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효, 호루, 그리고 포월로(捕月老)의 바다 인도차이나 ~Indochine~


제 스스로 쓰는 포스팅도 많이 있지만, 이번처럼 적륜 님의 과거 포스팅에 첨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적륜 님의 포스팅이 교과서라면, 저는 참고서나 사회부도책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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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적륜 님께서는 이상한 나라의 교시로 시리즈를 한창 연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시즌2 파일럿 에피소드가 바로 이상한 나라의 교시로 시즌2: 도쿠베가 천축에 간 이야기였지요.

일본 가부키의 "최고 스펙타클 빌런 캐릭터인 덴지쿠 도쿠베"가 어떻게 실존인물인지 다루는 글이었습니다.
1707년 덴지쿠 도카이 모노가타리(天竺渡海物語)라는 문서를 소개하셨는데, 아래에 해당 부분을 인용해 놓겠습니다.

1626년 10월 16일 이때 도쿠베의 나이 약관 15세, 해외무역의 허가를 받은 교토의 대상인 스미노쿠라 요이치(角倉与一) 선단의 선장인 마에바시 기요베(前橋清兵衛)의 배에 서기로 고용되어 처음으로 먼 이국으로 출항합니다.

나가사키를 떠나 여인의 섬과 남자의 섬[1]을 지나 정남쪽의 다쿠산쿠(에도시대에 다카사고高砂라고 불린 타이완섬)에서 다시 서쪽으로 광동의 입구에 있는 항구 아마가와(天川 즉 마카오를 의미)에서 정박합니다. 아마가와 항의 수심이 너무 깊어 닻을 내리기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남쪽 하늘에 걸린 '대(大) 크로스'(남십자성을 의미)를 보게 됩니다.

아마가와의 남쪽으로 300리 아래 '효'의 경계에 도착했을때, 난킹(이본에는 통킹)의 경계에 도달하였고, 여기서 다시 서쪽으로 진행하여 달마 조사의 고향이라고 전해들은 코치(하노이로 비정)의 토롱카산 정상을 봅니다.(베트남 중부 호이안 지역으로 비정하는 학설도 있음) (효는 한자가 정확히 뭔지 어느 지방을 의미하는 지 현재로서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이후의 설명에 의하면 남중국해의 어느 지점같습니다)[2]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카보차(캄보디아를 의미)의 호콘토로 라고 하는 섬[3]에 도달한 후 다시 북서로 800리 가서 중천축 "마카타국"의 류사(流沙) 강 입구에 도착하는데, 여기까지 일본에서 모두 3800리 (대략 14,900 km)입니다. (註: 류사 강은 발음을 옮겨 적은 게 아니라 의미대로 흐르는 모래의 강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유기에 사오정이 살던 곳이 바로 류사하였죠... 아직 정확히 어디인지 잘모르겠습니다)

류사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샤무 국(샴 즉 현재의 태국을 의미)에 한테히야 (이본에는 반테히야)라는 성이 있는데, 여기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가서 마카타국의 왕에게 일본의 무역허가증인 주인장(朱印状)을 제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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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유기에서 언급한 62. 쥐가 사는 섬의 주석 참조. 

女人嶋あり。鬼界が島は男子ばかりなり。

여인도도 있다. 키카이가지마는 남자 밖에 없다.



그렇다면 [2][3] 즉, 마카오 남쪽 300리에 있다는 ''와 캄보디아의 '호콘토로'는 어디일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효"와 "호"는 같은 말입니다.

아직도 아리송하시다고요? 


바로 '효'와 ('호콘토로'의) '호'는 모두 오스트로네시아어(말레이-인도네시아 어)의 풀라우(pulau)를 일본어로 표기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아예 한자 지명이 아녔던 것이죠! @@


어떻게 풀라우(pulau)가 '효', '호'가 되냐고요?

전근대 일본어에서는 ㅎ, ㅂ, ㅍ 발음을 구분해서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천국을 뜻하는 파라디소(paradiso)는 일본어로 하라이조(はらいぞ)라고 표기했죠.

* 구원받기 위해서 먹으면 안 되는 것 포스팅 中 "파라이조" 참조. (텐치하지마리노코토 원문에는 "하라이조"지만, 한국어 번역에는 실제 키리시탄이 발음했을 "파라이조"라고 표기함.)


꾸 라오 하이난과 한월(漢越) 팽창 포스팅을 기억하시나요?

"꾸 라오(Cù Lao)"는 "섬"이라는 뜻의 오스트로네시아어(語) 단어를 베트남식으로 쓴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에서는 "풀라우(pulau)"라고 합니다. 이 지도를 만든 사람이 도대체 왜 하이난을 다오(đảo, 島) 대신에 꾸 라오(cù Lao)라고 표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이난 섬을 그린 베트남 지도에서는 흔히 "다오"를 쓰던데 말이에요. 하지만 이 지도를 보니 생각에 잠기게 되더군요...


▲"꾸 라오 하이 남(Cù Lao Hải Nam 劬劳海南)"이라고 표기된 19세기 대남일통전도(Dại Nam nhất thống toàn đồ 大南一統全圖)



중국 남부에서 베트남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고, 반리가세(파라셀 군도)와 이어진다는 도쿠베의 묘사를 보고, 저는 '효'가 중국의 "하이난 섬"이 아닐까... '효'는 '풀라우'가 아닐까 했는데, '호콘토로'를 보고 제가 맞았다는 확신이 굳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베트남 남부의 "풀로 콘도르" 섬이거든요. 영국 동인도회사(EIC)가 1702년 이곳에 (잠시) 상관장을 짓고는 Pulo Condore이라고 표기했고,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 응우옌 왕조에게 군사원조를 하는 대신 Poulo Condor을 할양받기로 했죠. 안남 왕국은 자체적으로 꼰 다오(Côn Đảo, 꼰 섬)라고 불렀습니다. 



풀라우/풀로라는 발음이 너무 어려웠던 일본인들에겐 (물론 위에서 보시다시피 누구나 발음하기 어려운 지명이었습니다) "표-우", "포-루 콘도로"라고 하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 표기는 "효", "호콘토로(다른 기록에는 호루콘도로)"라고 남게 된 것입니다.




▲아마카와(天川, 마카오)에서 300리 가면 표-의 경계(하나)라고 부른다. 

"하나"는 같은 문서 내에서도 "끝", "경계"라는 의미로 쓰이기는 하나, 
"(풀라우) 하이난"을 "표-노 하나"라고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풀라우"를 방문한 조선인도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텐지쿠 토쿠베에와 유사한 항로를 여행한 진주 선비 조완벽도 있겠으나, 그의 기록에서는 하이난과 콘도르를 "풀라우"라고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백 년 이상을 앞선 기록이 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은 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麿)라고 하였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었는데 모두 다 모래와 돌로 된 땅이었고, 둘레는 소내도(所乃島)에 비교하여 조금 작았습니다. 그 언어와 의복·거실·풍토는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10일 을미 1번째기사, 1479년)



▲맨 왼쪽(서쪽)의 요나구니 섬, 동남쪽으로 하테루마 섬


성종 때 표류민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기록인데, 

여기서 말하는 "윤이도"는 현재 일본의 최서단 요나구니(与那国) 섬입니다. 

(소내도는 정확히 어디인지 불분명합니다)


"포월로마이시마"는 하테루마(波照間) 섬의 당시 이름이죠.


▲제주도 조금 위의 추자도에서 요나구니(빨간 표지)까지 표류를 한 것입니다... 

자칫 조금만 더 갔으면 타이완 헤드헌터들을 만났겠군요.


오키나와 주변 섬들이 말레이-인도네시아 어(오스트로네시아어)를 썼다니, 놀랍기도 하지만 사실 오스트로네시안의 이동은 대만에서 출발합니다. 
첫 기착지가 유구 열도였던 것이죠.

그리고 이후로도 계속 동남아 세계와 교류를 이어갔는데,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 단검 유물도 발견되는 것이죠! 


조선왕조실록의 표류 기록을 통해, 비록 지금은 일본 오키나와의 일부인 섬들이지만 15세기까지도 엄연히 오스트로네시아어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포월로"와 "시마"가 중첩적으로 쓰인 것도 흥미롭죠.

풀라우 콘도르가 꼰 다오(島)가 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요?



마무리 짓자면,

완벽과 텐지쿠 토쿠베에의 바다, 주인선 무역과 스미노쿠라 선단의 바다는, 

풀라우(Pulo, Poulo)와 꾸 라오(劬劳), 시마(しま)와 다오(Đảo)와 도(島)가 모두 중첩된 채로 공존하는 바다였던 것입니다!



'문헌과 해석'에 원병(猿兵) 관련 논문이 실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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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
라의 양호(楊鎬)는 원숭이(弄猿) 기병 수백 마리를 데리고 소사하(素沙河)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서 매복하게 하였다. 원숭이는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자 사람인 듯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모두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쳐다만 보았다. 혼란에 빠져 조총 하나, 화살 하나 쏴 보지도 못하고 크게 무너져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 

1751년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쓴 택리지의 ‘팔도론·충청도’에는 이처럼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이 나타나 있다. 현재 충남 천안 일대인 소사(素沙) 지역의 전설을 소개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평양, 행주산성 전투와 함께 육상에서 거둔 삼대첩(三大捷)으로 꼽히는 소사 전투(1597년)를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원숭이 기마부대의 활약상은 마치 판타지 영화나 군담소설(軍談小說)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극적이고 환상적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종전한 지 150여 년이 흐른 뒤에야 택리지가 작성됐고, 이전 조선의 문헌이나 명·일본의 사료에선 원숭이 부대의 활동을 찾아볼 수 없어 설화나 야사(野史)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명나라 원숭이 특수부대의 실체를 밝혀줄 연구가 나왔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사들이 원숭이 부대의 존재를 기록한 문헌이 발견된 것.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사진)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 ‘임진왜란 소사전투의 명(明) 원군(援軍) 원숭이 기병대’를 연구모임 ‘문헌과해석’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올해는 임진왜란이 종전한 지 420주년이 되는 해다. 


○ 참전 용사의 기록에 나타난 원숭이 기병대

임진왜란 기간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손기양(1559∼1617). 1598년 7월 21일 그의 일기에는 명나라의 지휘관 유정(劉綎) 부대를 둘러보고 왔던 종의 눈에 비친 신기한 구경거리가 기록돼 있다. 

“유정의 군진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초원(楚猿·원숭이)과 낙타가 있다고 했다. 원숭이는 능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고, 낙타는 물건을 운반할 수 있다고 한다.”

손기양은 일기를 간단히 남긴 편이었는데 전쟁의 참혹한 전투 상황만큼 시선을 끈 것은 다름 아닌 원숭이와 낙타였다. 임진왜란 당시의 실기(實記)를 통해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임진왜란을 가장 자세하게 서술했다고 평가받는 조경남(趙慶男·1570∼1641)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경남이 직접 명나라 부대를 확인한 후 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원숭이 기동대의 존재를 묘사한 것이다. 그의 기록은 택리지의 설명과 거의 완벽하게 부합한다.

“군사 가운데 초원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았다. 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


○ 그림 속에 등장한 원숭이 병사들

그림을 통해서도 원숭이 부대의 실체가 확인됐다. 경북 안동의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오는 ‘세전서화첩(世傳書(화,획)帖)’. 32점의 그림과 문헌 등으로 구성된 이 화첩 가운데 1599년 2월 명나라의 14만 대군이 본국으로 철군하는 장면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가 있다. 이 그림의 왼쪽 하단에는 ‘원병삼백(猿兵三百)’이란 깃발 아래서 유인원(類人猿) 열 마리가 칼을 들고 행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원숭이 병사 300명이란 의미다. 안 교수는 “서구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전투가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에서 펼쳐졌다”며 “이번 연구를 계기로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원숭이 부대의 활약을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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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이네요!

낭병/원병에 이글루스 분들이 조사해서 기여하신 바는 과거 포스팅 [주워담는 글] 임진왜란에 참전한 원병(猿兵)에서 이미 훑었기 때문에 다시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역사관심 님과 길공구 님께 감사드립니다!  

난중잡록, 천조장사전별도 등의 기록은 이미 역사관심 님께서 훑은 바 있고,  
택리지와 손기양의 일기는 저도 처음 보는 기록입니다.


특히 택리지의 "소사전투" 언급은 상당히 도움이 되는데, 
 
《 “명나라의 양호(楊鎬)는 원숭이(弄猿) 기병 수백 마리를 데리고 소사하(素沙河)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서 매복하게 하였다. 원숭이는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자 사람인 듯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모두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쳐다만 보았다. 혼란에 빠져 조총 하나, 화살 하나 쏴 보지도 못하고 크게 무너져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 

천조장사전별도에서도 원병이 소사전투(직산전투라고도 불림)에서 공을 세웠다고 되어있기 때문이죠.

또한 난중잡록, 택리지에서 모두 원병을 "기마병"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이 갑니다.

"우린 기마부대라고!"


사실 직산전투에서 특수 기병대를 비밀리에 조직해서 전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원병과 뒤섞인 것인지, 아니면 이 기록이 원병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적이 남원을 함락시키고부터 승승장구하여 경기 지방을 핍박하였다. 경리 양호가 평양에서 그 소식을 듣고 도성으로 달려와 제독을 불러 싸우지 않은 상황을 꾸짖고, 제독과 함께 계책을 정해 정용(精勇)한 기사(騎士)를 몰래 뽑아 해생우백영(牛伯英)ㆍ양등산(楊登山)ㆍ파귀(頗貴)로 하여금 거느리고 직산에서 맞아 치게 하였다. 해생 등은 직산의 소사평(素沙坪)에 복병해 있다가 적병이 미처 대오를 정렬하기 전에 돌격하니, 적이 흩어져 도망하였는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또 유격(遊擊) 파새(擺賽)를 보내어 2천의 기병을 이끌고 따르게 하여 네 장수와 합세해서 추격하여 또 격파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갸우뚱한 점은, 안대회 교수님께서는 이들 원병을 진짜 원숭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

[느릿느릿 21] 유구의 다시마 그 나라의 이름은, 유리 구슬

자세한 내용은 적륜재의 다시마의 맛!:昆布の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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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25] 유구의 도검난무! 그 나라의 이름은, 유리 구슬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도가 여전히 사랑받았던 이유 포스팅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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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공예품 수입이라는 새로운 현상은 때때로 어쩌다 생긴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었고, 오히려 체계적으로 수입된 사치품 소비 경향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Craig Clunas, Superfluous Things: Material Culture and Social Status in Early Modern Chin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4), 58.



검(劍) 일본검(日本劍)이다.


외조부 백호공(白湖公)이 벼슬하지 않았을 때에 바다로 유람을 갔는데 만이(蠻夷) 장사꾼이 공을 만나 크게 기뻐하고서 치장한 상자 속에 든 검을 꺼내어 선물로 주면서 말하기를 “신표(信標)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공께서 받으시고 옷을 벗어 주어 사례하였다. 이 고검(古劍)은 길이가 한 자 남짓 되는데 아침이면 칼날에 물기가 있다. 공이 만력 4년(1576, 선조9)에 예조 정랑으로 39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 이항복(李恒福))이 유권(遺卷)의 서문을 지으면서 매우 자세하게 칭찬하고 인정하였다.







P.S.1
치요가네마루는 실물로 보면 존멋이다...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도가 여전히 사랑받았던 이유 雜同散異 Superfluous Things


작년 이맘때 Craig Clunas의 Superfluous Things는 번역/소개하다가, 
"탈역사적 소비심리"를 마지막으로 일시정지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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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공예품 수입이라는 새로운 현상은 때때로 어쩌다 생긴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었고, 오히려 체계적으로 수입된 사치품 소비 경향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
(일본인 두목 아래에서 일하는 다수의 중국 실향민으로 이뤄진) '왜구(倭寇)'가 중국 연안과 부유한 강남 지역을 16세기 내내 노략질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부자들은 일본산 물건을 집에 두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이 관심은 특히 칠기(漆器)와 금속공예 분야에 집중되어있다. 문진향이 일본도(日本刀)를 언급하면서 송대 학자 구양수(歐陽脩, 1007-1072)의 글을 인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도는 유서깊은 문학 소재였고, 조선산 종이 등롱에 대한 찬사 또한 동천청록집(洞天淸錄集)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출처: Craig Clunas, Superfluous Things: Material Culture and Social Status in Early Modern Chin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4), 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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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倭寇)'가 중국 연안과 부유한 강남 지역을 16세기 내내 노략질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부자들은 일본산 물건을 집에 두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직접 겪은 조선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허목 선생의 "미수기언"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검(劍) 일본검(日本劍)이다.


외조부 백호공(白湖公)이 벼슬하지 않았을 때에 바다로 유람을 갔는데 만이(蠻夷) 장사꾼이 공을 만나 크게 기뻐하고서 치장한 상자 속에 든 검을 꺼내어 선물로 주면서 말하기를 “신표(信標)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공께서 받으시고 옷을 벗어 주어 사례하였다. 이 고검(古劍)은 길이가 한 자 남짓 되는데 아침이면 칼날에 물기가 있다. 공이 만력 4년(1576, 선조9)에 예조 정랑으로 39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 이항복(李恒福))이 유권(遺卷)의 서문을 지으면서 매우 자세하게 칭찬하고 인정하였다.
임진년(1592)에 우리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나 우리 집안사람들이 양호(兩湖) 1000여 리를 피난 다녔는데 선비(先妣)께서 이 검을 지니고 다녀서 온전할 수 있었다. 탄식하기를 “난리를 겪은 뒤에 우리 선인의 옛 물품은 오직 검 하나뿐이다.” 하고 그 검을 백씨와 숙씨에게 돌려드렸는데 백씨와 숙씨가 받지 않으며 말씀하시기를 “큰 난리를 만나 골육도 보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검이겠는가. 자씨(姊氏)의 현명함이 아니었다면 그 검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돌려주지 말고 자손에게 전하여 후세에 어진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하라.” 하였다. 이 때문에 그 검이 허씨에게 전해진 지가 2세 100년이 되었다. 선비의 성품이 충후(忠厚)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나 자잘한 사랑은 하지 않으셨다.


난리를 겪은 뒤에 우리 선인의 옛 물품은 오직 검 하나뿐이다.



이후에 성호 이익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도 이 허씨 가문의 일본도를 주제로 시를 짓습니다.
Craig Clunas가 언급했듯이, 일본도는 "일본의 무기"라기 보다는 
분서갱유로 소멸되어 이제는 볼 수 없는 중국의 옛 문물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는 기제였거든요.


구양수가 시를 지어 깊은 뜻을 담았으나 / 歐陽作詩寓深意
분서(焚書) 이전의 시서를 그 누가 다시 알까 / 火前詩書誰復識
머나먼 곳 아득한데 어떻게 다다를거나 / 絶域蒼莽那可到
검을 마주하니 깊은 여한이 더욱 쌓이누나 / 對此益覺幽恨積
오호라 검이여 처음 바다를 건너올 적에 / 嗚呼劒兮初渡海
육경이 어찌하여 서로 따라오지 못하였던고 / 六經胡不相追逐
단간잔편(斷簡殘篇)에 파묻힌 쓸쓸한 내 신세여 / 棲棲殘簡蠧編裏
밤에 깨어 텅 빈 하늘을 아득히 바라보네 / 夜起遐眺雲空廓



오히려 "
역사적 소비심리"가 근대의 상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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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백호공이 만난 외국 상인은 일본인이라고 보는게 합당하겠지만서도...


만이(蠻夷) 장사꾼이 공을 만나 크게 기뻐하고서 
치장한 상자 속에 든 검을 꺼내어 선물로 주면서 말하기를 
“신표(信標)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P.S. 2
또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피난길에 챙긴 조상의 유품은 일본도 한 자루가 전부였고, 
6.25 전쟁 당시 창경원 사육사의 피난길 동지는 일본어로 조롱하는 앵무새였다는게 참...

서울 탈환에 안도의 숨을 돌이킬 틈도 없이 전황은 역전되어 1.4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직원들은 다투어 피란 짐을 싸고, 나도 이때만은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동설한에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이 우리 안에 갇힌 동물 가족들을 남기고 발길을 돌리기란 차마 어려웠지만, 백번 궁리 끝에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앵무새 한 마리만 장에 넣어 가지고 떠났다. 정들었던 앵무새를 마지막으로 보고 문을 나서려는데, 'こら, こら! ばか, ばか!'하며 욕소리를 외쳐대는 이 오랜 친구만은 두고 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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