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인도차이나 카테고리의 포스팅 목록 및 순서 (목록화 진행중) 인도차이나 ~Indochine~

제가 하도 자타 블로그에 링크를 정신없게 걸어놓아서, 이런 '읽기 순서'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Matt Matsuda, Empire of Love: Histories of France and the Pacific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chapter 6, “Indochina,” 137-160.

원문 순서.

(원주민 사로잡기, 마음 사로잡기)

(여자는 100-150 프랑입니다. 하지만 향수, 보석 사주는데 돈이 열 배는 더 들겁니다.)

(미래의 배우자를 "알아간다는 것"은 대개 경찰 조사 보고서를 읽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식민지 프랑스인들은, 원주민과 한 지붕 아래서 사는 누이들을 차별했다.)

*149페이지는 식민지 시대의 문학 작품 만을 다뤄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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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loan Hill, "Strangers in a Foreign Land: Vietnamese Soldiers and Workers in France during World War I," in Nhung Tuyet Tran and Anthony Reid, eds., Viet Nam: Borderless Histories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2006)

원문 순서.

(전장에서 미국인의 존재가 베트남인의 사기를 회복시켜주었다)

(남자는 군사재판은 면했지만 "감히 프랑스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15일 간 구금되었다.)

3. To be continued...


(마르세유 항에 도착한 베트남 군인들,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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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Minh Khai Blog 번역 (하와이 대학 Liam Kelley 교수님의 블로그)

원문 순서 (Kelley 교수님 블로그에 게재된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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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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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othy Brook, Mr. Selden's Map of China, (New York: Bloomsbury Press, 2013).


2.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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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가장 대담한 사기극 Superfluous Things (7) 雜同散異 - Superfluous Things

Bruce Rusk 교수님의 "Artifacts of Authentication: People Making Texts Making Things in Ming-Qing China"를 계속해서 번역합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중국 역사상 가장 대담하다고 할 수 있는 위조 사건"의 전말이 드러납니다.(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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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명의 존립은 신성한 유물에 달려있다"
(斯文所在眞有神物)

두 번째 해석은 첫 번째 것 보다 파급력이 있었는데,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던 양신(楊愼, 1488-1559)의 해석이었다. 양신의 풀이는 독창적이었는데, 이내 곧 인쇄되어서 명 제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양신은 열세 글자를 심일과 다르게 읽었다. 그러나 양신에게는 글의 내용보다도 이 유물이 가장 오래된 문자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사례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는 상고시대와의 연결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드문 선물이었다. 양신은 우왕의 비문을 잃어버린 과거를 이어주는 물질적인 연결고리로 기꺼이 받아들였는데, 왜냐하면 이 비문 같은 "신물(神物)이 이 문자/문화(斯文)가 드러날 것인지 감춰질 것인지를 정할 것"이기 때문이다.[1] 양신은 이 비문의 발견을 축하하는 노래(歌)를 짓고는 그 서문에, 이 비문이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언급하였으며, "너무 늦게 태어났다고 슬퍼할 이유가 더 이상 없다"고 결론 지었다. 양신은 이 비문을 이용해 다른 학술적인 분야에서도 무기로 삼았다. 양신은 이미 오랜기간 도학(道學, 성리학)을 교조주의적이고 생각이 닫혀있다며 비판했는데, 도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 주희(朱熹, 1130-1200)도 포함하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양신은 희색이 만면한 채로, 주희가 신우비에 대한 한유의 시를 평하면서 비문이 순전히 허구라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라고 적었다. 주희의 회의주의는 편협한 개인 경험에 기반했을 뿐이라고 양신은 결론지었다. 그는 또 의기양양하게 신우비문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은 다른 유명한 수집가들도 언급했다.

"너무 늦게 태어났다고 슬퍼할 이유가 더 이상 없다"
(不必以生世太晩爲恨也)

[신우비가 송대에 발견된 뒤, 1534년까지 잊혀졌다는] 독특한 역사 덕분에, 이 비문을 둘러싼 논의는 송대의 수집 전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과거의 자료와 선례를 통해 유물을 연구해야할 필요는 줄었지만, 학자들은 이 유물을 어떻게 다뤄야할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모호함은 당대의 석학 왕세정(王世貞, 1526-90)이 취한 입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왕세정은 비문을 우왕이 실제로 쓰지는 않았으리라고 추정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적인 글씨를 볼 때 진나라 이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설령 위조품일지언정 진나라 이전에 만들어진 위조품이라는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우왕의 시대 이후에 등장한 지명 같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을 지적하며 비문이 위조품이라고 단언한데 비해, 다른 이들은 비문을 옹호하기를, 현대어역이 틀렸으며 우왕의 비문은 유물이자 태고적 글씨의 사례로서 가치가 있다고 했다. 게다가 워낙 태고의 글씨인 나머지 이를 현대 글자로 옮기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1565년까지는 그래 보였다. 그러나 위조 전문가 풍방[2]이 그의 출판업자 친구 왕문록[3]에게 가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를 입수했다고 말한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풍방은 류창(劉敞, 1019-68)이 쓴 글의 사본과 거기에 달린 주석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류창은 구양수(歐陽修, 1007-72)가 집고록(集古錄)을 집대성할 때 자주 자문을 구한 호고주의자였다. 풍방의 자료는 위조품이었다. 그 자료는 1078년에 쓰였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류창이 사망한지 10년이 지난 시점이다. 풍방은 또한 류창이 신우비문에 대해 남긴 기록이 송수(宋綏)와 호세장(胡世將)이라는 두 명의 송대 수집가가 쓴 두 권의 책에 실려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이 책 제목은 어떤 믿을만한 전기에도 기록되어있지 않다. 풍방은 왜 이와 같은 가짜 참고자료를 만들어냈을까? 풍방은 양신처럼 송대의 선례가 없다며 기뻐하거나 심일[4]처럼 신성한 영감을 기다리지 않고, 대신 송대 자료를 발명하는 것으로 비문을 둘러싼 논의에 개입해 그 해석방법을 문헌적 근거라는 익숙한 길로 유도하고자 했다. 풍방의 송대 문헌이 진품이라면, 우왕의 비문에 대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류창이 쓴 글이자 곧 풍방이 소유한 글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풍방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학술 분야였다. 풍방에게는 아직 상업 출판 시장으로 유통되지 않은 고유 자원(송대 필사본)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풍방이 믿고 의지한 것은 그러한 자료를 실제로 보유하고 있음이 아니라, 그러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이 그럴싸하다는 점이었다. 풍방 본인의 수집가로서의 명망과 그의 가족의 보유한 수집품의 규모나 심도를 감안했을 때, 믿기 어려울 정도는 아닌 주장이었다. 바로 이것이 풍방이 옛 문헌들을 위조하기 위해 쌓아올린 명망이었다. 다른 유사한 경우에도 풍방은 잃어버린 지식의 회수처로 자기 가족의 서재를 부각시켰고, 양신처럼 송대 호고주의자들을 우회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조롱하였다. 

▲양신(楊愼, 1488-1559)의 해석

그리하여, 우왕의 비문이 송대 호고주의 전통과 단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비문을 연구하기 위해 다시 서재에 파묻혀 사전을 뒤져보고, 수집가들이 비문에 대해 한 말을 살펴보아야 (혹은 발명해야) 했다. 우왕의 비문은 그 진위에 대해 의심을 받으면서도, 후대의 금석문 모음집과 사전에 실렸으며, 다른 사본과 해석에 대한 전형적인 논의가 뒤따랐다. 그리하여 호고주의는 기도, 꿈, 노래의 대상이 되던 신비한 유물을 어느 정도 길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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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문명의 존립은 신성한 유물에 달려있다"
16세기 초에 예부상서 부한이 주장한 바와는 상반되는 의견이다.  

"생각컨대, 도장()의 쓰임은 문서를 식별하고 위조를 방지하는 것이지, 보물로 간직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시황이 람전(藍田)에서 옥을 얻어 도장을 새긴 이래, 한나라 이후로 이것이 전하여 쓰였습니다. 이로부터 꾀와 힘으로 (전국새를) 다투어 취하고는 말하길, 이 도장을 얻으면 곧 천명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도장이 없으면 몹시 부끄러워 하며 천명이 떠나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알지 못한 것은 천명은 덕으로 받는 것이지, 도장으로 그 경중을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까닭에 전국새를 구해도 못 얻자, 스스로 새겨 위조함으로써 애써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혹시 이를 얻으면 진나라 옥새라며 떠들어대며, 임금과 신하가 기쁜 낯빛을 하고, 거듭 잔치를 벌이고, 두루 제사를 지냄으로써 천하에 과시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천 년 동안 웃음을 살 일입니다." 

[2] 풍방(豊坊, 1493-1566)
"당대 사람들이 생각없이 "물건을 좇"는 것을 개탄한 풍방의 걱정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풍방은 미술 시장과 서적 시장의 내부사정에 정통했으며, 서예 전문가로 특히 유명했고, 감별사였던 그는 의심스러운 신종 물품의 범람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풍방은 시장을 기만하기도 했는데, 수집가와 대중 독자를 현혹시킴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대담하다고 할 수 있는 위조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가짜 유물을 만드는 것도 시장을 조작하는 방법 중 하나였으나, 풍방은 실재하는 물건에 그럴싸한 출처나 의미를 부여하는 문헌을 만들어냄으로써 보다 간접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조 문헌은 다시 위조 유물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이 순환고리는 역사를 조작하는데 일조한 공예인의 세계, 수집 행위, 학술 활동을 하나로 이었다.

[3] 왕문록(王文祿, 1503-86)
"1560년대에 학자고 출판업자이자 만년 과거 낙제생이었던 왕문록(王文祿, 1503-86)은 휘당적기(彙堂摘奇)라는 제목으로 아버지가 수집한 세 개의 금석문을 복제해서 출판했다."

그리고 이 둘이 친구였다는게 소오름...


[4] 심일(沈鎰, 1530년대 활동)
"처음 이 비문을 얻었을 때, 밤에 향을 피워 기도하기를, '신우(神禹)여! 성인이시여! 그토록 영험함이 있으시다면, 꿈에서 어떠한 조짐이라도 보여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꿈을 꿨는데 키가 큰 사람 하나가 병 하나를 들고있다가 내게 주었다. 그 병의 색은 노랗고, 높이는 1척 남짓되었으며,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었다. 배 둘레에는 금 고리가 둘러있었고, 그 입구 주변에 가로로 "아무개 관리가 만들었다(某官造)"고 써있었다. 아래에는 전문(篆文)이 각각 용, 뱀, 초목의 모양이었다. 자다가 첫 글자 하나는 잊어버렸다. 새벽에 이르르니 암송해서 글을 해석하기를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글이 안 읽히면 잠을 자는게 좋다 Post-Superfluous Things (6) 雜同散異 - Superfluous Things

Bruce Rusk 교수님의 "Artifacts of Authentication: People Making Texts Making Things in Ming-Qing China"를 계속해서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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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문이 하치(何致)가 1212년에 새긴 것이라면, 송대에 발견된 유물(혹은 가짜 유물)이 명대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퍼진 경우일 것이다. 예를 들어, 1560년대에 학자고 출판업자이자 만년 과거 낙제생이었던 왕문록(王文祿, 1503-86)은 휘당적기(彙堂摘奇)라는 제목으로 아버지가 수집한 세 개의 금석문을 복제해서 출판했다. 우왕의 비문을 포함한 세 편의 글귀는 단순히 복사만 한 것이 아니라, 현대문으로 옮기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다른 두 편의 (그럴듯해 보이는 가짜) 금석문은 송대 서예학 및 고문자학 서적에서 나왔다. 하나는 등공(滕公) 하후영(夏侯嬰, 몰년 172 BCE)의 관뚜껑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자가 쓴 계찰(季扎)의 묘지명이었다. 등공의 관뚜껑에 적힌 글귀는 왕구(王俅)가 (12세기에 쓴) 금석학 모음집, 소당집고록(嘯堂集古錄)에서 나왔고, 공자가 손수 썼다는 묘지명은 유명한 10세기 붓글씨책 순화각첩(淳化閣帖)에서 나왔다.

법첩(法帖, 붓글씨책) 덕분에 학자들은 옛 금석문 뿐만 아니라 본디 종이나 비단에 쓰였을 붓글씨를 원본이 사라진 지 오래된 뒤에도 접할 수 있었다. 지난 장에서 크리스토퍼 우드가 논한 근세 유럽의 실로제(sylloge) 처럼, 이 붓글씨 모음집은 진품과 함께 짝퉁이나 짝퉁이라고 잘 알려진 것들을 섞어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유럽의 실로제 보다 중국의 법첩은 그 자체로 수준 높은 감상을 요하는 예술품이었다.[1] 명대 중반에 학자로서 법첩을 읽는다는 것은, 제일 먼저 이 사본의 출처에 대한 복잡한 담론을 짚고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로서는 왕문록의 세 금석문 중 어느 하나도 옛것이라고 믿을 근거가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지지만, 16세기에는 세 경우 모두 거룩한 송대의 문헌 출처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금석문의 유래는 주로 문헌적 근거를 바탕으로 했다. 사물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서적에 복제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명대에 위조품이 기승을 부린 것은 사실이나, 이런 경우를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이전 시기의 위조품이 더 널리 전파된 것 만큼이나 명대에는 진품에 대한 원칙이 느슨했기 때문이었다. 16세기에 증가한 것은 위조품을 만들 수 있는 여지나 능력이 아니라, 규모가 커진 도서 시장을 통해 위조품을 다수의 독자층에게로 신속하게 전파할 수 있는 역량이었다. 휘당적기는 왕문록의 널리 읽힌 모음집, 백릉학산(百陵學山)에 포함되어 출간되었다. 우왕의 비문은 신속하게 명제국의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서 이내 곧 장사(長沙), 강남(江南), 사천(四川)에서 출판되었는데, 이는 번창하는 인쇄 산업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장거리에 걸친 신속한 전달을 위해 인쇄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국새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명나라 정부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정보와 사물을 재빨리 옮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 출판은 명나라 학자들이 우왕의 비문을 연구하고 해독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여러 유명한 금석문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서, 품질, 온전한 정도, 접근성이 각기 달랐다. 신우비는 새 발견이었고 다양한 사본이 있더라도 동일한 원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초기 수집가들 사이에는 특정 사본에 차이점이 나타날 것이라는 걱정은 적었다.[2] 대신 수집가들은 비문 그 자체와 이 비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관심을 돌렸다. 예를 들어 범대철(范大澈, 1524-1610)이라는 수집가는 여러가지 귀한 금석문과 서예 작품의 출처와 사본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가 우왕의 비문을 언급할 때는 이것이 옛 글씨임은 인정한 반면 자신이 소유한 특정 사본이나 본 적이 있는 다른 사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학자들의 관심은 오히려 비문을 현대 글자로 옮김으로써 글의 의미를 고정하는 것에 쏠렸다. 처음에는 비문은 해독할 수 없다고 받아들여졌다. 장사부지(長沙府誌)의 집필진은 글자를 옮겨쓰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유학자이자 관료였던 담약수 (湛若水, 1466-1560)는 1536년 즈음에 남경에서 신우비문의 사본을 보았는데, 한 두 글자 밖에 알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담약수가 보기에 이상한 글씨는, 비록 가독성을 저해하였지만, 이 글이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최초의 현대어 풀이는 심일(沈鎰, 1530년대 활동)이 시도하였는데, 
그의 해석과 한줄 한줄  충실한 설명은 이후의 해석에 바탕이 되었다. 이 해석문에 도달하기까지 심일은 우왕의 비문을 현전하는 비문이나 여타 역사적인 금석문에 비교하는 대신,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처음 이 비문을 얻었을 때, 밤에 향을 피워 기도하기를, "신우(神禹)여! 성인이시여! 그토록 영험함이 있으시다면, 꿈에서 어떠한 조짐이라도 보여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꿈을 꿨는데 키가 큰 사람 하나가 병 하나를 들고있다가 내게 주었다. 그 병의 색은 노랗고, 높이는 1척 남짓되었으며,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었다. 배 둘레에는 금 고리가 둘러있었고, 그 입구 주변에 가로로 "아무개 관리가 만들었다(某官造)"고 써있었다. 아래에는 전문(篆文)이 각각 용, 뱀, 초목의 모양이었다.[3] 자다가 첫 글자 하나는 잊어버렸다. 새벽에 이르르니 암송해서 글을 해석하기를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심일은 비문을 우왕이 홍수를 조절하고 강역에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힘쓴 기록으로 읽었다. 그러나 이 꿈을 제외한 자신의 해석 방법을 설명하지 않았고, 외적 증거를 인용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인용을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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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전히 아동 교육용 붓글씨 책으로 쓰일 때 조차 그 역사성이 부각되곤 했다. 
"지금에 와서는 천하 모든 어린 아이가 글공부를 시작할 때이로하부터 외우는데이 주변에는 아직껏 이로하라는 것을 알지 못하시다니참으로 겐지모노가타리 따위에나, '나니와즈', '아사카산'으로 글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을 보았지만지금에 와서는 너무 어려워하거늘도리어 예스러운 것을 바라는 사람이로구나"

[2]
"
부한은 먼저 새로 발견한 옥새와 역사적인 기록에 나온 묘사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부한이 인용한 책 제목은 도종의(陶宗儀, 1316-1403)의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 뿐인데, 이 책은 신변잡기적인 기록과 다른 책으로부터 베낀 구절의 모음집이다. 철경록은 도장의 명문과 도장을 장식한 짐승 모양을 재현해놓았다. 부한의 생각으로는, 철경록이 편찬되기 400년이나 전에 전국새가 자취를 감췄고, 10세기 이래 나타난 다양한 옥새가 모두 위조품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런 부한이 철경록이 얼마나 권위가 있다고 보았는지는 불확실하다. 더욱이 철경록 자체에도 서로 다른 내용이 쓰인 두 가지 버전의 전국새가 실려있었다."

[3]
"전국새의 명문은 한문을 멋들어지게 재구성해서 새나 다른 동물의 모양이 되도록 만든 조문(鳥文, 조어문鳥魚文, 어문魚文, 용문龍文 등으로도 불린다)의 과장된 형태였다. 이렇게 장식적이고 보기 드문 글자 형태를 찾아보는데 명대 초기의 옛 글자 자전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카타이-퍼시픽 IC를 찾아라! 마음에 들 지도?

곤여만국전도의 낙타-소는 어디서 왔는가? 포스팅은 우르바노 몬테 지도(아래)의 지명을 곤여만국전도에 비정하면서 끝맺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북아메리카 이야기만 하다가 정신이 팔려서 못 다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엔 키비라/기미납국 부연설명을 했고요^^)

그렇다면 이제 아시아 쪽으로 눈을 돌려볼까요?

아니안 해협에서 아시아 내륙으로 훅 들어올 수 있는 강이 하나 보이네요. (빨간 네모)
그 이름은 폴리삭 강(Polisac Rio)!


이 강이 왜 중요하냐고요?

바로 164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탐험 선단이 찾아나선 강이 바로 저기였기 때문입니다. (금섬, 은섬은 사이드 퀘스트였죠...)



카타이 내륙 진입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폴리삭 강이 바로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찾아내야 하는 목표물이었습니다. 


먼저 바타비아에서 몰루카 제도를 거쳐 트레나테항에서 일차 정박한 다음, 필리핀 제도 동쪽으로 북진을 해서 태평양을 올라갑니다. 일본의 혼슈 인근에 5월 20일에서 25일 사이에 도착한 다음 북/서북 방향으로 진행하여 일본 열도의 북단까지 도달한 다음 일본에서 ‘에소’라고 부르는 지역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한 후 시간을 지체하지말고 마르코 폴로가 말한 카타이의 큰 강 입구에 있다는 무역항 얀지오(Jangio)와 브레마(Brema)를 6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찾아가도록 합니다. 
무역이 끝나면 8월초에 북으로 출발하여 다시 동남으로 방향을 바꿔 일본의 동쪽 끝 혹은 아메리카(!)의 서해안에 도착한 다음, 2-3주 정도 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하고, 8월 25일 이후에는 금섬과 은섬을 찾아본 다음 귀로에 오른다.


전에 이야기드렸듯이 VOC 선원들은 일본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당합니다. 

이들이 맞이한 것은 한때 크리스토방 페레이라리암 니슨라고 불렸던 예수회 선교사, 그러나 지금은 변절자이자 막부의 하수인인 사와노 츄안이었죠.


츄안이 지도를 보고 타타르 지방을 가리키고는 "이런 내륙 지방에 바다를 통해 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고 묻자,

네덜란드 선원들은 "Polisange라는 큰 강이 있어 내륙에서 80~100 마일을 흘러가 바다로 만나는 지점이 타타르 동해안 북위 56도 지점입니다."라고 대답하죠. 


오오, Polisange! 우르바노 몬테 지도의 Polisac 강이군요.

▲지도 상의 위도도 대략 일치합니다.


이처럼 옛 지도에 나타나는 지리적 상상은 대체로 희망사항을 반영했습니다.

부유한 아시아 내륙지방(중국)과 직접 교역하고 싶다는 유럽인들의 바람이, 
마르코 폴로의 모호한 설명과 뒤섞여 폴리삭/폴리상게 강에 대한 환상으로 나타난 것이죠.

그리하여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남중국의 안남과 여러 부유한 무역항의 이야기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통해 쉽게 도달할 수 있어 보이는) 동북아시아 끝에 자리잡은 것입니다.


"실은 최근의 연구는 처음 마르코폴로가 언급한 아니우 혹은 아니움 Aniu/Anium은 아마도 통킹만의 안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곳의 무역항 얀지오나 브레메도 남중국의 항구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치 이야기... Post-Superfluous Things (5) 雜同散異 - Superfluous Things

Bruce Rusk 교수님의 "Artifacts of Authentication: People Making Texts Making Things in Ming-Qing China"를 계속해서 번역합니다.
전 포스팅에 이어 계속 "우왕의 비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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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전설은 모두 신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돌 위에 어쩌다보니 글도 적혀있을 뿐이라는 식으로 언급한다. 몇몇 송대 문헌은 비문을 언급하지만 멋드러진 모양에 대해 상술할 뿐,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남송대에 이르면, 금석학(金石學)의 영향이 커져서인지, 원래의 서사논리가 뒤집혀서 나오기도 했다: 비문은 글귀가 어쩌다보니 사물 위에 적혀있는 것이었다. 글은 사물에서 분리해 낼 수 있었고
[1], 복제할 수 있었다. 골동품과 고문자학에 관심이 많았던 유학자, 장세남(張世南)이 기록한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하치(何致)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1212년의 신우비(神禹碑) 목격담이다. 신우비를 본 하치는 비문을 복제하자고 마음 먹는다. 하치는 이 탁본을 관리에게 바치는데, 관리는 비문의 중요성을 알아보았으나 하치가 모조품이나 무방한 비문을 가지고 속이려드는게 아닐까 우려해서 거절하였다.[2] 국가의 관심을 끄는데 실패하자, 하치는 구루산에 있는 악록서원(嶽麓書院) 뒷편의 바위에 50여 글자나 되는 비문 글귀를 옮겨새겼다. 비록 이 이야기는 비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을 뿐더러, 내용을 해독할 수나 있었는지조차 말하지 않지만[3], 비석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비문을 다루며 복제하고 전파할 수 있는 요소로 언급한다.  

그러나 전파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이 비문이 다시 언급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흐른 1534년에야 장사 태수(太守) 반일(潘鎰, 1521년 진사)이 악록서원 뒤에서 글이 새겨진 돌을 발굴해낸 것이다. 반일은 이것이 신우비의 비문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듬해 장사부지(長沙府誌)에 비문의 사본과 함께 이 발견에 대한 보고를 실었다. (그림2) 장사부지는 하치를 언급하지 않았고 비문을 현대의 문자로 옮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으며, "모두 옛 전서로 되어있었고 해독할 수 없었다"고 할 뿐이었다. 더욱이 이 비문의 길이는 77자로, 하치가 말한 50여 글자가 아니었다. 한편, 반일은 하치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한 채(그러니까 신우비의 복제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하치가 비문을 새긴 자리에서 이를 발견하였다. 1534년 이전에 하치의 탁본을 베낀 사본이 없는 이상, 반일이 발견한 비문의 정확한 유래도 알 수 없다. 

▲그림2. 장사부지(長沙府誌)의 대우비도(大禹碑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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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행동(글)과 사물/자연물(돌)을 분리해내는 일은 이후에도 많은 중국 학자들을 괴롭혔다.

사람은 그저 사람이 아니니, 사물(物)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물도 그저 사물이 아니니, 사람이 아닌 사물이 어디 있는가? 하물며 사람으로서 사물이 아닌 자가 어디 있으리오? 나는 영물이다. 사물도 조금은 나다. 나와 섞여있다. (사물이) 눈에 익어서 잊어버렸으니, (사물과 내가) 둘이라는 것을 모를 뿐이다.  
- 여곤(呂坤, 1536-1618), 1581년 견물(見物)에 붙인 서문


"이 물건이 도착하자 관료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웅충이 말한대로 전국새가 맞을까? 그렇다면 이 옥새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아니라면, 옥새와 옥새 관련 인물을 어떻게 해야할까? 벌을 주어야 하는가? 관공서의 도장을 위조하는 것과 거짓 보고서를 올리는 것 모두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였다. 반대로, 웅충이 말한대로 그 옥새가 1700년 된 유물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3] 옛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거나 않았을 때, Clunas는 여기서 "의도"를 읽어냈다.
Rusk는 반대 의견을 펼친다.

"참칭자 진우량의 후손들은 황주(黃州지역에 흩어져 살았고 모두 비루한 사람들이다그 중 한 집안이 유(卣, 돔 모양의 뚜껑이 달린 술주전자)를 갖고 있었는데 그 제도가 몹시 오래되었다나의 벗 오원벽이 황주부(黃州府) 판관으로 부임했을 때채단(彩段한 단()을 주고 바꿔왔다좁쌀이 한 말(斗)이나 들어갈 만큼 크고안팎으로 황토색이 많은데간간이 붉고 푸른(朱翠색이 들어갔다금은동(金銀銅)으로 도금되어 있었다이미 변해 있었는데()자형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었다. 참으로 상()대의 물건이다."

여기서는 유()에 새겨진 금문이 실제로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Craig Clunas, Superfluous Things, 99)


"옛 문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옛 문자가 적혀있는 유물을 더 많이 찾으려는 욕망과 함께 했으며, 이에 따라 찾아낸 유물과 출판한 서적은 또 고문자학(古文字學) 지식 목록의 일환이 되었다."

(Bruce Rusk, "Artifacts of Authentication, 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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