편,이 성화를 그린 것은 누구였을까. 티셰이라 신부의 교시에 따르면, 제작자는 일본에서 추방당해 온 다음 4명의 예수회원 중 1명이라고 한다.

(1) 이루만 만시오 타이치코(Mancio Taichiko), 1615 1 20 (케이쵸19/12/21) 마카오에서 사망, 성파울로교회내의 성미카엘의 제단가까이에 매장되었다. 또 같은 사람에 대한 기술에, “유인 중, 여러 명은곧이어 죽었따. 1 20(양력),예수회의 수사로, 일본인의 만시오 타이치코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우수한 화가로, 조국의 천주당을 대방 장식했다.” 요시다 오고로우 역 일본 키리시탄 종문사 ()”이와나미 서점)이라고 한다. 타이치코는 히고의우토에서 태어나, 향년 41세였다.

(2)페테르 치콴 (Peter Chikuam, 포르투갈 어로는 Pedro Joãn(ジョアウン)).이 사람은 1622 1128 (겐나 8/10/26) 마카오에서 사망.

(3) 토데우(Todeu) 1627 1116 (관영4/10/9) 마카오에서 사망,성파울로교회 내의 성미카엘의 제단의 가까이서매장되었다.

(4) 야콥 니바(Jacob Niva[니와?], 또는 야코보니와Jacobo Niua, 중국 이름 Ni Yi Cheng 尼伊陳?), 1579(텐쇼 7)년 중국인의 아버지와 일본 여성과의사이에서 태어나, 마카오에 온 것은 1601(케이쵸6)년의 일이다. 1638 1028 (관영 15/9/21) 그곳에서 사망.향년 59.

이들4명의 일본인은, 모두 예수회의 사제 겸 화가였던 죠반니 니콜로(GiovanniNicolo, 또는 Giovanni Cola라고 한다)의 제자였다. 니콜로는, 1560(에이로쿠3)년 나폴리의 노라에서 태어나, 훗날 예수회원이 되어, 1581(텐쇼9)년 인도로 출발, 이듬해 1582 8 7(텐쇼10/7/9)마테오 리치와 함께 마카오에 닿고(21),  1583 725 (텐쇼 11/6/7) 일본에 도착하여,바로 시모(킨키近畿 지방에 대해, 츄고쿠,시코쿠四,큐슈九州 서쪽의뜻) 및 고키나이五畿(山城大和和泉津 따위 기내의5개국)으로 회화의 기술(22)을 수련하고, 뒷날 신학에 정진했다고 한다. 1608(케이쵸 13)년과 1614(케이쵸 19)년에 마카오와 나가사키에 화파를 발흥시켰다(23). 1614(케이쵸19) 11월에 동료들과 함게 마카오로 추방당해, 1626 3 16 (캉에이 3/2/18) 그 땅에서 사망했다(24). 일본체재 중의 1586 12(텐쇼 14 11), 우스키(오이타 현 동부)의 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수련원(교회)를 위해, 성화피승천의 성모따위를 판 위에 유화 물감로 그렸다(25).

어찌되었든, 이들 4명의예수회원인 화가들은, 1614년 화승 니콜로와 함께 마카오로 추방된 후, 유럽의 종교화의 모사나 제작에 종사하는 한편, 성파울로교회 내의 장식의 작업에도 종사했던 것이다.

18세기가 되자, 교회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극동전역을 위한 선교사 양성 기관으로써의 기능의 정지와 폐쇄와 건물의 소실이다. 무엇보다도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 인접한 세미나리오(학원), “번창한 소굴 변해, 수백년에 걸쳐 축적한 문서류가, 그것들에게 먹히고, 더욱이 설상가상으로1835 1 26 (텐보5/12/28) 저녁 6 (27), 학원과 교회가 함께 화재에 의해 사라진 것이다. 18세기 말이 되자 학원은 병영으로 이용되고있었지만, 화재가 일어난 당일, 어떤 까닭인지, 병사들은 대량의 땔감을 학원으이 부엌 가까이에 쌓아올려놓아, 그곳에서 불이 났다. 대체 어째서 그런 곳에서 불이 나야만 했는지 판연하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이 발화점이 되어, 학원의 건물 전체를 화염으로 둘러싼 같다. 벤트 프랑카의마카오 자료” (1888) 白許高 씨와 티셰이라 신부의 논문(28) 발화 당시의 모습을 전하는해사식민국 기록이 인용되어있다.

화염이 일어난 것은, 정확히 저녁 6시 정각이었다.하지만, 불길은 빠르고, 815분에는, 루이 14세의 관대함에 많은 것을빚지고 있는 장엄한 학원은, 재로 돌아갔다.” 이 때의 화염은,성파울로교회를 집어삼켜, 이 교회는, 두꺼운측벽과 전면과 화강암의 돌층계만을 남긴 무참한 모습이 된 것은 말할것도 없다. 그리고 이 화재에 의해, 성인이나 순교자의 유물(29)을 제외하면, 극동 선교사들의 귀중한 보고서 따위는, 모두 재가 되어버렸다. 이 때의 화재로부터 약 2년 후의1837 5 (텐보8/4),성파울로교회는 묘지로 이용하기로 하고, 불탄 교회의 신랑(身廊)에 작은 예배당이 만들어져, 사자가 매장되기 전에 잠시 그곳에 안치되었다. 또 히말라야 삼나무 따위도 심어졌다.그러나, 묘지로 이용된 것은, 185411월 상순(가영 7/9 중순)까지의 약 20년 간이다. 머지않아 유골은 발굴해서,새로운 묘지(30)에 이장되었다. 묘비는 마닐라로 옮겨져, 작게 부숴 포석이나 배의 발라스트 따위에 쓰이지 않았을까(31),하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면,“성미카엘대천사의 성화를 그린 것은, 화승죠반니 니콜로의 제자 4명 중 1명인 것은, 먼저 기술한 대로이다. 하지만, 그것을 특정하는 것은,사료 부족으로 용이하지 않고, 사실 불가능하다. 4명 모두 일본에 있던 동안, 예수회 관계의 학원에서 유화, 아교 그림, 동판화의 기법을 각각 배웠다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야콥 니와 (丹羽?)는 가장 회화를 잘하는 훌륭한 화가였다. 그는 케이쵸 6 (1601)년 말이나,이듬해의 초두에 발리냐니의 명에 의해 마카오로 건너갔지만, 그것은 성 바오로 교회의장식을 돕기 위해서였다(32). “오문기략” (하권,126 페이지)凡廟所奉天主有誕生図被難図飛昇図라는 조항이 있어,마카오의 교회에 그리스도 탄생의 그림, 수난의 그림, 피승천의 그림 따위가 존재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마카오의 교회는, 모두 화재에 의해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지만, 야콥 니와가 마카오에서 그린 성화에 대해서,“1601년도 지나 연보” (원본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있다.)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소실된 2 장의 그림 대신, 신규로 별도의2장을 만들어, 1장은 성모피승천의 그림으로 교회의 봉헌

야코브니바는 이것들의 제작 작업을 마친 후, 케이쵸 7(1602)년 선교사마노엘 데아즈와 함께 북경에 머무르며, 그곳에서 전도용의 성화제단화 따위를 그리고,다시 마카오에 돌아와 제작에 종사했다.

1603 (케이쵸 8, 만력 31, 2)년 경, 예수회원들은 関聞(クアンチャー)에 가까운 작은 섬 청주青洲(チュンチュ) (ilha Verde “녹색의 섬의 뜻, 현재는 육지와 이어져있다.),소박한 오두막 몇 채와 예배당을 세웠지만, 중국인은 이것을 성곽으로 간주했다.이 때 마카오에 체재해있던 사라센 인의 관리에게 선동당한진 폭도들은, 이 예배당을덮쳐, 그곳에서 나온 일본인 하인이나 포르투갈인과 전투를 벌여, 성당은소실됐다(34). 하지만, 훗날 재건되고,뒤이어 파괴되었다. 이 천주당 내를 꾸민 성화의 제작도 니콜로의 제자들(일본인)의 작업이라고 상상되고 있다.

한편,“성미카엘 대천사의 유화와 유사한 그림(아교화), 종전까지 나가사키 우라카미 천주당에 있었지만, 아마원폭으로 소실되었을 것이다(도판VIII). 그것은 성미카엘 화상이라고 칭해진 것으로, 대천사미카엘이 오른손에장창을, 왼손에는 선악의 저울을 들고, 악귀를 짓밟고있는 그림이다.이 일본화는, 혹독한 박해 속에서 키리시탄이 몰래 유통시켜 소장하고있었던(35)것 같다. 西村貞일본초기 양화의 연구에 의하면,“토리노코(안피와 닥나무를 섞어 일본 종이 - 인용자), 바탕칠을 입히고, 건더기 있는 그림물감을 가지고 그려져있다. 세부는 면상필(역주:붓끝이 가늘고 중간부분이 빳빳한 화필.)을 사용해극히 면밀한 작업의 그림 도구를 위해, 안료의 일부분에는 암화구(천연의 광물을 잘게 갈아, 그림 도구로 한 것 - 인용자)를 사용라고 되어 있다. “성 요셉 신학교에 남은 성 미카엘 대천사의 유채화는,도대체 누가 그런 것일까. 필자는 안타깝게도 그 수수께끼의 제작자의 이름을 밝히지못하고, 마카오에 키리시탄 화가가 그린 성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의견 만을 남긴다. 앞으로의 조사가 기다려진다.


주석

 (1) 마카오(Macau)의 명칭에 대해서는, 중국의 책(“오문기략”“명사”)에서는 오문澳門또는 호경오濠鏡澳(ハオチンアオ)라고 칭해, 우리 에도시대에 있어서는, 마카오를 아마항국阿媽港이라던가 아마카와天川라고 불렀다(“통항일람”). 포르투갈의 마카오 식민지의 유래에 대해서 약간 다루자면,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거류지를 보유하게 된 것은, 1557(가정 36)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광동斯江 연안에 해적이 도략하여, 포르투갈 인이중국 관헌에 협력하여, 그 토벌에 공이 있었기에, 마카오에 거주를 허락하게된 것이다. 그 후, 무역에 대한 일종의 과세를 지불하게 되고,1573 (만력 완년)에 마카오와 향산현을잇는 경계(「蓮花莖」)関閲」(所)가 세워져, 포르투갈 인의자치를 묵인 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카오가 포르투갈의 조차지(영토)가 된 것은, 1887 (광서 13)의 포청리스본 조약에 의한 것이다(植田捷雄(としお)『支那ける租界究』松堂書店、쇼와16 9). 이 포르투갈의 식민지도, 1999 12월 중국정부에게반환된다.

2)예를 들어, 케이쵸191614년 남만인의 출가를 각각추방하기로 결정한, 포르투갈 선의 내항을 금지한 일(「통항일람 192)、더욱이캉에이 131636년 포르투갈계 남여아 모두 약 300(『蘭館日誌』JapanDaghregister,1636102022부에 의하면, 287.『長崎夜話草 나가사키야화초」의 기사「유럽인人의 자손을 유배 보낸 일之子孫遠流之事」에도 같은 숫자가げられている이 마카오로 추방되었다.

(3)이와오 세이이치마카오 제수스회 콜레지오의일본인에 대하여(역사지리 71권 제 5호 수록.

(4)성파울로교회와 이접한 건물학원신학교」)의 모습을 그린 판화로 비교적 좋은 것으로,Begin ende Voortgangh van de VereenighdeNederlantsche geoctroyeerde Oost-Indische Compagnie, 2vols, Amsterdam, 1645 François Valentijn Oud en NieuwOst-Indien, 1726,Vol. IV. 수록의 동판화, 오문기략』(상권庚辰( クアンシ カンチエン)1880중간重刊)의 권두에 찍혀있는 목판화 따위가 있다.

(5)An Architechtural Survey ofthe Jesuit Seminary Church of St. Paul’s, Macao, M.Hugo-Brunt (Journal ofOriental Studies Printed from vol.I No.2. July 1954,University of Hong Kong 수록)、332 페이지. 또한, 여행가 피터 먼디에 의하면, 마카오의 교회에 첨두나 높은 탑이 달려있지 않았던 것은,태풍이나 강풍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6)注(5)의 논문, 336 페이지를 참조.

(7)불타고 남은 성파울로교회의 측면부의 ,1838(天保9년까지 그대로 되어있었지만, 그 해 파괴되었다(白許高 논문, 343 페이지). 또한The Treaty Ports of China and Japan, Compiled andedited by N.B.Dennys, Trubner and Co., London, A.Shortrede and Co., Hong Kong,1867에 의하면, 이 벽은 두껍고, 견고히 만들어져있어, 무너졌을 때25피트 7, 8 미터의 높이까지 되었다고 한다. 때로 이곳에 신자의유체를 묻었다.

(8)피터 먼디는,  1596 분로쿠5케이쵸 원년영국 콘월의 Penryn에서 태어났다. 몰년에 대해서는 미상不詳。아버지와 숙부가 pilchardニシン科)를 팔고 있었다고 하는 걸 보아, 어부의 아들일까.

(9)The Travels of Peter Mundy (1608- 1667), 5 vols. TheHakluyt Society, London, 1907- 1936을 말한다.이 대부분의 여행기는, 1967년에 Kraus Reprint Limited (Neudeln/Liechtenstein)에서 리프린트 판이 나와, C.R.Boxer가 엮은,Seventeenth Century Macau in ContemporaryDocuments and Illustrations, Heineman (Asia) Hong Kong, Kuala Lumpur, Singapore1984 중에,마카오 기행의 부분 만이 채록되어있다.

10Kraus Reprint Limted 162163 페이지.또한,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성파울로교회의 지난 날의 장려한 모습을 방불케 하는 것으로,『오문기략』(하권「오번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聖)(パウロ)三巴(寺院)()在澳東北、依山為之、高数尋、屋側啓門、制狭長、石作雕、金碧照耀、上如覆綺疏魂麗、所奉日天母、名利亜、貌如少女、抱一嬰兒、曰天主耶蘇、衣非縫製、自頂被體、皆釆飾平画、障以琉璃、望之如塑、貌三十許人、左手執渾天儀、右手指若論説状、髪眉堅者如怒、揚者如喜、耳重輪、鼻降準、目若口若、上有、蔵諸楽器、有〔定時台〕、巨鐘覆其下、立飛仙台隅、為撃撞形、以機之、按時発響(213 페이지, 원문에는 구독점은 달려있지 않다.

또이 교회의학원에는時計(ヘロージオ)」も備えられ、時を伝えていたが、それはルイ十四世からの贈物であった(Bento da França Subsidiospara a Historia de Macau, Imprensa Nacional, Lisboa, 1888の一七二頁及びAndrewLjungstedt Contribution to an Historical Sketch of thePortuguese Settlements in China, principally of Macao, of the Portuguese Envoys& Ambassadors to China, of the Roman Catholic Mission in China of the PapalLegates to China, Macao China, 1832の五五頁を参照)。

11)白許高 논문, 332333 페이지를 참조.

12)注(10의판본, 274275 페이지.

13)矢野仁一「万時代マカオの日本人逐に就いて」(「支那(近代)国関究」수록、弘文堂書房、쇼와 3 9, 426427 페이지.

14)注(10의 판본, 294295페이지.

15위와 같다.

16)松田毅一「역사의 박물관 마카오(황금의 고아 성쇠기수록, 中央公論社、쇼와 52 9),128 페이지.

17)白許高 논문, 338 페이지.

18Exposicao Bibliografica, P.Manuel Teixeira,Direccao dos Servicos de Educaçaode Macau, Biblioteca do Complexo Escolar de Macau, Macau, Novembro de 1986(「著作展、文泉 신부、澳門育司、漢門中学図哲館、澳門198611에 의하면,이 신부의 저작수는 어림잡아 123권 있다.

19카탈로그포르투갈과 남만문화전めざせ동방의 나라들』(일본방송협회헤이세이 5년)、176 페이지에 있는 그림의 해설을 참조.

20위와 같다.

21티셰이라 신부의 가르침에 따른다.

22川崎桃太(松田毅一)訳『フロィス日本史8』(中央公論社、쇼와 57 1)、198 페이지「注」를 참조.

23)注(21와같다.

24)注(22와같다.

25)注(22185 페이지.

26Jose de Aquino Guimaraes e Freitas: Memoria sobre Macao, naReal Imprensa da Universidade, Coimbra, 182812 페이지에,지금, 훌륭한 쥐의 주거로써역할을 하고있다고 한다.

27Fr.Manuel Teixeira: The Fourth Centenary of The Jesuits at Macao,Macau 1964, 25 페이지.

28위와 같다.

29)교회 안에는, 몰래 일본에서 옮겨들인 키리시탄 순교자나 코친시나(베트남 최남부지역)에서의 순교자 약 70명의 유골, 프란시스 자비에르의팔(상박골)의 일부 따위가 보관되어있었다C.A.Montalto de Jesus: Historic Macao,Salesian Printing Press and Tipografia mercantile 1926, 61 페이지).덧붙여서 이 순교자의 유골들은 현재,마카오의 콜로아네(Coloane)섬의 「성 프란시스코사베리오 교회」(The Chapel of St.Xavier에 소장되어있다. (스테파노小田善三 편집『마카오에 잠든 키리시탄 순교자」聖パウロ修道八王寺修院刊、쇼와 61 3월)및Hong Kong Standard Newspaper, Macao Travel Talk [8, 9]을참조.

301630년대, 중국인의 묘지는, 마카오 교외 ½마일 내륙부 근처에 있었다,고 하는 기술이, P. 먼디의 마카오 기행에 보인다. 또한  포르투갈인(로마 가톨릭 교도의 묘지는, 성 미겔의 묘지」(Cimeteriode S. Miguel이라 불려,묘지 거리에 있다. 18525 포르투갈인이 기부를 모아 구했기에, 18547년 매장이 개시되어1865(慶 원)5월의 시점으로 4309 체가 묻혔다. 아마성파울로교회의 유골은이 묘지로 옮겨진 것인가. The Treaty Ports of China and Japan, compiled andedited by N. B. Dennys, Trubner and co., London, A. Shortrede and Co., Hong Kong, 1867, 216페이지를 참조.

31C.R.Boxer: Japanese Christians buried in the Jesuit CollegeChruch of Sao Paulo at Macau (Monumenta Nipponica, vol.I, 1938, SophiaUniversity, Tokyo), 266페이지를 참조. 또한 동 논문에1648(正保5、慶安元)년부터1726(享保11년의 사이에마카오의 성파울로교회 내에묻힌 키리시탄남녀25명의 씨명과 메장지점을 밝히는 사료가 인용되어있다. 그것은 리스본의植民地古文書館(アルキーヴォ・コロニーアル)Arquivo Colonial에 있는 것으로,이 교회에 매장된 속중인(평신도)사자死者」(Dos defuntos Seculares que estao enterados nestaIgreja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32니시무라西村貞『일본 초기 양화의 연구』(全書房、쇼와 21 1월),104105페이지.

33위와 같다.

34Andrew Ljungstedt: Contribution to an Historical Sketch of thePortuguese Settlement in China, Macao China, 1832, 55페이지.
(35)古賀十二
나가사키 회화 전사全史』(北光書房、쇼와 19 8월),61페이지.

추기본고를 초안할 즈음에,마누엘 티셰이라 신부의 교시를 받아, 문헌사료 면에서는소지하고 있는 것을 이용한 것 외에、와세다 대학 중앙도서관,  죠치 대학 도서관키리시탄 문고」、재단법인 동양문고 등에게 신세를 졌습니다.기록하여 사의를 표합니다.

 

 

전호에실은 출처의 정정- 파크스는 낮은 지위에 놓였던 것에 격노하여 (109페이지) 파크스는 무시당한 것에 격노하여…….


A Japanese Exile in Macau:

The Paingting of St. Michael in Seminario S. Jose.

 

      Nawadays Macau(澳門), a Portuguese colony, attracts manyvisitors from all over the world. This city was once called “the City of Death”in the last century, but it is going to be recreated a new, modern city,sprouting dozens of new buildings here and there. I visited Macau once andenjoyed staying there. What attracted my attention and impressed me deeply wasthe old remains of the façade of St. Paul’s church located almost in the middleof the city, where quite a few Japanese Christians were buried; reportedly theyhelped to build it many centuries ago. The façade maintains the solemnity andbeauty as well. During my brief stay in Macau, I was happy to make theacquaintance of Fr. Manuel Teixeira, an eminent orientalist and priest, who notonly showed me round the historic spots but enlightened me greatly as to thehistory of the city. I well remember I was lost in admiration of two oil-paingtings, one of whichshows the crucification of the Japanese Christians at Nagasaki and other of St.Michael, the Archangel in SemnarioS.Jose(성약슬수원). As regards the latter, the name of thepainter remains unknown. However, according to Fr. M. Texeira, one of the fourJapanese Christians, all of whom were the disciples of Giovanni Nicolo(1560~1626), a famous Italian priest and master in the art of sacred paingtings, painted it.

      Supposedly the painters are: (1) MancioTaichiku (?~1615), born in Udo(宇土), in the provinces ofHigo(肥後国), died in Macau. (2) Peter Chikuam aliasPedro Joan(?~1622), died in Macau. (3) Todeu (?~1638), died in Macau. (4) Yacob Niva(丹羽?) alias YacoboNiva(?~1638), died in Macau. It is said Yacob Niva toweredabove others as a painter. This article deals with the Japanese Christians in Macau andwith the painting of the Archangel. The identity of the artist, however, stillremains unknown. In conclusion, I’d like to express my deep indebtness toFr.M.Texiera and some of the university libraries in Tokyo for providingassistance during my research.

30th November 1995

Takashi Miyan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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