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박 포장(朴砲匠)과 거대 뱀, 그리고 용골? 용은 환골하고 뱀은 탈태한다

역사관심 님의 16-7세기 거대뱀과 야광주 기담들에 덧붙여 써나갑니다.

1973년에 초판이 나온 이조한문단편집(李朝漢文短篇集)은 꽤 오래된 책인데도 불구하고 다양한 고서에서 수집한 여러 짤막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았습니다. 심지어 주제/테마 별로 구성되어있어서 보기 편합니다. 총 3권(상*중*하)로 되어있는데 그 중 상권은 1부:富와 2부: 性과 情으로 되어있습니다. 상권 1부는 말 그대로 큰 재산을 모은 이야기들의 총집합입니다.

이중 박포장 (원제: 落小島 砲匠獲貨, 작은 섬에 남겨진 포장이 큰 재화를 얻다.) 이야기가 천예록의 "표류한 섬의 거대뱀에게서 두 섬의 구슬을 줍다."와 유사한 줄거리(혹은 원작?)에 해당하는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이조한문단편집의 해설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동야휘집"(東野彙輯) 권 7 (한국문헌설화전집 4권, 426pg.)에서 뽑은 것입니다. 청구야담 권 5 (서울대 고도서본)에 '隨使行 薄相得貨'(규장각자료총서 문학편, 청구야담 III*IV, 528 pg.)도 이것과 내용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또 "삼국유사" 권 2의 거타지조(居陀知條)와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면서 거타지 설화가 이런 "외딴섬에 남겨져 괴물을 퇴치하는 설화"의 원형일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는 왕건의 할아버지 직제건의 설화가 먼저 떠오르네요.  

일단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박포장>

박화포장(朴火砲匠)은 훈련도감의 군졸로 위인은 성실하였지만 얼굴이 매우 못생겨서 궁상이라고 조롱을 받았다.

그는 술을 퍽 즐겼으나 가난하여 마음대로 취할 도리가 없었다. 언제나 군문(軍門)에서 요미(料米)[1]를 타면 곧장 술집으로 달려가 술 한 잔을 받아가지고 혼자 골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꽉 잠그고 몇 날 며칠을 새우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가 수상하게 생각하여 하루는 문구멍으로 들여다보니, 처음엔 두 손을 모으고 엄숙히 앉아 술을 앞에 놓고 한참이나 음미하며 차마 들고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껄껄 웃고는 풀쩍풀쩍 뒤어가서 두 손으로 술대접을 받치고 쭉 들이키는 것이었다. 안주도 먹지 않고 흥치며 일어나서 무릎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다가 금방 돌아와서 몸을 구부리고 동이에다 병에 물을 기울여 쏟듯 가는 물결을 일으키며 마신 술을 토해내는데 먼저만큼 동이에 차서 술이 조금도 축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윽고 다시 아까처럼 마시고 토하기를 수십 번이나 반복하니 해가 저물고 밤이 이미 새벽이었다.

이튿날 아내가 곡절을 물었더니,

"내가 주량이 워낙 커서 졸지에 배를 채우기 어렵다네. 한 번 꿀꺽 마시고 나면 갈증을 참을 수 없어, 부득이 그렇게 마셨다가 토해냈다가 하여 아쉬운 대로 목을 축이고 흥을 돋우는 것이지."
[1] 급료로 받는 쌀

그때 해로(海路)로 중국 사신이 떠나는데, 박씨는 포장(砲匠)으로 끼이게 되었다.
대개 옛날엔 중국을 해로로 내왕했는데, 상사(上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이 각기 배를 따로 타고 표자 문서(表咨 文書)[2]도 각기 일부씩 소지하여 불의의 사고에 대비했다. 가령 고려 때 상사 홍사범이 익사하고 서장관 정몽주가 홀로 살아온 것[3]이 그것이다.
[2]
 외교문서
[3] 1372년 사행선이 돌아오는 길에 허산(許山) 앞바다에서 조난당한 일이다.

사행선이 장연(長淵)*풍주(豊州)[4] 등지에서 출발하여 적해(赤海)와 백해(白海)를 건너는데, 그 사이 수천리에 허다한 도서를 거치고 바람과 조수를 보아 항로를 택하기 때문에, 항해 중의 필요한 물건과 중국 가서 무역해올 밑천에 기예(技藝) 공장(工匠) 등 세 사람에 이르기까지 두루 구비하여 선적하게 된다.
사행선이 떠나매 지방관이 풍악을 크게 잡혀 전송하고 친족들이 뱃전을 잡고 울음으로 보내는 것이다. 지금 기악(技樂)에 타루악(拖樓樂)*선리곡(船離曲)[5]이 있으니, 그때 전해오는 곡이다.
[4] 황해도 송화군에 있는 지명.
[5] 배따라기

박포장은 상사의 배에 오르게 되었다.
동승한 수행원들은 각기 가산을 기울여 중국 무역을 해올 셈으로 모두 꾸러미가 풍성했으나, 박포장 만은 빈천한 사람인지라 홀로 냉냉하게 빈 몸 뿐이어서 동행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배가 넓은 바다로 나가자 파도가 갑자기 크게 일어 바야흐로 위험이 눈 앞에 있었다.

도사공이 말하기를,

"일행 중에 불길한 사람이 있는 때문이오. 이런 위기에 당해서는 상하를 물론하고 각기 입은 옷 한가지 씩을 벗어내야 합죠."

모두들 그 말을 좇았다. 사공이 그 옷을 차례로 물 속에 던지니, 박 포장의 옷에 이르러 유독 물에 잠기었다. 사공이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탄 사람 전부 수액을 당할 수 있소? 원컨대 속히 물 속에 집어넣어서 온 배의 생명들을 구하십시오."

한다.
상사는 박포장이 죄없이 죽음에 나아가는 것이 가련하여 한참 동안 묵묵히 생각하다가

"이곳 가까이에 섬이 있느냐?"

사공이 대답하기를,

"조그만 섬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읍지요."

상사가 뱃머리를 돌리라 명하여 조그만 섬에 배를 대었다.
박포장을 섬에 내려놓으려는데, 그도 차마 못할 노릇이었다.

"어찌 사람을 죽을 땅에다 내버릴 수 있겠느냐? 풍세가 잠잠해지니 굳이 안 그래도 되겠다."

하고 닻을 들라고 명했다. 그런데 배가 빙빙 맴돌면서 나아가지 못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지금 이 배 안에 틀림없이 수액을 당할 사람이 있소. 시험해 봅시다."

하고 한 사람 씩 하선을 시키는데, 여전히 위태위태 맴돌다가 박포장에 이르러 자유로이 움직였다.
그래서 만부득이 서로 의논하여 식량*의복*솥*도끼*칼 등속을 내려주고는 박포장을 섬에 남겨놓고 떠났다. 회로에 꼭 들려 그를 맞아 함께 돌아가겠음을 언약하고 서로 눈물로 헤어진 것이다.

박포장은 고도에서 혼자 풀로 움막을 얽어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조개*소라를 줍고 청개구리*메뚜기를 잡아서 배를 채우며 지냈다. 염라 대왕 외손자라도 꼼짝없이 절해 고도의 마른 뼉다귀가 되겠구나 싶었다.

항상 밤에 잠을 못이루고 귀를 기울여 듣노라면, 매일 새벽 바람소리가 섬으로부터 산을 흔들며 언덕을 스쳐 바다로 나갔다가 해가 지면 소리가 바다로부터 물결을 일으키며 섬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따. 아주 이상히 여겨 그때를 타서 나무숲에 몸을 숨기고 엿보았더니, 한 마리 엄청나게 큰 구렁이였다. 대들보 같은 몸체에 길이가 몇 백자나 될지 꿈틀꿈틀하는 괴물이 눈깔을 이글이글 번득이며 굴 속에서 기어나와 곰*사슴*멧돼지 등을 잡아삼키고 바다로 들어가서 고기류*거북류 등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것이 아닌가. 괴물이 다니는 길로 도랑이 나서 족히 배를 용납할 지경이다.
박포장은 칼을 예리하게 갈아서 괴물이 다니는 길목 곳곳에 날을 위로 하여 묻어두고, 주변의 대숲을 전부 베고 밑둥을 뾰쪽이 깎아놓았다.

황혼에 괴물이 바다로부터 나와 그곳을 통과하다가 주둥이에서 꼬리까지 칼날에 찢어지고 대끝에 찔려서 주기(珠璣)[6]*낭간(琅)[7]*화제(火齊)[8] 등속이 쏟아져나와 골짜기에 흩어졌다.
[6] 구슬의 일종
[7] 암록색 내지 청벽색을 내는 아름다운 돌
[8] 구슬의 일종

며칠 지나자 비린내가 숲에 진동하고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보니 커다란 이무기가 숲 속에 죽어있다.
괴물의 내장을 들어내니 한 치가 넘는 반짝이는 보물들이 몇 천 개가 될지 몰랐다. 풀을 엮어 싸서 한 말 부피로 대여섯 섬을 만들어 헌 옷가지로 덮어 두었다. 배 돌아오기를 기다린 지 반년이 흘렀다.
문득 큰 배가 돛을 달고 바다로부터 다가와서 외치기를,

"박포장! 박포장!"

곧 중국을 다녀서 돌아가는 사행선이었다. 서로 손을 잡고 위로하며 배에 태웠다.
동행한 사람들은 중국의 남금(南金)*화패(火貝)*문단(文緞)*채금(彩錦) 등속을 사서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온 것이다. 박포장은 하는 말이,

"여러분은 모두 중국에서 값진 물화를 얻었는데, 나 홀로 고도에 떨어져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 말았으니, 이게 다 운수지.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처자식을 대할지...... 섬에서 하릴없이 바닷가에 둥글동글한 자갈을 주어모았는데, 혹시 아내가 상을 고이고 베틀을 받치며 길쌈하는 데 쓰일까 싶소."

하고 대여섯 섬의 꾸러미를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으나, 한편 불쌍히 여겨졌다.
돌아와서 그것을 시장에 팔았더니, 값이 수백만 냥이어서 박포장은 동방의 갑부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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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조한문단편집의 해설에서도 말하듯이, 이 이야기는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디테일에 충실하죠. 주인공의 이름과 직업도 어느 정도 확실하고, 땅이름과 보물의 이름도 여러 번 언급됩니다.

또 주인공이 재치를 발휘하는 두 주요 장면은 천예록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1) 땅에 대나무 따위를 뾰족하게 해서 괴물을 죽인다. 2) 자루에 든 구슬을 조약돌이라고 속여, 일행에게 들키지 않고 큰 부자가 된다.
하지만 저는 이 두 이야기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공통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바로 괴물이 등장할 때에 나는 "바람 소리"와 죽었을 때에 나는 "악취"에 대한 언급이죠. 사실 옛 이야기로 이런 현실적인 (청각/후각적) 디테일에까지 충실하기는 어려운데 말이죠... 특히 천예록 버전의 이야기에서는 역관이 괴물의 썩은 고기를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 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에 다룬 용골 류의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 혹시 이런건 아닐까요?
외딴 섬에 남겨진 역관/혹은 화포장은 태풍이 지나간 뒤, 그 여파로 섬에 묻혀있던 화석, 혹은 미라가 된 동물의 사체가 지표면에 노출되어있는 걸 발견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폐쇄된 환경에서 보존되어있는 사체는 바깥 공기와 접촉하자마자 급속히 부패하기 시작하며 악취를 냈을 겁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그 썩어가는 살덩이를 버리고 값이 나갈 것 같은 용골/흡독석(저도 아직 정확하게 이게 뭔지 모르겠습니다...)을 추려내어 자루에 담아 챙겼을 겁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그럴싸한 해프닝이 구전되는 과정에서 설화로 변한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런데 사실 이 거대 뱀과 구슬 기담에만 빠져있는 나머지, 제가 한 가지 빠뜨린 사실이 있죠? 
이야기 첫머리 부분에서 박포장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면서, 술을 즐겨마셨는데 정작 술을 한 잔만 사와서는 골방에 들어가 술과의 밀회?!를 하는 기이한 습관... 박포장의 이런 애주가? 알코홀릭? 같은 기이한 행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질테니, 이건 다음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겠습니다.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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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역사관심 2014/11/12 07:37 # 답글

    아 이거 흥미롭군요. 같은 이야기가 '박 화포장'이라는 직함으로 그 동야휘집에 전하다니.

    교차비교를 해본다면 천예록의 저자인 임방의 생몰년대는 1640~1724.
    동야휘집의 이원명이 1807~1887.
    저자미상인 청구야담의 추정연대가 대강 1840년경이니, 천예록의 뱀 이야기가 가장 먼저군요. 훗날 살이 덧붙여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원전기록을 근거로 각기 다른 편찬을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작의 연대들보다도 내용에 등장하는 사신단의 묘사를 통해 대강이라도 언제적 사신단인지 그 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면, 꽤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천예록의 기록보다 묘사가 자세하네요.
  • 더카니지 2018/02/20 14:08 # 답글

    조선 시대에 진짜로 거대한 뱀형 괴수, 이무기가 존재했다고 가정하면 꽤나 재밌을 것 같습니다.
  • 남중생 2018/02/20 14:43 #

    네, 뱀 요괴들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설화도 많이 있죠! 창작물의 소재로 삼을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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