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뇌피셜과 갈리아 전기 번역 시리-즈

고대 영국인이 "대청"이라는 식물의 염료로 몸을 염색했다고 알고 계신 분들이 더러 보이더군요.
(예컨대 YOKL님의 사실에 약간 근거를 둔 내멋대로 켈트족 포스팅.)

그런데 고고학계와 최근 역사학계에선 이 "대청 염료설"에 회의적인가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레시피 프로젝트 합동 블로그에서 읽은 게시물을 번역해 소개합니다. 


필자 소개

조디 리브스 아이어(Jodi Reeves Eyre)는 엑세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아리조나 주립대학에서 CLIR/DLF 데이터 큐레이션 펠로우로 있었다. (2013-2015). 조디는 또한 연구, 편집, 디지털 큐레이션 컨설팅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Eyre & Israel, LLC사의 공동창립자다. 그녀는 문화유산 보존을 돕고 과거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기억을 탐구하고 있다. 다른 고고학자들과 함께 인류학 연구를 했으며, 고대 그리스 베틀 모형으로 베를 짜보았고, 인체를 파란색으로 칠해본 경력이 있다.

트위터: @thejodiree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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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느덧 뇌피셜(post-truth)의 시대에 살고 있다. 결정을 내리거나 입장을 정하는데 대안적 팩트가 "팩트팩트"만큼이나 영향력을 갖는 시대인 것이다. "대안적 팩트"라는 개념은 팩트 대신 감정적이거나 치우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역사적인 전례가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Al the Briton doe dye themselues wvth woade, which setteth a blewish color vppon them: and it maketh the more terryble to beholde in battell.
현대어역: All the Britons do dye themselves with woad, which sets a bluish color upon them: and it makes (them all) the more terrible to behold in battle.

"모든 브리톤 사람은 대청으로 몸을 물들이는데, 이로써 몸이 푸른 빛을 띤다. 그리고 이는 브리톤인을 전장에서 더욱 무시무시하게 보이게 한다."[1]

대청이 그토록 흔하게 쓰였다면 대청을 사용했다는 그럴싸한 고고학적 근거가 있을 법하다. 대청이 발견된 것은 드래건바이(Dragonby)의 철기시대 유적 한 곳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대청이 씨와 껍데기 형태로 발굴되었는데, 철기시대 후기의 구덩이(pit)의 침수된 유물군(waterlogged assemblage)의 일부였다. 이 구덩이를 판 정확한 목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씨앗과 껍데기는 대청 식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이유가 염료 때문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상 근거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염색에 필요한 재료인 대청 잎은 씨앗이나 껍데기만큼 잘 남아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대청 이파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드래건바이에서 대청 식물이 염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간접 증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이사르는 자신을 실력있는 군인으로 보이게 하고 승리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로마인이 갖고있던 사나운 야만인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푸른색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부정적인 색감을 갖고 있었다.
유령, 죽음, 그리고 보다 더 끔찍한 야만인과 연관짓는 색이었다. '푸른' 브리톤인이라는 편견이 담긴 묘사를 포함시킴으로써 카이사르는 풍속학적 서술 이상을 한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선입견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했다. 그러나 이 편견 담긴 묘사가 사회적 기억과 정체성에 끼칠 유구한 영향을 카이사르가 의도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늘날에도 고대 브리톤 사람이 푸른 칠을 한 채로 묘사되는 것은 흔하다. 제한된 식물-고고학적 근거와 가능한 증거가 여기에 상반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푸르게 색칠한 전사의 이미지는 20세기 초부터 흔히 찾을 수 있다. 일례로는 "고대 브리톤인의 국가(National Anthem of Ancient Britons)[2]가 있고, 또다른 예로는 영화 브레이브하트[3]의 시대착오적인 묘사가 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묘사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전통적으로 그래왔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카이사르의 갈리아전기의 1565년 영역본은 vitrum이라는 라틴어를 대청(woade, 학명: Isatis tinctoria)이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은 아서 굴딩(Arthur Goulding)이 한 것인데, 내가 찾아낸 가장 이른 사례다. 질리언 카(Gillian Carr)와 몇몇 다른 번역가는 "유약을 발라 몸을 염색했다" 혹은 "유리로 물들이다" 등의 다른 번역안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vitrum이 이 맥락에서 대청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청은 중세시기에 몇몇 영국 수도원이 재배하던 중요한 작물이었고 16,17세기에는 영국의 핵심작물이었다. (국내 시장을) 잠식하는 외래 상품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자랑스러운 "토종" 대안 상품의 문화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만큼 좋은게 또 있을까? Vitrum을 대청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브리톤인이 대청으로 몸을 치장했다는) 서사를 형성하는데 역사적인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심지어 카이사르는 자기자신을 둘러싼 서사를 형성하는데조차 독점권을 주장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영국에서 대청을 사용했다는 근거가 한정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vitrum을 대청이라고 번역한 역사적 흐름을 설명할
이유에 뒷받침할만한 근거도 한정되어있다.
[4]

오역의 위험과 고고학적, 문헌적, 회화적 근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진짜 대청으로 몸을 칠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관심을 갖는다. 

제조법이나 재현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이상, (대청을 이용한) 실험은 주로 다른 염료의 제조법과 다른 조건과 상황 하에서 과거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달려있다. 대청이 염료라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또한 피부에 칠할 수 있으며, 착색제에 대청을 넣어서 염료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고있다. 몇몇 실험은 대청이 우리가 인식하는 대청의 색깔과 용도에 비해, 신체를 염색하거나 문신하거나 물들이는 식으로 치장하기에는 나쁜 선택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연구 결과를 재현하고 싶거나, 자체적으로 연구를 하고 싶다고? 카(Carr)는 자신의 실험을 설명한 논문을 냈고, 내가 시도한 방법론과 제조법은 아래 주석에 링크를 걸어놓았다.[5] 대청과 다른 염료를 이용해서 피부를 파랗게 칠하거나 염색해본 다음 효과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라.[6]

연구와 실험 결과를 공유하는 것은 근거의 비판적인 활요을 통해 (파란 브리톤인 같은) 잠재적인 대안팩트의 유행을 막는 한 방법이다. 제조법이나 물질적인 유물의 부재는 (재현에) 어려움을 주지만, 다른 재료와 방법의 탐색을 부추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혼란스럽고 지저분하다고도 할 수 있는 영국 대청의 역사도, 카이사르 저작의 번역사를 탐구할 기회일뿐만 아니라 정체성과 사회적 기억이 어떻게 식물과 인간의 관계에 반영되는지 탐구할 기회이기도 하다. 동시에 대청의 활용법(혹은 잘못 활용하는 법)을 탐구할 수 있는 흥미로운 맥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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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aesar, Julius. The Eyght Bookes of Caius Iulius Cæsar Conteyning His Martiall Exploytes in the Realme of Gallia and the Countries Bordering Vppon the Same Translated Oute of Latin into English by Arthur Goldinge G. (London: Willyam Seres, 1565), http://quod.lib.umich.edu/e/eebo/A17521.0001.001?view=toc, Book V.

[2] 영국 보이스카우트 초창기 (1920년대)에 불리던 국뽕 노래. (아래는 가사 중 일부)

Romans keep your armours;
Saxons your pyjamas:
Hairy coats were meant for goats,
Gorillas, yaks, retriever dogs and llamas.
Tramp up Snowdon with our woad on:
Never mind if we get rained or blowed on.
로마인들이여, 갑옷을 그대로 입어라
색슨인들은 파자마를 그대로 입어라
털가죽은 염소랑,
고릴라 야크 리트리버 라마를 위한 것
우리는 대청을 바른채 스노우던 산(웨일즈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올라
비가 오건 바람 불건 상관이 없어

보이스카우트도 시작은 삼족오 유겐트였던 것이다;;

[3] 

[4] 이 문단은 말이 좀 어려우니까 다시 설명하자면,

브리톤인이 대청으로 몸을 치장했다는 서사를 만들어낸건 카이사르 혼자의 작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당대 로마인들과 후대 사람들이 끊임없이 같은 서사를 재생산했다.) 심지어 카이사르를 둘러싼 영웅서사도 카이사르 본인이 갈리아전기에 쓴 자기자랑 뿐만아니라, 동시대/후대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재생산한 것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영국에서 대청으로 몸을 염색했다는 근거가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vitrum을 대청이라고 번역한 것이 영국인들의 신토불이 운동이었다고 주장(필자의 주장)할 근거도 사실 적다.

[5] 조디 리브스 본인의 석사논문(pp. 31-53)

[6] 근대 과학적 사고의 시작은 "지식을 얻는 가장 믿을만한 방법은 고대 텍스트가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스스로 찾는 것"이라는 생각. (self_fish님의 루터의 유산: 종교 반란은 과학을 탄생시켰을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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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주석은 원래 영문 게시글과 다르게 제가 직접 역주 위주로 작성했습니다. 


[네덜란드 풍설서] 항해 전에 바타비아에서 미리 써서 갔을까? 松方冬子의 네덜란드 풍설서

지난 포스팅 [네덜란드 풍설서] 에도 막부가 보고받은 프랑스 혁명 中 생략된 제 1장의 내용을 번역합니다. (본문 중 ©참조)

이듬해 1794년의 풍설서는, 제1장에서 소개했듯이 "하나, 작년 말씀드린 프랑스국 전쟁은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으니, (후략)"라고 되어 있는데, 혁명보다는 프랑스 주변 여러 나라와의 전쟁을 주로 삼은 서술 방식이다. 1794년에 프랑스 혁명군의 침공을 받은 네덜란드로서는, 혁명보다도 전쟁 쪽이 중대한 관심사였다.

제1장에서 마츠카타 후유코 선생님은 네덜란드 풍설서를 둘러싼 논의에 대한 의견을 밝힙니다. 미리 바타비아에서 원본을 작성해서 나가사키로 가져가 번역만 하는 것인지, 나가사키에 가서 새로 작성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죠. 
빨간 색으로 표시한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마츠카타 선생님은 이 "원본 존재 유무" 논란에서 "원본은 없다"고 주장하시는 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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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설서의 초고본

대대로 네덜란드 통사(通詞, 역관)을 맡은 모토키(本木)가문[1] 에는 모토키난문(本木蘭文)이라고 통칭되는 한 무리의 문서가전래되어 내려온다(나가사키 역사문화 박물관 소장). 그 책자 중 하나에 "올 토끼 해 풍설을 올린 서양글(当卯年風説申上候横文字)"라는 부전(付箋)이 붙은 네덜란드어 문서가 들어있다. 
이 문서는 1795<칸세이(寛政) 7, 묘(卯)>년에 네덜란드선이 가져온 정보라고 인정되고 있다. 붓과 먹으로 썼고 네덜란드어 문법상의 오류가 곳곳에 보이기 때문에 통사가 쓴 글일 것이다. 

디트마르 스미트(Ditmar Smith) 선장이 지휘하는 동인도회사의 선박 웨스트카펠레(Westkapelle)[2]가 바타비아에서 가져온 소식
〔①〕작년 일본에서 출범한 엘프프린스(Elfprins)[3] 호는 1795년 1월 1일<칸세이(寛政) 6년 윤11월 11일>바타비아에 도착했다.
〔②〕이 배 웨스트카펠레 호는 1795년 6월 13일<寛政7년 4월 26일>에 바타비아에서 출범했다.
〔③〕윌렘 알팅(Willem Alting) 총독은 동인도 총독부의 다른 여러 고관(高官)과 마찬가지로 건강하다.
〔④〕러시아인은 터키나 그 밖의 여러 나라와 평화를 지키고 있다. 
〔⑤〕프랑스인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전쟁상태다.
〔⑥〕티칭 각하는 황제폐하(건륭제)께 대사(大使)로 부임해 중국에서 특별한 후대를 받았다.
〔⑦〕선장 슈미트는 일본으로 항해하던 도중 중국의 정크선을 전혀 목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타비아에서 일본까지 오다가 중국으로 향하는 정크선 한 척을 만나 호송했다. 


말미에 있어야할 날짜 따위가 빠져있기 때문에, 이 사료가 정식으로 제출된 문서의 사본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초고본이라기보다는 번역의 준비를 위한 문서였을 것이다. 원래부터 7개조였다고 생각한다. ⑦의, 일본으로 항해하는 도중에 정크선을 목격했는지 여부는 "통상적인" 풍설서의 말미에 쓰는 것이 통례(通例)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항해도중에 정크선을 만났는지 여부는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는 알 수 없다. 이것도 "통상적인" 풍설서가 나가사키에서 작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근거의 한 가지다. 참고로 정크선이란 일본인이 당선(唐船)이라고 부르던 배를 말한다. 17세기에는 샴(태국) 왕실이 마련한 정크선도 있었지만, 주로 화교 자본의 무역선이다. 출항지는, 18세기 전반까지는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 걸친 넓은 해역을 아우렀지만, 18세기 중반부터는 중국(특히 장강長江 하류의 사포乍浦)에 한정되다시피 한다.
그렇다면, 같은 해에 작성된 일본어(和文) 풍설서와 대조해보자. 상당히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풍설서
〔ⓐ〕하나, 올해 내조한 아란타(阿蘭陀) 선 한 척, 4월 20일 교류파(口+留吧)를 출항하여, 해상에서는 별일없이, 오늘 이 땅(에) 정박(着岸)했습니다. 그 밖에 함께 온 배(類船)는 없습니다.
〔ⓑ〕하나, 작년 이 땅에서 귀항한 배가 윤11월 11일 해상에서 지체 없이 교류파(口+留吧)에 도착했습니다.
〔©〕하나, 작년 말씀 올린 프랑스국 전쟁은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기에, 인도 주변 여러 상관(商館)에 파견되었던 역인들(役々之者共)이 지금으로써는 그대로 갇혀있다고 합니다.
〔ⓓ〕하나, 이 번에 바다에서 당선(唐船)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밖에는 변함이 없고 풍설이 없습니다.
카피탄
게이스베루토 헴미이[4]
위의 내용은 선장(船頭) 아란타인이 입으로 말하고, 카피탄이 삼가 전해 드립니다. 일역(和解)하여 올려드립니다. 이상.
통사 메츠케(通詞目付)
토끼 해 6월 6일 (卯六月六日) 
통사(通詞)
(『和蘭風説書集成』)

막부에 제출한 일본어 풍설서(和文風説書)는 4개 조항 밖에 없다. ③, ④, ⑥은 채용되지 않은 것이다.
남은 부분을 보도록 하자. 초고본의 ②가 일본어본의 ⓐ에, ①이 ⓑ에 해당한다. 다만, 바타비아 출범의 날짜는 4월 26일이 아니고 20일로 되어 있어, 날짜계산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현재의 자카르타는  원래 카라파라고 불렸다. 훗날 자카르타라고 개명되고, 거기서 또 네덜란드인이 점령하여 바타비아라고 개명된다. 일본인은 이 마을을 에도시대 동안 카라파(口+留), 또는 쟈카토라, 쟈가타라(ジャカトラ, ジャガタラ, 자야카르타의 와전)이라고 불렀다.
⑤는 일본어의 🄫에 해당한다. 그러나 ⑤의 내용에 더해서 인도의 여러 상관(商館)에 부임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직원들은 아직 그곳에 갇혀있다고 쓰여있는 점이 주목된다. ⑦은 앞부분만 채용되어, ⓓ의 이번에는 해상에서 당선唐船)을 보지 못했습니다라는 표현이 되었다. ⑦의 후반은 삭제되어, 그 밖의 특별한 풍설은 없습니다, 라는 말로 바뀌었다.
풍설서가 날짜와 서명이 있는 정식의 네덜란드어 원문이 배에 실려(舶載) 와서, 그것을 번역한 종류의 문서라면 이 만큼 커다란 차이가 생겨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삭제된 조항을 포함해, 내용의 가감 및 수정(加除修正)은 통사(通詞) 혹은 나가사키 부교(奉行)의 판단으로 실행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알기 어렵다. 특히 ⑥은、네덜란드가 중국 황제에게 약 100년 만에 정식 사절을 보냈다는 중요한 기사인데, 어째서 번역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전에 일본에서 상관장을 맡았던 이삭 티칭(1744-1812)[5]이 사절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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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너스 시리즈 중 가장 최근 포스팅에서도 타이먼 스크리치가 "유서깊은 통역사 집안"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죠?

마츠라 세이잔은 유서깊은 통역사 집안의 후예 모토키 료에이에게 접촉해서, 사리스 항해기 중 관련부분을 일본어로 번역하도록 명했다. 번역을 위해  모은 부분 중에는  클로브(Clove)호의 도래와 비너스(와 큐피드) 그림 감상에 대한 중요한 발췌문도 있었다. 료에이는 '비너스와 큐피드'라는 그림의 주제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소리나는 대로 음차를 하기로 했지만 이야기의 얼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퍼채스를 따라서 료에이도 주어를 삼인칭으로 옮겼다. 료에이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사리스는 여인 몇 명을 선실 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했다. 선실 안에는 헤에니유스키피도우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적나라하게 연출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어루고 있는 그림이었다. 여인들은 그림 앞에서 몸을 낮추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Venus en Kupido라는 네덜란드어에서 이미 당황한 료에이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지칭하는데 쓰인 약어: O. L. V. met haaren Zoon (우리 사랑받으시는 성모님과 그 아들) 앞에서는 두 손 들 수 밖에 없었다. 마츠라 세이잔의 명예를 생각해서였을까? 착각을 한 여인들이 다름 아닌 마츠라 다이묘의 여자들이라는 내용을 잘라냈다. 또한 료에이는 당시 금지되어 있던 기독교에 대한 언급을 삼갔다. 또한 료에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여인] 대부분은 불교신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몇 명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라고 추가했다.

Timon Screech의 "Pictures (The Most Part Bawdy)": The Anglo-Japanese Painting Trade in the Early 1600s. 
The Art Bulletin  Vol. 87, No. 1 (2005년 3월호), 54 페이지.

[2] 디트마르 스미트 선장이 지휘한 웨스트카펠레 호 뿐만 아니라 동인도회사의 모든 선박은 VOC 사이트에서 조회할 수 있다. 네덜란드 놈들...ㅂㄷㅂㄷ

[3]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뜻이 맞다.

[4] 게이... 스베루...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니다.

[5] 이삭 티칭에 대해서는, 적륜 님의 
를 참조.

또, 타치바나 난케이의 서유기 中 84. 기기 (네덜란드)에 언급된 이사아테츠신키(イサアテツシンキ)와 동일인물.

[네덜란드 풍설서] 에도 막부가 보고받은 프랑스 혁명 松方冬子의 네덜란드 풍설서

일본 근세 사학자 마츠카타 후유코(松方冬子)의 저서, オランダ風説書 중 일부를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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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프랑스 대혁명의 정보

프랑스 대혁명이 최초로 언급되는 것은 1794년이다. 같은 해의 풍설서에서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フランス国臣下之者共徒党仕、国王並王子を弑し国中乱妨におよび申候に付、阿蘭陀国其外近国よりも同所え押寄及合戦申候段、申越候に付、カラバ表よりも軍船等差越申候、
"프랑스국 신하들이 도당(徒党)[1]을 세워, 국왕과 왕자를 시해하니 온 나라에 난리(乱妨)가 미쳤다고 하였기에, 네덜란드국과 그 밖의 가까운 나라들도 프랑스(同所)를 침공하여 전쟁을 벌인 소식은, 전달받았으니、카라파[2]에서도 군선 등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和蘭風説書集成』)

일반적으로, 머나먼 유럽의 소식이더라도 1년 후에는 풍설서에 언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의 보고는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에서 5년 가까이 걸렸다. 이 점을 강조하는 연구도 있다. 다만 글의 내용을 보면, "국왕과 왕자를 시해"라는 부분에 주안점이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것은 1793년이었는데, 네덜란드인도 그때까지는 보고할 만한 대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근대적인 의미의 "혁명"이라는 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일어난 일의 의미 같은 것을 충분히 파악했을리도 없기 때문이다.

이듬해 1794년의 풍설서는, 제1장에서 소개했듯이 "하나, 작년 말씀드린 프랑스국 전쟁은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으니, (후략)"[3]라고 되어 있는데, 혁명보다는 프랑스 주변 여러 나라와의 전쟁을 주로 삼은 서술 방식이다. 1794년에 프랑스 혁명군의 침공을 받은 네덜란드로서는, 혁명보다도 전쟁 쪽이 중대한 관심사였다.

1796년에는 네덜란드 선이 내항하지 않아서, 풍설서는 없다. 현존하는 유일한 정본(正本)이 있는 1797년의 풍설서는 다음과 같다.

一、フランス国臣下之者共徒党仕、国王並王子を弑し国中乱妨におよひ候に付阿蘭陀国其外近国よりも同所え押寄及合戦申候段、去る寅年申上候末、臣下逆徒之者共追討仕、王孫之内国主に相立、旧臣之者守護仕、国中漸平和に相成候に付、近国和睦仕候、然る処エゲレス国より大軍を発し、阿蘭陀国え押寄合戦におよび候末、阿蘭陀之所領商館之向々え乱入仕、剰弁柄国並コスト之両商館横領仕候に付、弥戦争相募り罷在候、
"하나, 프랑스국 신하들이 도당(徒党)을 세워, 국왕과 왕자를 시해하니 온 나라에 난리(乱妨)가 미쳤기에 네덜란드국과 그 밖의 가까운 나라들도 프랑스(同所)를 침공하여 전쟁을 벌인 소식은, 지난 호랑이 해(寅年, 1794 갑인년)에 말씀올린 바, 신하 역도들을 토벌해, 왕손을 국왕으로 옹립하고, 옛 신하가 수호하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점점 평화로워 지고 있으니, 주변국과도 화목합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대군을 일으켜, 네덜란드국을 침공해 전쟁에 이른 바, 네덜란드 령의 상관(商館)에 각각 난입하여, 벵갈(弁柄)국과 코스트(コスト, 코로만델 해안)의 상관 두 곳을 가로챘으니, 점점 전쟁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和蘭風説書集成』)

앞 부분은 1794년의 풍설서와 대체로 같다. 이 화문(和文, 일본어) 풍설서를 읽으면 이 해까지 왕정복고 운동이 일어났다는 듯이 읽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또, 이 풍설서에는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대군이 향했다고 되어있지만[4], 본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따라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군대가 벵갈과 코로만델 해안(인도 동해안)의 네덜란드 상관을 점령한 것에 중점이 놓여있다고 읽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네덜란드인도 본국이 위기에 처해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12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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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코뱅당...이 아니라 지롱드당?
[2] 자카르타
好交易于遠國。置官於咬口+留吧。通市舶於日本。及諸國。每十歲一度。爲総計勘定。
먼 나라와 무역하기를 좋아하여, 교류파(口+留)에 관(官)을 두고 일본과 그 밖의 여러 나라에 상선을 보내는데, 10년마다 한 번 회계(會計)한다.
교류파는 지금의 자카르타이다. 원래 지역명은 바타비아로 VOC에서 이름 붙이기 이전에는 Suma Calapa였고 여기서 교류파라는 이름이 전해졌다. 10년마다 한번씩 회계를 한다는 것은 실은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 두가지 가능성은 하나는 VOC 자체의 결산이 10년마다 각 지역을 교차연결한 무역거래의 손익으로 처리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고, 두번째 가능성은 10년에 한번 정도씩 나가사키의 상인들과 은을 선대 차입하여 거래하는 것을 정산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3] "一、去年申上候フランス国戦争未平和不仕候に付、〔後略〕"
[4] 이 사료해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阿蘭陀之所領商館은 네덜란드가 소유한 영지(식민지)에 자리잡은 상관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뇌법은 살아있다! 청천벽력! 鬼를 울리는 천둥소리

Not by the Seal of Office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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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傳記) 속의 전설에 따르면, 오도현(吳道顯)이라는 이름의 제자는 온경 원수(元帥) 하수인으로 민현(閩縣, 복건성) 있는 탐탁치 못한 사원을 파괴하라는 지령을 받고 파견되었다고한다.  원수(元帥) 형상이 나타나자 폭풍이 불어 닥쳤고,  한번의 천둥소리에 호응하듯이 파괴 대상인 사원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중략)
여기서의 흥미로운 점은 성황당에서 향을 피우는 것에 따라 일어난 파괴적인 천둥이다향을 태우는 것이 어떻게 우레 같은 불길을 일으킬 수 있을까? 19기 말에 예수회 신부 황 베드로(Pierre Huang)는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 그는 호남성(湖南省)에서 출간한 지방지(地方志, gazetteer)에서, 보다 후대에 쓰인 살수견 일대기를 인용하였다. 그에 의하면, 천둥소리와 화재의 근원은 화약의 사용에서 오는 것임에 틀림없다필자는 이 가설에 뇌법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확신한다."
(Boltz, pp. 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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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이 뇌법맨이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구~


대륙이동설은 1960년대 이후에야 정립된 이론?! 청천벽력! 鬼를 울리는 천둥소리

미국의 환경운동가이자 전 부통령인 앨 고어는 기후변화를 경고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불편한 진실(2006)"에서 6학년 지리 수업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같이 수업을 듣던 친구 하나가 손을 들더니,
남아메리카 대륙 동해안과 아프리카 대륙 서해안을 가리키면서
"혹시 한 덩어리로 붙어있다가 떨어져나간건가요?"라고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라."고 일축했지요.


앨 고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당시는 1961년입니다.
과연 1960년대까지 사람들은 대륙이 이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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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1일~15일 사이에 열린 미국 지구물리학 연합(AGU) 학회에는 총 2만 4000명 가량의 학자들이 모였습니다.
이 학회는 연례 행사기도 하지만 특히 판 구조론 발견 50주년 기념 행사였습니다.

1월 8일 방영된 BBC 라디오 팟캐스트 Discovery(1월 8일 방영분)에서는 60년대 당시 판구조론을 정립해나간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또 그들을 만나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60년대에는 젊은 지질학자였겠지만, 지금은 모두 7,80대시죠.)

당시 지질학자들은 전지구적인 지질학 이론, 즉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비웃곤 했습니다.

린 사이크스(Lynn R. Sykes): "저는 50년대 말에 MIT를 다니는 학부생이었는데,'훌륭한 젊은 과학자는 대륙이동설 같은 요상한 개념을 연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서 공부했어요."

린 사이크스의 주요 분야는 지진(地震) 연구였는데, 1950년대까지만 해도 지진을 측정하는 기기는 일관된 기준을 따르지 않아서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들어서 미국방성은 지진연구에 거금을 투자하기 시작합니다. 
지진의 진앙지와 강도 등을 정밀하게 측정함으로써 핵실험에 의한 인공지진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함이었죠. 미국 외에 다른 국가들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습니다.
어찌 됐든 1963년에 측정기기 보편화 작업이 완료되었고, 이는 지진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새로 나온 좋은 기기로 진앙지를 추적해나가다 보니... 오잉?

마치 해저에 금이 나있는 것처럼 구불거리는 곡선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지질학계가 마주친 우연은 더 있었습니다.

1964년 알래스카에는 강도9의 대지진이 일어나는데, 그 결과 바닷물이 빠졌다가 들어오지 않은 곳도 있고 바닷물이 밀려들어 온 다음 빠지지 않은 부분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까지도 지질학자들은 "뭐, 유체인 물이 움직였겠지 땅이 움직였겠어?"하는 반응이었습니다. 

당시 지질학의 주된 연구방법은 고작 15x15 평방 킬로미터의 영역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는데, 이런 좁은 시야로는 대륙이동같은 건 생각도 할 수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당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서, 제이슨 모건(Jason Morgan)이라는 지질학자는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합니다.
지구의 곡면 상에서 일어나는 판의 움직임을 컴퓨터를 이용해 계산해낸 것이었죠.
단순히 지진 같은 단일 현상이나 땅의 모양을 보고 추론해낸 가설이 아니라, 판의 존재와 이동을 수학적으로 입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건의 발표 당시 지질학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피터 몰나르(Peter Molnar)는 50년 전의 학회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당시 저는 젊었고, 제가 아는 바로는 지질학계의 큰 이름들이 이 모건이라는 인물을 엉터리라고 여긴다는 것 뿐이었어요. 그러니까 엉터리 과학을 한다는 사람이 오전 세션의 마지막 발표를 맡았으니, 이건 제끼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근처에 샌드위치 가게가 있었는데 시간이 빠듯하니 사람 몰리기 전에 빨리 가자, 그러고 발표회장을 나왔어요."

댄 맥켄지(Dan McKenzy)는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모건이 발표할 논문 초록을 제출했는데, 라몬트 연구소가 소유하고 있던 푸에르토리코 지리정보를 도용한 논란에 대해 말할 예정이었어요. 저는 애초에 이 논박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모건이 발표를 시작하기 전에 자리를 떴죠. 그런데 심지어 푸에르토리코 이야기를 안 한거에요. 무슨 판구조론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그리고 이 발표는 그곳에 모인 그 누구의 이목도 끌지 않았어요. 아마 (프랑스 지질학자) 하비에르 르 피숑만 관심을 보였을겁니다."

하비에르 르 피숑(Xavier Le Pichon):

"그날 AGU의 발표 중에 모건의 발표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AGU에 1,000명 정도가 모여있었는데, 모건의 발표 내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천명 중 단 한 명도! 푸에르토리코 논란을 해명해야하는 자리였는데 딴 소리를 하니까, 제가 보기엔 '이 사람 논란거리를 회피하는구나... 한심하군'이라고 생각했죠."


교훈: 학회에 가서 다른 사람의 발표를 경청합시다.


▲어린왕자 中 터키 천문학자의 발표

제이슨 모건의 발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이후 출판된 그의 논문은 많은 이들이 읽고 최신 과학의 발견과 일치하는 이론이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대륙이동설, 판구조론, 지각변동은 모두 1967년 이후에야 정립된 과학적 "사실"인 것입니다.

댄 맥킨지:
"사람들이 제게 판구조론 이전에는 도대체 지각변동이나 지층, 화석 같은 걸 어떻게 설명했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그 사례들이 큰 그림의 일부라는 걸 몰랐어요. 고생물학이 있었고, 암석학이 있었고, 층서학이 있었을 뿐이지. 지구과학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지구가 하는 일은 맞지만,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몰랐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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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저는 처음에 앨 고어의 일화를 들으면서, 학생의 창의적인 질문을 무시하는 고지식한 선생님을 떠올리면서 웃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앨 고어가 펀치라인을 때린 다음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선생님은 당시 정립된 과학적 결론에 근거해서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But you know, the teacher was actually reflecting the conclusion of a scientific establishment of that time."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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