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에도시대의 용골논쟁(江戸時代の竜骨論争) 용은 환골하고 뱀은 탈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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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https://www.gsj.jp/data/chishitsunews/66_06_04.pdf
『지질 뉴스』1966년 6월호、공업기술원 지질조사소、34-38 페이지.

에도시대의 용골논쟁

이마이 이사오

용은 실재하였는가

에도시대 중엽 호우레키 10 (1760)에 信陽源通魏용골변이라는 소책자를 에도에서 발표했다. 용골이란 중국에서 전해진 의약()으로 나라시대의 보물을 모아놓은 정창원에는 각종 용골이 보존되어있다. 용골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중국 본초서 예를 들어 신농본초경, 신수본초, 본초강목 등-에 기재되어 있기를 주된 산지는사천성산서성이라고한다. 본초서의 가르침을 받은 에도시대 중엽의 사람들은 용골을 실제 용의뼈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용골변에는 말머리뱀꼬리사슴뿔도깨비눈소귀잉어비늘매발톱호랑이발바닥의 모습을 가지고 삼계에 서식한다고하는 용의 성질이 다양하게 쓰여있으나 말하지 않는것은 세상사람은 용골, 용골이라며 진귀하게 여기면서도 용은생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실제로 용을 본 자는 없기때문에 결국 어떤 뼈인지아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어떤 사람이 용골이라고 하는 것을 잘 보면 둘레 1척 남짓, 길이 2척 정도로 마디가 없고 딱딱하고 적시면 흑회색이 되며 두드리면 산산조각이 나 돌가루처럼 된다. 이빨과 뿔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진흙 속에 수년간 묻혀있던 큰 물고기의 썩은 뼈와 같다.그러나 아직 금수 중에 이렇게 큰 것은 본적이 없다. 고래나 사람이 아니고서야 곤예(鯤鯢)의 등이나 방풍씨의 뼈일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상식을 깨는 듯한 내용의 글이다. 그 이듬해 갑배의 源昌樹라는 자가박룡골변한 권을 발표했다.이것은 확실히  源通魏용골변에 대한 반론이다. 그는 용의 존재를 믿어

용골은 중원의 산골짜기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고골이 산산히 떨어진 것은 이따끔 어부나 나무꾼이줍는다.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일반 사람은 그 이름을 모른다.늙은이는 이것을 용의 뼈라고 한다. 용골산이나 용골하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붙여진것이다. … 崎 사람이 가져온것은 코즈시마의 어부가 그물 속에 걸린 것으로 물론 보통의 물짐승이 아니다. 게다가 그 뼈와 뿔과 치아는 명료하게식별된다. 보는 사람은 모두 기괴한 것이라고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용이 실재했는지 오늘날 보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당시로서는 큰 문제였던 것 같다. 이 논쟁에는 용은 실재했는가라는 것과 석약으로써의 용골의 정체는 무엇인가 라는 것이 엮여있다. 아무튼 이제까지 아무도 믿어의심치 않았던 용골의 정체에 메스를 대려고 한 태도는 당시 겨우 싹 틔운 과학적 탐구심의 한 가지 발현일것이다.

그러면 源通魏源昌樹라는 인물은 대체 어떤 자들인가.물론 둘 다 멋대로 붙인 펜네임이다. 상세에서 근세에 걸친 일본광물학사를 연구했던後閑文之助는 가끔 이 용골논쟁에 쇼와7년 이래 여러가지 조사한 결과 쇼와12源通魏은 히라카 겐나이(平賀源)라고 하는 설을 발표했다. 시대고증 뿐만 아니라 관련 고문서의 내용에서도 겐나이 설이 옳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源昌樹의 정체에대해서는 아직 잘 알려져있지 않다.


히라카 겐나이라는 사람

히라카 겐나이는 타카마츠번 마츠히라후의足 白石茂左衛門의 아들로享保 14(1729) 志渡浦에서 태어났다. 호우레키 2(1752) 나가사키에서 난학을 배워 이듬해 에도의 타무라 란스이(元雄)의지도 아래 본초학을 배웠다. 놀랄 정도로 박식다재한데다가 호기심이 강한 사람으로 에도에서는 타무라 란스이와함께 때때로 물산을 열고 또 秩父両神山에서 아미얀토스(석면)을 발견(1764)하여  火浣布를 만들거나 타르모메이토르-한난계-(1768)나 에레키테르(1776)을 만들었다.

광산개발자로서도 알려져 안에이 연간(1778~1779)에 秩父 中津川村 山 및 같은 마을의 사금, 아키타의 아니阿仁광산, 多田銀山, 紀伊吉野銀山, 陸中仙人山 등을 직접 조사하였다. 또 당시 아직 귀했던 서양그림의 수법을 수련하여 아키타 번주 佐竹義敦에게 초대받아 아니阿仁광산을 조사했을 때 角館에서 小野田直武에게 서양그림의 수법을 전수하였다.

겐나이는 호우레키 11 (1761)부터 메이와5(1769) 사이에 네덜란드인으로부터 다음의 책들을 입수하였다.

홍모화보 (1631년 간행)

홍모본초 (도도네우스)

홍모개보 (석보 부록) (암보이스 패보1705년 간행)

홍모충보 (1669년 간행)

홍모금수어개충보 (1660년 간행)

홍모어보 (1686 간행)

이 중에 암보이스 개보의 원본은G.E. Rumphius: L’Amboinsche Rariteitkamer, 1705이다. 상당히 오래된 책이지만 겐나이는 이 책들을 기반으로 왕성한 지식욕을 채웠다.그가 활약한 시대는 과학사 상으로도 유난히 중요한 시기였다. 유럽에서는 마침 산업혁명이시작한 때이자 프랑스 혁명의 전야에 해당한다. 프랑스의 백과전서파가 활약한 것으로도 알수 있듯이 당시 동광물을 시작으로 온 자연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기풍이 퍼지고있었다. 지질학이 학문으로써의 체계를 갖기 시작한 것도 이 때로,성층암의 생성순서나 산의 성인(成因) 등을 생각하는초보적인 지질학이 만들어졌다. 프라이베르크 광산학교가설립되어 베르너가 교수가 된 것은1765년의 일이다. 

일본의 박물학을 보면 貝原益軒生若水寺島良安宮崎安貞들의노력에 의해 중국의 본초학이 일본에서 소화되어 야마토본초로서 독립의 체계를 갖게 되었던것은 에도시대 전기(前期)이다.  이 사이 난학은 차례로 일본에 침투해 18세기 후반이 되면吉雄耕牛(幸左衛門)杉田玄白前野良沢本木良永大槻玄沢志築忠雄라고하는 사람들에 의해 난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어나간다. 지동설이나뉴턴 역학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도 이시대다. 이 때문에 과학 기술의 지식이 급속히 증가하여 본초학자도 난학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히리가 겐나이의 활약기는 정확히 난학과 본초학과의 접촉의 시대에 해당하는 까닭이다. 소위 물산학이 태어난 것도 이 시대다.


용골은 코끼리뼈인가

다시 본제에 돌아가 호우레키 11(1761) 봄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장 하이스호른M.Hujishorn이외과의 바우에르George Rudolf Bauer와 대통사 吉雄幸左衛門 등을이끌고 에도에 참부하였다. 에도 혼세키마치의 나가사키야는그들의 지정 숙소였다. 이 때 히리카 겐나이는 나가사키야를 찾아가 讃崎 코즈시마산의 용골을 바우에르에게 보여주고 이것은 흔히 말하는 슬랑가스텐인가 아닌가 하고 물었다.슬랑가스텐이란 남만 도래의 석약을 말하는 것이다. 바우에르는 말한 그대로라며 인도특산의 슬랑가스텐이 일본에도 난다는 것에 놀랐다. 겐나이는 이 즈음부터 용골은 코끼리뼈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바우에르는 겐나이에게 코즈시마 산 용골을 코끼리 뼈 화석이라고 설명했기 때문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吉雄幸左衛門이바우에르로부터 외과의술을 배워 메이와 6(1769)에는 마에야 료우타쿠와 스기타 겐파쿠가 吉雄幸左衛門 에게 지도받게 된다.그들의 노력의 결정 해체신서가 태어난것은그러부터 5년 후의 일이다.

호우레키 12 (1762) 겐나이는 유우지마에서 5회 째의 물산회를 개최했다. 출품수2000여점 그 중 우수한 것에 대해 해설하여 이듬해 이것을 물류품” 6권에 정리했다. 그 중에서 그는 土部에 石,石部에는 ベレインブラ, 밖에 한문 이름이 불분명한 것으로 カナノ トアルド ポットロ ヒッテリョウアルビイ따위를 들어제각각 설명을 더했다. 용골에 관해서는 鱗部 (용골을 린부에 포함시킨 것은 본초강목 이래의 관습이다.) 중에서

용골 岐코즈시마 산. 상품上品은 바다속에 있어, 어부의 그물 속에 걸리곤 한다고 말한다. 그 뼈가 몹시 크고 형체를 대략 갖추었다.이것을 핥으면 혀에 달라붙고 이것을 쓰면 그 효험이 본초의 主治와 같다. 이 진품을 의심하지 말 것. 근세에 중국에서 건너온용골이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돌로 진품이 아니라 나무가 돌이 된 것(목화석)에 가깝다.” 

용각 코즈시마 산.길이는 육 척 남짓, 지름이 한 척에 가까운 것이 있다. 윗부분은 검고, 가운데는 흑, , 회색이 서로 섞여있다. 뼈보다는 살결같고 또한 혀에 잘 붙는다.”“용골 코즈시마 산.그 형상이 이빨에 닮았거나 크기 육, 칠 촌. 뼈에 붙는 것도 있다.

라고 기술되어있다. 이렇게 보면 코끼리 뼈 화석인 것은 아마 틀림없지만 겐나이는신중하게 단언을 피하고 있다.

한편 메이와 연간 (1764~1771) 東武佃島에서 어부의 그물에 용골이 걸렸다.크기는 こたつやぐら(각로 위에 놓고 이불을 씌우는 ) 정도의 보존 상태가 좋은 두개골로2개의 뿔은 양쪽 모두 꺾여 뿌리가 6, 7 촌 남아있었다. 겐나이는 서둘러 이것을 구입했지만 뿔의 흔적이 명료한 것을 보고 상골설象骨에 자신을잃었다. 뿔이 있다는 것은 용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유리한 까닭이다.이것은 오늘날 보면 사슴의 뼈였음에 틀림없다.


슬랑가스텐이란

이리하여 용골설과 상골설이 서로분쟁했지만 여기에 한 장 더한 것이 남만도래의 슬랑가스텐이다.그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교토의 마츠오카 죠안이 발표한용약수지” (호우레키12) 후편 4권의 번류약 중에는 슬랑가스텐은 석약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사두석(蛇頭石)이라 하고 흑백의 두 가지 색이 있는데 종기의 고름을 잘 빨아들인다. 염록석이다.”이라고 되어있다. 

또 메이와 2(1765) 타무라란스이의 제자 고토 리하루가 발표한 홍모담” (네덜란드 이야기)에는

슬랑가스텐 번인이 말하길이것은 뱀의 머리에 나는 돌이라고 한다. 그 모양이 반석 같고 그 색은 희기도 하고 또 흑백이 함께 있기도하다. 생각컨대 자연(그대로)의 모양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종기의 고름을 잘 빨아들인다. 그 빨아들인 돌을 물 속에 넣으면 다시 고름을 제각각 토해내는것을 꺼내 말려서 몇 번이고 (다시) 쓴다. 近比和方에도 시코쿠에서 나는 용골을 이렇게 제조해 쓰는데 슬랑가스텐에 다름없다고 말한다. 뱀머리의 돌이라고 말하는 것도 용골에서 제조해 만든 것을 번인이잘못 듣고 전하여 나온 것이다. 혹자는 말하길 조염석에서도 이것을 만든다고 말한다.” 

라고 한다. 이 시코쿠에서 나는 용골을 이렇게 제조해 쓴 사람은 타쿠라란스이로, 그는 이 실험에 의해 슬랑가스텐은 용각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겐나이와 바우에르의 슬랑가스텐 문답은 그 후의 일로 겐나이도 당연히 슬랑가스텐과 용골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의학사 연구가 岩崎克己에 의하면 슬랑가스텐(slangasteen)이란 뱀의 돌이라는 의미로 원산지는 인도. 예로부터 인도에서는 뱀을 숭배하여 뱀의 머리 속에기적을 행하는 힘이 있는 보석이 감춰져있다고 하는 신앙이 있었다. 뱀 독에 특효가 있다고 하는 蛇石의 명칭의유래는 이 부근에서 생겨난 것 같다. 해독제로써의슬랑가스텐이 유럽의 학자의 주의를 끌기 시작한것은 대략 17세기 말엽의 일이었지만 이것을 과학적으로 고찰한것은 18세기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슬랑가스텐과용골을 비교검토한 타무라 란스이나 히라카 겐나이의 태도는 주목받아 마땅할 것이다. 텐메이 7(1787)에 노중년이 된  松平定信아란타명목어阿蘭陀名目語라는 에 수입품목이열거되어있다. 그 중에 약품 종류 그 밖의 것으로 상아, 무소 뿔, 소뿔, 물소 뿔, 사슴 뿔, 우니카우르, 丹礬,사석(蛇石),ルサラシ, オクリカンキリ등이 있다.이 사석은 슬랑가스텐이다. 이것이 동물의 엄니나 뿔과 구별되어 있는 점을 보면 석약으로써가공된 것인 듯 하다.


石亭의 용골기

여기서 농석파弄石派의 木石亭가 등장한다. 石亭도 타무라 란스이의 문하에서 본초학물산학을 배웠지만 오로지 기석의 수집에 매여 돌 부자로 유명해졌다.수집품은 2000 여 품에 달했다고 말해진다. 그가 안에이 원년(1772)부터 享和 원년(1801)에 걸쳐 발표한 운근지雲根志” 3 18권은 그 대표작이다. 이 중에서 그는 석류石類를영이류異類채용류采用類변화류化類기괴류奇怪類애완류愛玩類광채류光彩類생동류生動類상형류像形類전각류鐫刻類총애류寵愛類로구분하고 있다. 이 비과학적인 분류에서도 알 수 있듯이 石亭에 대한후세의 평가는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기록이나 관찰을 경시하지 않았을 뿐더러 독창적인 견해가 여러 곳에 나타나있어 흥미롭다. 石亭6(1794)용골기를 발표했다. 그 서문에 나의 용골 기록은 용골인가용골이 아닌가를 따지는데 있지 않고 육십년 동안 견문한 여러 땅에서 발굴된 산지, 형상, 시일을 사람의 수요에 응하여 기록한 것 뿐이다. 연구는 훗날의 군자에게 양도할 뿐이다.”라고 되어있다. 이 주변이 농석파弄石派 라고 불리는 연유일지도 모른다. 그는 용골기중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조에 용골이라는 것은 예로부터아는 사람이 없었다. 근세에 호사가가 취득해 즐기는데 머리부터 꼬리까지 전체의 물건은 아직 못 보았다.머리 이빨 뿔 팔뚝 발톱 등이 크고 작게 있다. 머리가 큰 것은 입 안에 사람 한명을 숨길 만 하고 이빨이 큰 것은 목침 두 개를 합친 것 만한데, 상하 사십팔 매 혹은 삼십육 매다.작은 것은 머리는 사자 머리 만하다. 뿔 길이는 이척 혹은 삼척이며,색은 옻과 같고, 견고하기가옥과 같다. 고금의 물산가의 생각 하나가 아니라 혹은 말하기를 용은 영물인지라 생사 있는 것과 다르다고 요즘 농석가에게 농완되는 물건에 들어 상골이라고 한다. 또 혹은 용도 아니고, 코끼리도 아니며, 돌의 뼈와닮은 일종의 ?라고도 말한다. 또 용은 뼈를 바꾸고 뱀은 허물을 벗는다며 이 설을 취한다면 진정 용의 뼈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연구할 만하다. 元文이래 여러 나라의 산해에 발굴穿出되는 용골이 적지 않다.그렇지만 그 설에 대한 의심은 덜하고, 또한 내가 무딘 붓의 빽빽함을 싫어해, 견문한 바의 10 1을 여기에 기록할 뿐이다.당시 약방에 있는 새로 건너온 용골이 심히 의심스러워, 옛날에 건너온 것 같은 물건을근년 박래가 없는 고로 사슴뿔을 구워서 판다고도 한다. 본초강목에 말하기를 용골을 핥아서 혀에 붙는것은 진품, 붙지 않는 것은 거짓이라고한다. 내가 이 설은 취하지 않고 만물 중에 돌로 ()화하는 것을 모두 각각 혀에 붙는다. 또 하나의 생각으로는 바닷속에서 올라오는 것은 겉은 흑색, 속은 흰 것이 주로 혀에 붙는다. 산에서 발굴되는 것은 겉은 황색, 속은 흰색으로 광택이 있는 것이 드물게 있어 혀에 달라붙지 않고 구운 뒤에야 혀에 붙어 약방에서 사슴뿔에 식초를 바르고 굽는다고 말한다. 구우면 혀에 붙기 때문이다. 의사는 혀에 붙는 것을 진품이라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나무화석, 조개화석의 종류도 모두 처음에는 백색, 뒤에는 흑색이다. 해를 거듭해 구슬로 변하는 것이 있어 처음 백색일 때 각각 혀에 붙는다. 또 일종의 일본산 설착석舌着石이라고 말하는 물건이 있다. 여러 곳에서 나오지 않고 타무라 씨의 홍모의 슬랑가스테인은 즉 용골과 같은 것으로 나가사키역관吉雄楢林두 명에 질문하니, 이것은 진품이라고 말했다.또 동도東都에서 외과 의사를 하는 홍모인 하우루라고 하는자에게 질문하니, 진품이 우리나라 (本邦, 일본)에서 난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난만 산은 검은 색이 많고 단단하고, 일본산은 부드럽다. 그래도 모두 같은 물건이다.  내가 생각컨데, 용골이나 상골이 아닌 것은 뿔을 가지고도 알수있다.” 

용골의 산지로써는

志渡浦海中

히젠국 (備前) 시오우라 섬(塩浦島) 바다바닥

() 島 해안

備中  연안의 산과 바다

佐渡 鹿伏大明神社산 속

近江 野洲郡 篠原村

이세국 (伊勢) 宮 산 속

東武佃島沖
등을 들고있다.

石亭는 머리에서꼬리까지 전체가 갖춰지지 못한 단계에서 용골의 정체를 확실히 하지 못했지만 재질로 볼 때 어떤 화석도 비슷한 듯한 성질을 갖고있어 용골이나 슬랑가스텐이나같은 것이라고 하고있다. 그가 시원스레 용골설을 부정한 것은뿔의 유무 만이 아니라, 일본에는 코끼리가 없다는 단순한 전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아직 石亭의 머리에는말의 머리뱀의 꼬리사슴의 뿔이라는 용의 이미지가 남아있던 것 같다.


용골의 정체

石亭용골기가 쓰인 때로부터 17년 후의 文化8(1811)阿波小原春造(峒山)이라는 사람이 용골일가언骨一家言을 발표했다. 그는 거기에

일찍이 용골 약간을 얻어이것을 잘 살펴보니 모두 코끼리의 뼈 화석이었다. 엄니가 큰 것은 길이 3, 4 , 둘레 6, 7촌으로 이것을 잘 보면 그 체질과 무늬모두 상아아 같다. 일반인이 용골이라 오칭하는 것에는 최근 수입된 것이 많아 이것도 코끼리의 뼈 화석이다.”라고 기술하고 더욱이

코끼리의 화석을 용골이라고하나 코끼리의 뼈 화석 만이 용골은 아니다. 산류수족을 불문하고 모든 뼈 화석을 모두 용골이라고 칭한다.무슨 뼈인지 알 수 없게 된 고골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용골이 화석 뼈인 것은 당연하다.” 

라고 하여 용골의 정체에 명쾌한결론을 내렸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코끼리 뼈라는 것을 주장하였다.이 시절에 이르러서는 용이 실재한다는 설도 희박해져있었다. 平賀源용골변이 출판된 것으로부터 반세기에 걸쳐 겨우 용골은 가공仮空의 용의 뼈가 아니라 여러 동물의 뼈 화석이라고하는 것과 일본에 코끼리가 서식했다고 하는 것이 밝혀진 까닭이다.

이리하여 에도시대의 용골논쟁은막을 내렸으나 같은 시절에 영국의 데이비가 슬랑가스텐의 정체 그것은 재질 그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를 밝혀냈다 (J.Davy: An analysis of the Snakestone, Asiatic Research vol. XIII, 1820). 그 방법은 상당히과학적으로 철저했다.

슬랑가스텐을 취관에 맞추면돌은 차례로 희게 변색하고 실질이 조금 감소한다.그러나 냄새는 나지 않는다. 이것을 희소산 속에 넣으면 매우 근소한 양의 거품이 단시간 떠오른다. 돌을 분말로 만들어 암모니아용액을 가하면 다량의 침전물을 발생시킨다. 이 침전물을 여과시킨 뒤의 용액에 희수산을 가했을 때,현탁을 발생시키는 결과로써 슬랑가스텐은 인산석회와 소량의 탄산석회 및 희소한 탄소와의 화합물인 것이 명료하다.따라서 그것은 중간 가소한 뼈의 합성물과 다를 바 없는 뼈 그 차제다.”라고 한다.

18세기 말에서19세기 초에 걸쳐 유럽은 라마르크나 큐비에르에 의해 연체동물이나 척추동물의 고생물학이 확립되어 갔다. 용골논쟁이 그 뒤 단순히 이야깃거리로 끝나버린 일본과 고생물학을 토대로 하여 근대지질학을 확립시켜간 유럽과는 과학적인 연구태도에관하여 큰 간극이 있는 까닭이다. (필자는 지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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