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섹시하지 않아도 괜찮아: 역사 속 인물을 존중하는 글쓰기 번역 시리-즈

노스햄프턴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강의하는 레이첼 모스(Rachel Moss) 교수님의 2018년 글을 번역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에 쟝 푸케의 제단화를 박물관에서 보고 온 참이라, 마침 이 글을 번역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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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하지 않아도 괜찮아 - 역사 속 인물을 존중하는 글쓰기

레이첼 모스
2018년 5월 11일

▲ 천사들로 둘러싸인 성모자 - 멜룬 목판 제단화(Melun Diptych)의 오른쪽 날개, 쟝 푸케, 1450년 경.

지난 며칠 간 5만 3천 명의 사람들이 아그네스 소렐(Agnes Sorel)에 대한 트윗 타래를 리트윗했다. 프랑스 샤를 7세의 애첩 말이다. 이건 정말 멋진 일이다. 중세 여성에 대한 타래가 이토록 인기라니! 다만 그 타래는 좋게 봐주더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글이었다. 제니퍼 라이트(Jennifer Wright)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건 아그네스 소렐입니다. 1440년대에 소렐은 자신있는 가슴 한 쪽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옷을 주문했어요." 여기에 부연하기 위해 선정된 사진들은 쟝 푸케(Jean Fouquet)의 아주 유명한 그림과 푸케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16세기 그림이었다. 푸케가 그린 초상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가슴 노출 때문은 아니고, 왕의 애인을 성모 마리아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르고 락탄(Virgo Lactans, 젖을 먹이는 동정녀) 도상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또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데 자주 쓰인 도상학적 요소다. 

샤를 7세와 아이 넷을 낳고 파격적인 의상과 행동으로 이름을 날린 아그네스 소렐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그리겠다는 것은 무척이나 대담한 결정이다. 물론 소렐이 이미 가슴을 드내는 옷차림을 즐겨입었기 때문에 화가가 이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러한 주장은 아그네스 소렐을 다루는 위키피디아 항목에도 나와있고, 그녀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했을 때 뜨는 거의 모든 검색결과에서 다루고 있다. 필자는 소렐이 공공연하게 가슴노출을 하고 다녔다고 읽힐 수도 있는 1차사료를 아주 드물게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이들 사료는 15세기에 신체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다루는 쉴라 델라니(Sheila Delany)의 학술서 Impolitic Bodies에 인용되어있다. 델라니는 소렐이 양쪽 가슴을 내놓고 다녔다는 주장(한 쪽 만이 아니다!)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이것은 소렐이 음란한 패션을 제작하고 발명했다는 조르주 샤스텔랭(Georges Chastellain)의 평가와 쟝 쥐브날 데 우르생(Jean Jouvenal des Ursins)이 (옷의 벌어진 틈새로 가슴과 젖꼭지가 보이는 의복을 포함해) 궁정 여인들의 잘못된 옷차림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궁정 여인들은 슴부심이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두 인용문 모두 꽉 조인 보디스 밖으로 한쪽 가슴만 무심히 내놓은 모습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정말로 파격적인 사실은 패션 리더인 젊은 여성이 왕과 공공연한 내연관계에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신성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안 섹시한 여성인 천고의 동정녀 마리아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 덕분에 우리는 소렐이 궁정에서 지닌 지위에 대해서, 정치적 선언으로서의 예술에 대해서, 15세기 프랑스 궁정의 성문화에 대해서 온갖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하지만 가슴이나 중세 패션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건 푸케의 작품과 함께 올린 16세기 팬아트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라이트는 아마 소렐이 섹시하고 대담한 패션 트렌드를 선보이는 당대 그림이 (뿐만 아니라 역사 기록이) 여럿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두 그림을 배치했겠지만 말이다.

트위터 타래 하나를 가지고 무척 긴 글을 썼지만, 필자는 여기에서 트위터 상의 섹시한 역사라는 하나의 장르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게 어떤 것인지는 이미 익숙할 것이다. 누군가가 역사 속 멋진 여성의 사진을 올리고, 그들에 대한 폭풍트윗을 하면 해당 트윗을 수천 RT를 받고, 사람들은 거기에서 새로운 역사지식을 얻어간 셈이다. 이걸 비판하자니 인색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상아탑을 유지하는데 혈안이 된 학자나 할 법한 짓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학계 내외의 장벽을 허무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을 모두 알아주었으면 한다. 게다가 섹시한 것을 전혀 싫어하지 않는다! 위와 비슷한 타래를 보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보다 큰 주제는 역사학자로서 필자가 역사 인물에게 어떤 의무를 갖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해답은 역사적 인물들이 인간으로서 타고난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2017년, 필자는 발레리나이자 아우슈비츠 희생자인 프란체스카 만(Franceska Mann)에 대한 인기 타래를 비판했다. 여기서는 젊고 아름다운 프란체스카의 사진과 함께, 그녀가 SS 친위대 장교 앞에서 옷을 벗어서 주의를 돌린 다음 총으로 쏘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완전 짱짱걸이다! 다만, 이 이야기의 세부 사항은 아마 사실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은 아마도 대담하고 섹시한 방법으로 행해진 자유를 내건 도박이 아니라,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한 용감한 여성의 이야기일 것이다. .


필자가 2017년에 말했듯이 "나는 멋진 여성이라고 하면 가리지 않고 좋아합니다. 하지만 우리 여자들을 멋지게 표현한다는 것이 우리를 기호로 축약하는 것이 아닐 때만 말이죠." 섹시한 역사 타래가 자주 보이는 문제점은 과거를 살아간 인간의 경험을 납작하게 눌러서 흥미로운 썰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인물(주로 여성)에게 현대적인 동기와 욕망을 부여하는 경항이 있다. 역사 속 인물을 두고 사극 의상을 입은 현대의 여성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굳이 중요하진 않지만) 역사학자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필자는 과거를 살아간 사람들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는 사안에 윤리적인 측면이 있다고 믿는다. 필자의 연구가 "문헌을 창작물로 바라보기"라는 포스트모던한 관점을 택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살아간 체험을 필자의 서사적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창작해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필자 스스로도 이러한 우를 범했으리라고 확신한다. 객관적인 글쓰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총 쏘는 발레리나에 대한 트위터 타래를 마구잡이로 뽑아내면서 홀로코스트의 비인간적 공포를 희석시키거나, 대중적인 책을 써서 인물을 사물로 축약(팀 데스몬데스의 2009년 저서, "아그네스 소렐: 역사를 뒤바꾼 가슴과 가랑이"가 일례라고 할 수 있다.)하는 대신, 이처럼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다루는 역사 속 인물을 축약하는 대신 드러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주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우선 팩트체킹을 한 뒤,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이 흥미롭고 다차원적인 인물을 그가 겪은 하나의 사건이나 면모로 축약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타래에 조금이라도 역사적 맥락을 더하면서 내가 다루고자 하는 서사를 흐트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에 서사가 흐트러진다면, 내 역사 서술이 어딘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타래 맨 마지막에 더 읽을거리를 제안하는 트윗을 붙이는건 어떨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항상 Yes다.) 이제 아무리 긴 타래를 이어나가더라도 상관 없고, 트윗 당 280자 씩 채워서 써도 상관 없다. 사실, 역사적 맥락에 자그마한 공백이라도 남겨놓는다던가, 트윗의 출처로 삼고 있는 학자들이 쓴 글에 감사를 표하지 않는 것에는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오해로 점철된 과거에 우리 만의 가치관을 통째로 투영하는 대신에 우리가 영업하는 역사 속 여걸의 가치관, 상상력, 장점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그 인물을 자리매기는 것이 그에게 더 큰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래서 필자는 절대로 50k 이상의 트위터 팔로워를 못 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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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듀공이어야 했을까? 그 나라의 이름은, 유리구슬


왜 듀공이어야 했을까?

작년에 번역한 대만의 "엇갈린 시작". 저는 흥미로운 블로그라고 생각했는데, 그새 사라져있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원문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부연 포스팅을 하겠다고 말은 했으니 이어서 쓰겠습니다. 

앞 포스팅에서 다뤘듯이, "엇갈린 시작"은 카타오카 이와오의 대만풍속지의 해양 포유류 목격담을 인용하고는 있지만 다리가 달렸다는 묘사를 생략함으로써 이 동물들이 "듀공"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실수라고 보기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편집입니다.

그렇다면 "엇갈린 시작"의 글쓴이는 왜 이런 악마의 편집을 감행하면서까지 강치와 바다사자를 듀공이라고 주장해야 했을까요?

글쓴이는 언어적으로 대만어와 민남어, 그리고 유구어를 이야기합니다. 오키나와의 나고(名護) 시가 사실은 "듀공"이라는 뜻의 지명이며, 대만어의 남공(Namgong, 南戇)과 일맥상통한다고 합니다. 또한 대만의 지명(해옹굴, 일곤신, 곤도 등)도 모두 듀공을 암시한다고 하지요. 

한편, 대만의 역사적인 교류 상대는 복건인, 네덜란드인, 일본인 등 다양한 "해양 세력"이 언급되고요. 그리고 마지막 문단이야말로 압권인데...

대만인은 줄곧 스스로를 "고구맛둥이(蕃薯仔)"라고 불러왔다. 대만 섬을 한 덩이 "고구마"에 빗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공중에서 조감하면 바다에 "미인어"가 떠있는 모습이다. 해협을 등지고, 태평양을 향해 헤엄치고 있다. 이건 대륙에게는 엇갈린 시작이겠지만, 대만에게는 필연적인 일이다. 타이완은 바닷섬일 뿐더러, 태평양을 박차고 너른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그러니까 글쓴이는 중국(대륙)에 예속된 대만이 아닌 태평양 국가, 태평양 민족으로서 대만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 "듀공"만큼 좋은 매개체도 없는 것이고요. (늬 집엔 이거 없지?) 

오스트로네시안 언어의 본고장인 대만이 "태평양 문화권"으로 정체화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역사를 보더라도 그렇고요. 하지만 기록에 없는 듀공을 억지로 짜맞춰서 만들어내서는 안 되겠죠... 대만섬의 지명과 형상에까지 듀공을 박아넣음으로써 (혹은 "발굴"해냄으로써) 대만을 해양적 성격의 국가/민족으로 재발견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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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그것은 듀공이 아닙니다! 그 나라의 이름은, 유리구슬


선생님 그건 듀공이 아닙니다!

모 대만 블로그에서 대만의 "엇갈린 시작"이라는 글을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대만(특히 타이난 인근 바다)은 옛날부터 듀공의 서식지였는데, 이후 환경이 파괴되어 듀공은 사라지고 그 기억은 잊혀졌다는 내용이었죠. 글쓴이는 대만에 듀공이 자주 나타났다는 근거로 카타오카 이와오(片岡巌)의 "대만풍속지(台湾風俗誌)" 기록을 듭니다.

카타오카 이와오(片岡巌)의 "대만풍속지"(대만인의 괴담기화)에 실린 바에 따르면: "강희 48년 여름. 녹이문(鹿耳門)에서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 그 형상은 말을 닮았다. 등에는 털이 나있고, 신장은 3,4장이었다... 강희 51년, 안평(安平)에 소 만한 크기의 괴물이 나타났다. 몸 길이는 5,6척, 몸에는 털이 났고, 두 귀는 대나무 쪼가리 같았다. 송곳니가 날카로웠다. 가죽은 물소 같았고, 광택이 나는게 수달과 비슷했다... 건륭 9년 겨울 12월, 담수 백사돈(탐수이 현 바이샤툰 보淡水縣 白沙墩堡)에 낙뢰가 있었다. 커다란 물고기 22마리가 죽어서 모래사장에 밀려왔다. 그 형상이 머리는 돼지 같고, 물고기 몸통에 새우 꼬리였다. 몸길이는 한 장 남짓이었다. 눈은 관자놀이 밑에 있었다. 입을 열면 4척, 배 둘레는 2장, 꼬리 길이는 7척, 색깔은 검고, 울음소리는 소와 같았다..."

그런데 저는 이걸 번역할 때부터 저건 듀공을 묘사한 기록이 아닌거 같은데...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원서를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제일 좋겠죠.

이 "대만풍속지"가 출판된 년도는 1921년, 그러니까 조선도 대만도 일본의 식민지였던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면 대만풍속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디지털로요! (뭔가 이상한 결론이지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원문을 찬찬히 읽어봅시다.


대만풍속지 제7집

제1장 대만인의 괴담기화(怪談奇話)

제 1절 괴이(怪異)

강희 19년 5월 팽호(澎湖)에 동물(物)이 있었다. 그 형상은 악어(鰐魚)와 같았다. 육지에 올라서 죽었다. 그 달에 큰물(大水)이 일어 전원을 침수(沖陷)시켰다. 같은 해 6월 수사제독(水師提督) 시랑(施琅)이 군을 이끌고 팽호(澎湖)를 탈환하였다. 같은 달 26일 밤,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천둥 같았다. 8월 녹이문(鹿耳門)에 물이 불어 육지를 침범하여 피해가 몹시 컸다. 동시에 정성공(鄭成功)의 후예 정극상(鄭克爽)이 죽었다. 겨울 11월에 눈과 얼음이 굳기를 1촌 남짓 되었다고 한다. 

강희 48년 여름, 녹이문(鹿耳門)에서 큰 물고기(大魚)를 포획하였다. 형상은 말을 닮았고, 등에 갈기(鬃)가 있었다. 몸길이(長)는 3, 4장. 그 꼬리는 사자(獅)와 같았다. 배 밑에 네 개의 갈기(鬐)가 있어, 마치 네 다리(足)와 같았다고 한다. 

강희 51년 안평(安平)에 동물(物)이 있었다. 크기는 소와 같고, 키(高)는 5, 6척 돼지 같다. 긴 수염(鬚)이 있고 양쪽 귀는 대나무 깎은 것(竹批) 같았다. 이빨(齒牙)은 단단하고 날카롭고, 가죽은 물소(水牛)의 털과 같이 되어 광택 있기가 수달(獺)과 닮았다. 네 다리는 거북이(龜) 같았고 꼬리가 있었다. 토인(土人)이 다투어 그것을 포박하고 몽둥이로 때리니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사람 모두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고, 또한 그 이름을 아는 자가 없었다.

건륭 9년 겨울 12월, 탐수이(淡水) 바이샤툰(白沙墩)에 낙뢰가 있었다. 큰 물고기(巨魚) 22마리가 모래사장 위에서 죽었다. 그 형상은 머리는 돼지를 닮았고 물고기의 몸통에 새우 꼬리였다. 머리(頭)는 길이가 한 장 남짓. 눈은 관자놀이(頷) 밑에 있었고 입 벌린 크기(濶)는 4척, 배 둘레는 2장, 꼬리 길이는 7척이다. 색은 검고, 울음소리는 소와 같았다. 

건륭 17년 7월, 큰 바람(大風)이 물을 몰고 왔는데, 속담(俗)에는 이것을 기린구(麒麟颶)라고 부른다. 초목이 모두 고사하였고, 가옥과 묘사(廟祠)의 문주(門柱)가 남김없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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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글씨로 처리하고 밑줄을 그은 부분은 대만의 "엇갈린 시작" 포스팅에서 인용하지 않고 생략한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이 동물들이 다리가 달려있었다는 부분만 골라서 생략한게 아닌가 싶군요.

음... 그야 다리가 달렸으면 듀공이 아닐테니까요;;

그런데 생략된 묘사까지 종합해서 판단해보자면, 이 동물들은 듀공이 아니라 "북방물개"가 거의 확실합니다. (다만, 강희 48년에 목격된 동물은 “큰바다사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북방물개는 털 색깔이 검고, 수컷은 갈기가 난다. 
북방물개와 거의 같은 서식지를 공유하는 큰바다사자 수컷도 갈기가 난다. 

우선 강희 48년에 잡힌 동물은 (말이나 사자 같은) 갈기가 있었고, 네 다리가 갈기처럼 흐물흐물하게 생겼습니다. 이건 북방물개 수컷일 수도 있고, 큰바다사자 수컷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베링 해협과 오호츠크해가 주 서식지인 녀석들이 대만까지 내려온 셈이 됩니다.

한편, 강희 51년의 동물은 뾰족한 귀가 달렸고, 색깔이 검은 색이었다고 하는데, 바다사자와 물개 만이 바깥에 귀가 있습니다. 물범과 바다코끼리는 귓구멍만 있죠.

그렇다면 여기도 바다사자와 물개 둘 중 하나인데, 바다사자는 검은 색이 아니라는 것.


▲ 며칠 전, 동해 바닷가에서 구조된 북방물개. (플레이버튼 왼쪽으로 귀가 삐쭉.)

▲ 북방 바다사자. 귀는 있지만 검은 색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건륭 9년의 22마리 역시 검은 색이라는군요.ㅎㅎㅎ

그러니 위에서 언급된 동물들은 (녹이문에서 발견된 녀석은 바다사자일 가능성도 있지만) 북방물개로 확정지을 수 있습니다. 바다사자와 다르게 물개는 검은색 털을 갖고있는 점에서 확정지을 수 있습니다.
바다사자와 물개를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이 털색깔입니다.

그렇다면 1698년 오키나와 주변 섬을 찾아온 이 뇨옹~의 정체도 이제 쉽게 판단할 수 있겠군요! 몸통이 검은 소를 닮았다고 하니까 말이죠.

반면, 유구국과 대만을 찾아온 이 동물들이 일본바다사자(독도 인근 동해바다에 서식하던 강치)이거나 백령도의 점박이 물범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강치와 점박이 물범은 색깔도 검은색이 아닐 뿐더러, 강치와 물범은 갈기가 없고, 물범은 밖으로 튀어나온 귀가 없이 귓구멍만 있기 때문입니다.

▲ 백령도 인근에 서식하는 점박이 물범. 귀는 구멍 뿐이다.

강희 19년(1680), 1698년, 강희 51년(1712), 건륭 9년 (1744).
북방물개/큰바다사자가 대만과 오키나와 인근 섬까지 찾아온 해입니다.

아무래도 소빙기가 극심했던 17, 18세기의 차가운 해류를 따라 내려왔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물개가 역사 기록에 남은 것이 단지 이상 기후현상 때문만은 아닐거라는 걸 눈치빠른 독자분들은 이미 파악하셨겠죠?^^

이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To be continued...

▲ 북방 물개의 서식지. 짙은 파란색은 번식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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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때" 악어가 나타났나? [특집]양자 악어 이야기



왜 "그 때" 악어가 나타났나?


켈리 교수님은 "악어와 전근대 베트남사의 침몰" 포스팅에서 벤 키어넌 교수님의 저서, 베트남 통사(Việt Nam: A History from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2017)의 내용을 비판합니다. 키어넌은 1282년 원전(阮詮, 응우옌 투옌)이 악어를 쫓아내기 위해 쓴 문장이 최초의 쯔놈 문학이라고 주장하는데, 사료를 읽어보면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는 이 사건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인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때[1282] 악어가 있어 로강(瀘江)에 이르렀다. 임금()께서 명을 내리시길 형부상서 원전(阮詮)에게 글을 지어 강에 던지게 하니 악어가 절로 물러갔다."
(時 有鱷魚至瀘江 帝命 刑部尙書 阮詮 爲文投之江中 鱷魚自去)

"임금께서는 이 일을 한유(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여기시고 성()을 하사하시어 (원전의 이름은) 한전()이 되었다."
(帝 以基事 類韓愈 賜姓 韓詮)

"(원전은) 또한 국어로 부(賦)와 시()를 짓는데 능했는데, 우리나라 부와 시에 국어를 많이 쓰게 된 것은 참으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又能國語賦詩 我國賦詩 多用國語 實自此始)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첫번째 점은 악어에게 글을 바쳤다는 것과 응우옌 투옌이 베트남 구어(口語)로 시를 지었다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악어에게 쓴 글이 베트남 구어로 작성되었다고 밝히고 있지 않다.

네, "악어에게 쓴 글이 국어로 된 글이었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굳이 원전이 국어로 글을 짓는데 능했으며 그로부터 국어 문학이 유행했다는 TMI를 늘어놓는걸까요? 오히려 악어 글도 국어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의 범위 아닐지...


그래도 엄밀하게 대월사기전서 기사만 글자그대로 보고 이해하자면, 악어 글 = 쯔놈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어쩌면 20세기 중엽에 즈엉 꽝 함이 말했듯이 원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지도요...

"악어를 내쫓기 위해 던진 문서에 대해서, 역사서는 이 문서가 어떤 양식으로 쓰였으며 한문(漢文)으로 쓰였는지 월문(越文)으로 쓰였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서가 놈(nôm, 喃)으로 쓴 제문(祭文)이었다는 통상적인 의견 같은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원문을 찾아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나, 현재로서는 그 어느 곳의 그 어떤 책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제가 관심있는 부분은 쯔놈 문학이 언제 어디서 시작하였는지 하는 부분은 아닙니다.^^ 저는 사실 왜 "그 때" 악어가 로강(瀘江)에 나타났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 때 악어가 있어 로강(瀘江)에 이르렀다. 임금께서 명을 내리시길 형부상서 원전(阮詮)에게 글을 지어 강에 던지게 하니 악어가 절로 물러갔다."
(時有鱷魚、至瀘江。帝命、刑部尙書阮詮、爲文、投之江中、鱷魚自去。)

이 "때"라는 것은 도대체 언제를 말하는걸까요?

사실 대월사기전서에는 추가적인 맥락이 나와있습니다.


"가을 8월, 량강(諒江)의 수신(守臣), 량울(梁蔚)이 통역하여(?) 보고하였다. 원(元)나라의 우승상 소게테이(唆都)가 병사 50만을 거느리고 나타나 소리내어 말하길, 길을 빌려 참파를 정복하겠다(假道征占城)고 하였다. 실은 (우리를) 침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악어가 있어 로강(瀘江)에 이르렀다. 임금께서 명을 내리시길 형부상서 원전(阮詮)에게 글을 지어 강에 던지게 하니 악어가 절로 물러갔다."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맥락이 이해가 되지요.

쩐 왕조는 원나라의 침략을 받을 위기에 놓여있는 상황이었고, 마침 나타난 이질적인 동물들은 "외세 침략"을 형상화하기에 좋은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글을 써서 악어를 퇴치함으로써 몽골의 침략 또한 (문명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높이고 싶었겠죠.

켈리 교수님도 말씀하셨듯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문예적인 (그리고 중화적인) 접근 방법을 통한 문제 해결"인 것입니다.

아니면, 15세기에 대월사기전서를 편찬한 오사련(吳士連)이 보기에 이 두가지 사건은 충분히 역사적 중요성/연관성이 있었습니다. 악어를 물리친 행위는 원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것과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19세기가 되자 이러한 시각은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졌습니다.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을 보면, 같은 악어 사건을 다룬 기사에 당시의 황제 사덕제(嗣德帝)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놓았지요.


황제께서 비평하시길,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호기심으로 망령히 첨부하였다."


식민지 버마의 동물史를 연구하시는 조나단 사하 교수님은 블로그 포스팅에서 "야생에서 생활해야 하는 생명체가 '길들여진' 공간에 침입"하면 "이런 경우에 종종 동물이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중세 베트남의 악어가 바로 이런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악어가 길들여진 공간에 침입했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사하 교수님은 동물의 비정상적인 행동이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동과 함께 언급될 수 있을 때 역사 기록에 남기도 한다고 합니다.

"들소는, 승려와 마찬가지로, 침입자였다. 그의 행동은 동족의 정상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역사 속에서 집짐승이 아닌 동물을 개별 개체로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데, 이처럼 때때로 시야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으로부터 정명가도()를 요구받기 전에 이상한 동물이 안 나타나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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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몽골의 베트남 침공에 대해서는 몽고학 개론 1강2강을 보자.




뇨옹~ 의 정체를 찾아서... 그 나라의 이름은, 유리구슬

여태껏 우에자토 선생님의 느릿느릿 유구사 만화를 주로 번역했는데요. 사실 블로그의 내용을 만화로 풀어내신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글은 제가 전에 번역한 적이 있는 33화의 뇨옹~에 대한 글입니다. (진냥 님이 좋아하셨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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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카시키 섬의 공룡!?

사료를 뒤적이다보면, 종종 불가사의한 사건의 기술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유구 왕국의 정사(正史) 역사서 "구양(球陽)"을 보면, 1698년 토카시키 섬(渡嘉敷島) 앞바다에서 "이상한 짐승(異獸)"이 목격된 괴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따르면, 토카시마 섬의 해변을 순찰하던 관리(役人)들이 부근의 쿠로시마(黒島)의 바다에서 갑자기 출현한 산호초 끄트머리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상한 형체의 동물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동물의 몸은 검은 소와 비슷하고, 얼굴과 눈, 귀는 돼지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4개의 다리에는 물갈퀴가 달렸고, 눈썹과 수염은 희고, 곧게 뻗은 꼬리는 약 30센티, 굵기는 10센티. 우는 소리는 소를 닮았고, 웅린 모습은 개를 닮았습니다. 놀란 관리들은 마을에 알리러 가고, 다음날 많은 마을 사람들이 현장을 찾아가지만, 이미 괴생물은 모습을 감춘 뒤였습니다.

게루마(慶留間) 제도 근해에는 고래가 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신체적 특징을 보면 고래는 확실히 아닙니다. 듀공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 적이 없는 신종 생물인걸까요? 설마 절멸하지 않고 살아남은 공룡의 일종이라던가? 네시나 예티(설인)과 같은 UMA(미확인생물)인걸까요!? (뭐라고...)

라고, 순간 생각했습니다만, 이것저것 생각해 본 결과, 가능성이 높은 것은 물범이나 바다사자의 종류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2년 도쿄의 타마가와(多摩川) 하천에 나타나, 전 일본을 떠들석하게 만든 턱수염물범(Erignathus barbatus) 타마 쨩을 기억하실지요? 토카시키 섬의 "이상한 짐승(異獸)"은 말하자면 타마 쨩의 유구국 버전이었고, 지금이라면 "토카 쨩"이라고도 불리면서 관광객이 쇄도할 법한 지역 명물이 되었을까요?

당시의 기후 한랭화와 관련되어, 이 "이상한 짐승(異數)"를 북방물개라고 추측는 설도 있지만, 바다사자일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일본연안는 일본바다사자(강치)가 1년 내내 서식했습니다. (여기 참조) 이 종은 1975년에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로 사라져, 절멸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300년 전에는 상당히 개체수가 많았을 일본바다사자가 드물게 오키나와에 회유(回游)[1]해왔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1581년에도 나고(名護)의 쿠시(久志) 부근에서 바다표범(물범) 같이 보이는 목격 사례가 있습니다만, 오키나와 주변 해역은 바다사자나 바다표범의 주요 서식지가 아니라, 오키나와에서 확인된 사례가 있는지, 추가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러분도 오키나와 바다에서 수영만 할 것이 아니라, 수면을 바라보다보면 혹시 이상한 생물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참고문헌: 『球陽』、北村伸治「沖縄の雪の古記録、沖縄近海の異獣古記録」(『沖縄技術ノート』4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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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고기와 같은 수중 생물체가 자신의 본래 서식지가 아닌 먼 곳까지 해류나 태풍 등으로 인해 떠밀려 오는 현상을 일본어로 "회유(回游)"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죽는 경우는 사멸회유(死滅回游)라고 하는데, 치어(새끼 물고기)나 알의 상태로 떠밀려오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생물이 번식해서 자손을 멀리 퍼뜨리는 "확산" 개념을 이용해 "무효확산(無效擴散)"이고도 부른다. 

반면 육지동물이 떠밀려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나무 조각 등에 올라타서 왔을 것이라고 보아, 표류 사건(rafting event)이라고 한다. 종이 유효하게 확산해서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는 것이 아닌 단발적인 사건으로 일어났을 때 일컫는 표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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