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76. 고려의 자손 橘南谿의 서유기(西遊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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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바나 난케이(橘南谿)는 에도시대 일본의 의사입니다. 그 당시 일본 전국일주라고 불릴 만한 업적(!)을 남겼고 또 자신의 여정을 글로 남겼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죠. 그의 여행기는 크게 동유기와 서유기 두 권으로 되어있는데, 합쳐서 동서유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가 방문한 여러 장소 중에 임진정유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 도공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던 마을, 나에시로가와(苗代川, 지금의 가고시마현 히오키 시)도 있는데요. 그 부분을 발췌, 번역해보았습니다. 

타치바나 난케이의 책들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걸로 알고있습니다. 다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도공들을 이야기할 때 가끔 언급되는 정도입니다.

신동아에 소개된 적 있는 이 글(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3/24/200503240500031/200503240500031_7.html)이나 이런 글(http://dsb.kr/bbs_detail.php?bbs_num=2424&tb=muninessay)에서 간략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가 참조한 원문은 헤이본샤(平凡社) 동양문고의 동서유기 2권입니다.

(다소 오역이 있더라도 양해부탁드립니다.ㅠㅜ)


七六 高麗の子孫(鹿児島)

76 고려의 자손 (카고시마)

 

           薩摩州鹿児島城下より七里西の方ノシロコという所は、一郷皆高麗人なり。往昔(むかし)、太閤秀吉、朝鮮国御征伐の時、此国の先君、彼国の一郷の男女老若とりことなして帰り給い、薩州にて彼朝鮮のものどもに一郷の土地を賜い、永く此国に住せしめ給う。今に至り、其子孫打つづき、朝鮮の風俗の儘にして、衣服、言語も皆朝鮮人にて、日を追う繁茂し、数百家となれり。初めとらわれ来たりし姓氏十七氏、所謂、伸、李、朴、卞、林、鄭、車、姜、陳、崔、盧、沈、金、白、丁、何、朱なり。余、久敷其地に遊ばん事を心がけ居たりしが、元来異国の種類、其上旅宿すべき定りの宿もなければ、便りなくて行かんこともあしかるべしと人々の諌めによりて、遊ぶ折もがなと見合わせ有りしに、程経てノシロコの司する人にゆかり出来て、夫より添状を乞得て彼地にいたりぬ。

           사츠마 주 카고시마 성 아래에서 7() 서쪽 노시로코[1]라는 곳은, 한 고을이 모두 고려인이다. 옛날, 타이코(太閤)[2] 히데요시의 조선국 정벌 때, 이 나라의 선군(先君), 그 나라의 한 고을 남녀노소를 포로로 삼아 돌아와서, 사츠마 주에 그 조선인들에게 한 고을의 땅을 내려, 영원히 이 나라에서 살게 했다지금에 이르러, 그 자손을 쳐나가, 조선의 풍속 그대로 하여, 의복, 언어도 모두 조선인(의 것)으로, 나날이 번창해, 수백 호가 되었다. 처음 붙잡혀온 성씨 17씨는, 소위, (), (), (), (), (), (), (), (), (), (), (), (), (), (), (), (), ()이다. 나는 오래도록 그 땅에 놀러 갈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고을사람들이) 원래 이국의 종류인데다가 묵을 만한 지정 숙소가 없으면, 의지할 데 없어, 가지 못 하게 되는 수도 있다는 사람들의 간언을 듣고, 조금뒤에 노시로코에 관직이 있는 사람에게 인연이 있어, 그에게 첨부하는 편지[3]를 빌어 그 지역으로 갔다.

 [1] 아마 나에시로가와(苗代川)를 뜻한다.

 [2] 일본의 최고 벼슬,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컬음.

 [3] 添状, 여기선 일종의 소개장, 추천장의 뜻이다.

          頭よりの賓客なれば、ノシロコの庄屋礼儀を正して出迎いたり。すなわち庄屋の家に入り、酒飯等のもてなしを受けて、初めて対面して名をとえば、シンポウチユンと答う。其文字をとえば伸侔屯と書くという。「さてもめずら敷御名也。殊に伸というは唐土にもうけ給わり及ばず、朝鮮元来の御姓にや」といえば、「其事にて候。これは日本にわたりて後に改め候也。元来はしんと申候を、先祖のもの此国に渡り上がりし頃、太守へ御目見えの時、披露の役人衆、猿と某を披露申されぬ。其場にて争うべきにあらざれば、其儘に拝礼し終りぬ。是は申という字十二支の猿とよむ字なれば、帳面の名を斯よみ誤りて披露あられし也。其明年の年始拝礼の時も、披露の役人また猿なにがしと披露あり。跡にて、某が姓はしんとよみ申也と断り置きしかど、其役人替ればまた明年も猿と披露あり。とかく人の聞えもあしければ、さるとおめざるように、人扁にんべんを付けてしんの字に改めぬるなり」と答う。其由来も珍敷、手を打ちて笑う。「さて日本へ渡り給いてより何代になり給うにや」と問えば、「既に五代に成れり。此村中にも、長寿にて続きたりしは四代なるもあり。又はやく替れる家は八代にも及べるあり」という。「然らば、朝鮮は古郷ふるさとながらにも数代を経給えば、彼地の事は思いも出だし給うまじ」といえば、「故郷忘じがたしとはたれ人のいい置ける事にや、只今にてはもはや二百年にも近く、此国の厚恩をこうむり、ことばまでもいつしか習いて、此国の人にことならず、衣類と髪とのみ朝鮮の風俗にて、外には彼地の風儀も残り申さず、絶えて消息も承らざる事に候えば、打忘るべきことに候えども、只何となく折節に付けて故郷床しきように思い出で候いて、今にても帰国の事ゆるし給うほどならば、厚恩を忘れたるには非ず候えども、帰国致したき心地候」といえるにぞ、余も哀れとぞおもいし。扨又、「庄屋をつとめ給えば、村の人別帳有るべければ、其名前ども見せ給え」と望みければ、則ち帳面取出だし見す。庄屋、五人組を初め、一郷中みな金慶山、白孝基などいえる名なり。いと珍らしくくりかえしみる。其中に解しがたき名も多し。土民の事なれば文盲なるゆえなるべし。兎角して黄昏にも及びければ案内のもの来たりて、客屋というに導き行く。客屋の主は朴養真という。其子を朴養安という。妻をロレンという、文字はなしとなり。誠に土民にて人品質朴なり。其余、五人組などいいて伸守吟というもの挨拶の為に旅宿に来たる。暫く留めてものがたりす。珍ら敷事ども数々有り。

           우두머리의 빈객인지라, 노시로코의 촌장이 예의를 바르게 해 마중 나왔다. 곧 촌장의 집에 들어, 주반상을 대접받고, 처음 대면하여 이름을 묻자, 심포춘이라고 답했다. 그 문자를 물으니 伸侔屯이라고 쓴다고 한다. “참으로 진기한 이름입니다. 특히 신()이라는 것은 중국 땅에서도 미처 들은 바가 없습니다. 조선 원래의 성입니까라고 하니,“그 일로 말하자면, 이것은 일본에 건너온 후에 고친 것입니다. 원래는 신()이라고 한 것을, 선조 되시는 분이 이 나라에 건너왔을 적에,(사츠마 주의) 태수를 알현할 때, 보고하는 관리들이, '원숭이'[4]라고 누구를 보고하지 않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대로 절을 올리고 끝나버렸습니다. 이것은 신()이라는 글자로 십이지의 원숭이라고 읽는 글자인데, 장부의 이름을 이처럼 잘못 읽어 보고한 것입니다. 그 이듬해 연시배례의 때에도, 보고하는 관리가 또 '원숭이 누구'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뒤에 '아무개의 성은 신이라 읽사옵니다'하고 말해두었지만, 그 관리가 바뀌어서 또 이듬해에도 원숭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아무튼 남이 듣는 것도 있어서, 원숭이라고 읽지 않도록, 사람 인 변을 붙여서 신() 자로 고쳤습니다.”고 답했다. 그 유래도 진기해,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럼 일본으로 건너오신 것으로부터 몇 대 째 되시는 것입니까.”하고 묻자, “벌써 5대가 되었습니다. 이 마을 안에도, 장수하여 (대를) 이어나간 씨는 4대 째 된 것도 있습니다. 또는 (세대가) 자주바뀐 집은 8대에도 미치기도 했습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고향이면서도 수 대를 지나서, 그 땅의 일은 기억도 나지 않겠군요.”라고 하니, “고향을 잊기 어렵다는 것은 누가 한 말이랴.[5] 이제는 벌써 200년 가까이, 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말까지도 어느덧 익혀, 이 나라 사람과 다름없이, 의류와 머리만 조선의 풍속으로, 겉으로는 그 땅(조선)의 풍의[6]도 남지 않아, 마침내 소식도 이어지지 않게 되어, 아주 잊었을 것으로 여기지만, 그저 왠지 이따금 고향이 그리운 듯이 추억에 잠겨, 지금이라도 귀국할것을 허락하여 주신다면야, 깊은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면서도, 귀국하고픈 기분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나도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촌장을 맡으셨다면마을 호적대장이 있을 터인데, 그 이름들을 보여주십사하고 부탁했더니, 곧바로 장부를 꺼내 보였다. 촌장, 오인조(五人組)[7]를 시작으로, 한 고을 전부가 모두 김경산(金慶山), 백효기(白孝基) 따위로 불리는 이름이다. 자못 진기해 여러 번 보았다. 그 중에 풀이하기 어려운 이름도 많았다. 토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문맹인 까닭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저녁노을이 지니 안내자가 와서, 객실이라는 곳으로 이끌었다. 객실의 주인은 박양진(朴養真)이라고 한다. 그 아들은 박양안(朴養安)이라고 한다. 아내를 로렌이라고 해, 문자는 없다고 했다. 진심으로 토민이라서 인품이 소박했다. 그 밖에는, 오인조(五人組)라고 하며 신수금(伸守吟)이라는 자가 인사를 하기 위해서 내 숙소로 왔다. 잠시 머물러 이야기했다. 진기한 일이 여럿 있었다.

 [4] 일본에서는 한자의 음독, 훈독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자를 원숭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5]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고향을 잊기 어렵나이다(がたく候)"의 제목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6] 풍속과 예의

 [7] 5인조는 일본 에도시대에 기독교도를 색출해내기 위해 도입한 마을 단위의 연좌제로, 흔히 알고 있는 오가작통법과 유사하다. 여기서는 5인조의 조장을 맡은 사람을 말한다.


           翌日、案内のもの来たりて、高麗焼の細工場、並びに竃を見物す。仰山なる事どもなり。此村半分は皆焼物師なり。朝鮮より伝え来たりし法を以て焼く故に、白焼などは実に高麗渡りのごとくにて、誠に見事なり。日本にて焼たるものとは見えず。夫故に上品の焼物は大守よりの御用ものばかりにて、売買を厳敷(きびしく)禁ぜらる。これによりて平人の手に入る事なく、他国にてももてはやせることを見ず。予も案内者に頼みて求めけれども、白焼は得る事あたわず。ようよう黒焼の中の上品の小猪口(ちょく)を得たり。これも予が遠国もの故に、内密にて得させたる也。携え帰りて今に秘蔵す。其外は下品にて質厚く、色も薄黒く、烈火にかけても破るることなし。故に下品は土瓶などに多く造り出す。これは夥敷(おびたたしく)売買して、((薩摩)()(大隅)()(日向))の三州は大方民間にも此土瓶を用ゆ。猶、大阪までもうり来たりて、薩摩焼と称して重宝とす。薩摩にてはノシロコ焼のチヨカという。チヨカとは茶家の心にて土瓶の事なり。薩摩の方言なり。土瓶といいては(しる)ものなし。扨、夫より一郷中所々方々見物し終わりて帰路に趣く。

           다음 날, 안내하는 사람이 와서, 고려자기의 세공장(細工場)에 나란히 있는 가마를 구경했다. 엄청난 일들이다이 마을의 반은 모두 도자기 장인이다. 조선에서 전해오는 법을 써 굽는 고로, 백자 따위는 실로 고려에서 건너온 그대로라서,참으로 볼만하다. 일본에서 구운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상품(上品)의 도자기는 대수(大守, 태수)에게 바치는 어용품 뿐으로, 판매를 엄히 금한다. 이것[금령]에 의해 평민의 손에 들어오는 일이 없고, 타국[8]에서도 [이것에 대해] 떠드는 것을 못 보았다. 나도 안내자에게 부탁해서 얻었지만, 백자는 얻을 수 없었다. 흑자 중에 상품인 작은 반찬 접시(猪口)[9]를 얻었다. 이것도 내가 먼 고장 사람인 고로, 몰래 얻은 것이다. 갖고 돌아와서 지금도 비장하고 있다. 그 외에는 하품(下品)으로 품질 좋고, 색도 거무스름한, 센 불에 얹어도 부서지는 일이 없다. 고로 하품(下品)은 토병 따위로 많이 만들어낸다. 이것은 대단히잘 팔려서, 사츠마, 오오스미, 휴가의 3주는 대개 민간에도 이 토병을 쓴다. 또한, 오사카까지도 팔려가서, 사츠마야키라고 칭해 큰 보물로 여긴다. 사츠마에서는 노시로코에서 구운 쵸카라고 한다. “쵸카란 차가(茶家)의 마음으로 토병을 일컫는 사츠마의 방언이다. 토병이라고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한다그리하여 한 고을 방방곡곡 구경이 끝나자 귀로에 올랐다.

 [8] 봉건시대 일본에서는 한 명의 영주가 다스리는 번을 쿠니(国)라고 부르기도 했다.

 [9] 입구가 돼지 주둥이 같이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都て此ノシロコの風俗、皆、惣髪にて、額の上に集めてゆいたり。京の女の櫛巻などいう髪のごとし。礼儀の時は頭にまんきんというものをいただく。馬の尾にて網のごとく組みて、底なく、耳の上に錫或は真鍮にて木の葉の形の金物を左右に付け、巾は額より後の方へ廻し当たるもの也。高き巾有り、低き巾有り。高きは高幔巾という、上官也。衣服は茶色の絹にて袖広く法衣のごとく、()み裾分かれたり。先ず裳を着て、又、衣を着す。上には桃色の細き丸き帯を結ぶ。下着は日本流の服なり。身幅袖はばとも広く、帯は多く前結なり。女の髪は礼儀の時は(もとどり)を三つに分けて、平生はくし巻のごとくなり。斯のごとくの風俗にて、馬を追い耕すを見るに、実に此身唐土に有る心地して、更に日本の地とは思わず。斯無年貢の地を与えて此風俗を立地かるる事、薩摩の広きをしるべし。薩摩の朝鮮通詞は此村の人つとむ。当村にて平生は大方和語に馴れたりといえども、又よく朝鮮の言葉を用ゆるものありて、通事役をつとむる也。都て薩摩は異国の船毎度漂着する故、諸異国の通詞役人有り。此村の人の朝鮮通詞を勤とむるは尤もの事なり。

           이 노시로코의 풍속은 모두, 상투머리로, 머리 위에 모아서 묶었다. 교토 여자의 쿠시마키(櫛巻)따위로 부르는 머리와 같다. 예의를 차릴 때는 머리에 만건(幔巾)[10]이라는 것을 받는다. 말꼬리를 그물처럼 엮어, 밑 없이, 귀 위에 방울 혹은 진주로 나뭇잎 모양의 금붙이를 좌우에 달아, 건은 이마에서 뒤 쪽으로 돌려 맞추는 것이다. 높은 건이 있고, 낮은 건이 있다.높은 것은 고만건(高幔巾)이라고 하며, 상관이다. 의복은 갈색의 비단으로 소매가 넓고 법복 같이, 위 옷자락이 나뉘어있다. 먼저 아랫도리()를 입고, 그 다음, 저고리()를 입는다. 위에는 분홍색의 가늘고 둥근 띠를 묶는다. 속옷은 일본풍이다. 여자의 머리는 예의 차릴 때는 상투를 셋으로 나눠서, 평소에는 쿠시마키처럼 한다. 이와 같은 풍속으로, 말을 부려 밭 가는 것을 보니, 참으로 이 몸이 중국 땅에 있는 기분이 들어, 더욱 일본 땅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 연공(年貢) 없는 땅을 주어 이 풍속을 땅에 세운 일에서, 사츠마가 넓은 것을 알만하다. 사츠마의 조선통사는 이 마을 사람이 맡는다. 이 마을에서 평소에는 대개 일본어에 익숙해져 있다고 해도, 또 조선의 말을 잘 하는 자가 있어, 통사 역을 맡게 한다. 사츠마는 이국의 배가 매번 표착하는 고로, 여러 이국의 통사 관리가 있다. 이 마을의 사람이 조선통사를 맡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10] "망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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