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아란타 풍설서" 항목 정리 아란타 풍설서



1. 근세 동아시아를 찾은 스타킹.






2. 마츠카타 후유코의 "네덜란드 풍설서".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원문 논란 (16쪽-31쪽)



근세 유럽과 아시아의 소식 (79-129쪽)




별단 풍설서 (146쪽-160쪽)







3. 인어 이야기




Martha Chaiklin, "Simian Amphibians: The Mermaid Trade in Early Modern Japan" in Large and Broad: The Dutch Impact in Early Modern Asia: Essays in Honor of Leonard Blusse, ed. Nagazumi Yoko (Tokyo: The Toyo Bunko, 2010), 253-257.







4. 어떤 손님, 어떤 가족 이야기




동인도회사의 소멸 (126-127) 아란타 풍설서



동인도 회사의 소멸


1796년에서 1807년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네덜란드(1799년까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그 이후는 바타비아 공화국 치하의 식민지 정부)는 일본에 배를 거의 못 보냈다. 그래서, 항해 경로 상에 영국 배에 나포될 가능성이 낮은 중립국(미국이나 덴마크, 독일의 한자동맹 도시인 브레멘)의 선박을 고용해서 일본 무역에 충당했다. 

1800년, 신임 상관장 빌럼 바르데나르(Willem Wardenaar)가 부임하지만, 전년에 동인도회사가 해산된 것은 일본인에게는 비밀로 부쳤다.

바르데나르는 1803년에 떠나, 바타비아로 돌아갔다. 이 때 상관장의 직무를 인수인계 받은 것이 헨드릭 두프(Hendrik Doeff)였다. 그의 임기 중, 1804년에 러시아 사절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나가사키로 찾아오는 사건이 발생했고, 1808년에는 마카오를 점령한 영국 함대에 속한 페이튼 호가 나가사키 만에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811년, 영국의 벵골 부총독 스탬퍼드 래플스(Stamford Raffles)가 바타비아를 점거하고 1816년까지 자바를 지배했다.[1] 1810~1816년에는, 네덜란드 선박이 전혀 오지 않았다. 

두프는, 후임자가 오지않았기 때문에 1803년부터 1817년까지 상관장 직에 있었고, 위기가 닥친 나가사키 네덜란드 상관을 지켰다. 무역에 의존하던 나가사키 마을 그 자체도 곤경에 빠졌으나, 상관이 겪은 곤궁함은 한층 더 심각했다. 그 기간 동안 무역이 불가능하다 시피 하여, 생활비조차 일본에서 빌릴 수 밖에 없었던 상관원을, 일본인은 계속해서 우애의 정으로 대해주었다, 고 두프는 적고있다. (『두프 일본 회상록』)[2]

에도 시대를 통틀어, 풍설서는 대체로 정확한 정보를 전했다. 지금까지 본서에서 서술하였듯이, 18세기 초까지 네덜란드인은 거짓말을 하고 싶더라도 아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동남아시아에서 오는 중국 선박(唐船)이나 밀항 선교사라는 별개의 정보원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엽에는 거짓을 고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상황이 나쁘다는 것은 침묵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말이 되자, 침묵만 지켜서는 해결되지 않고,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원인은 유럽에서 일어난 세계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126-12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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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탬퍼드 래플스 통치 하의 자바에 대해서는 최병욱(2015) 『개정판 동남아시아사 - 전통 시대』, 322-324쪽 참조.

[2] 두프가 상관장으로 재임한 시기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적륜 님이 2010년과 2011년에 쓰신 일련의 글들 중 다음을 참조.
[3]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번역한 "에도 막부가 보고받은 프랑스 혁명(127-129)"입니다.


철수를 검토한 VOC (123-125) 아란타 풍설서



일본 상관에서 철수를 검토한 VOC


1801년, 런던에 있던 티칭이 친구인 탄바 후쿠치야마(丹波福知山) 번주, 쿠츠키 마사츠나(朽木昌綱)에게 보낸 개인 서신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쿠츠키 마사츠나는 일본 굴지의 네덜란드어 능력자였다. 이 편지도 네덜란드어로 쓰였다.


제가 중국에 체류하던 사이 유럽에서는 큰 전쟁이 발발하여, 저를 맞이하러 올 예정의 네덜란드 선박은 바타비아에서 발이 묶여버렸습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중국에서 바타비아로 돌아간 뒤, 저는 총독부에 의해 쇼군에게 사절로 보내질 예정이었습니다. 이에야스(家康)와 히데타다(秀忠)가 통항허가증(주인장朱印狀)으로 회사에게 허락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의 일본무역을 네덜란드 회사가 행할 수 있도록 청원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무역조건 완화를 얻어낼 수 없다면, 180년 동안이나 무역을 허락해온 쇼군의 후의에 감사 드리고, 일본무역에서는 이익보다 손실 쪽이 많기 때문에, 저희는 하는 수 없이 일본에서 철수를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그럼에도 회사는 쇼군에게 선물을 헌상하고 일본에게 중요한 유럽의 사건을 알리기 위해 3년 마다 1척의 작은 배 만은 보내려고 한다고, 선언하게 되어있습니다. 


만일 통상관계를 파기하더라도,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을 3년에 1번 전하기 위해서라면 막부는 네덜란드인의 입국을 허가하리라는 것이 일본통 티칭의 견해였다. 물론, 일본에서 귀항 시 짐을 싣지 않은 채 빈 배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무역이익을 올리지 못하는) 선박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씩이나 되면서 움직일 리 없다. (게다가 회사는 1799년에 이미 해산되었다). 그러니, 일본 측의 허가 여부를 따지는 이전의 안건이 실현될 가능성은 없었다.

서명 거부로 보나 이 사안으로 보나 결국은 실현되지 않은 것이지만, 티칭이 풍설서에 실은 평가 및 기대가 컸음을 보여준다. 쇼군이 무역을 허가한 것은 네덜란드인이 가져온 정보(풍설서)를 하기 때문이라고, 티칭은 막부의 논리를 어떤 의미에서 맞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란무역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네덜란드가 가진 교섭용 무기로 풍설서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대일무역을 단념하고 철수하는 것을 수 차례나 진지하게 검토하였다. 일란무역은 규모가 작아지고, 이익도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수라는 결단을 선뜻 내릴 수 없었던 이유가 두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일본에는 상관의 방어를 위해 성벽을 짓는 등 무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8세기 말, 회사는 큰 채무를 떠안고 있었으나, 최대 원인은 군사비였다. 나가는 경비가 적다면, 이익이 아무리 오르지 않더라도 계속해나갈 수 있다. 일본에서는 나가사키 항에 들어오건 아니건 무장해제당하지만, 그만큼 네덜란드인의 안전은 쇼군이 완전히 보장해주었다. 그 덕분에 데지마 같이 무방비한 상관에서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네덜란드인은 일본 시장의 잠재적인 가능성에 기대하고 있었고, 막부의 무역통제조차 없어진다면 이익이 오르리라고 믿고있던 것이다. 그 까닭에, 일본과 독점적인 관계를 완전히 끊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네덜란드가 관계를 단절해버린다면 또다른 유럽 국가가 그 자리를 꿰찰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정보를 제공해주는 유럽 국가를 적어도 하나는 필요로 하고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티칭은 풍설서를 협상패로 써서 무역제한을 완화받고자 한 것이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12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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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패로 쓰인 풍설서 (121-123) 아란타 풍설서



무역 교섭의 협상패로 쓰인 풍설서


1780년에 제4차 영란전쟁이 발발했다. 그로 인해, 네덜란드 선박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 또는 아시아 역내에서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일본 무역에 돌아갈 배가 부족하게 된다. 더욱이, 1787년부터 시작한 칸세이 개혁(寛政改革)의 일환으로, 1790년 이후 나가사키 무역은 "반감 무역(半減商売)"으로 정해졌다. 다시말해, 내항해도 되는 네덜란드 선박이 연 2척에서 1척으로 줄어들어, 거기에 상응해 무역량도 줄었다는 것이다. 다만, 2년 뒤 아담 락스만[1]이 네무로(根室)에 내항하여, 러시아에 관한 정보를 네덜란드로부터 들을 필요가 생긴 막부는, 네덜란드 무역에 대한 제한을 약간 풀었다.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네덜란드 글(蘭書)의 수집과 분석을 개시하고, 그 유용성을 인정했다고 여겨진다. 경영이 악화되어가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상관장을 일본에 5년간 주재시키는 일, 또 상관장의 참부(参府)를 매년에서 4년에 1번으로 줄일 것을 청원해, 선뜻 허가를 받았다. 

그러한 시대에, 유난히 강렬한 개성을 발휘한 상관장이 있다. 이삭 티칭(Isaac Titsingh)이라는 인물은, 유능한 상관장인 동시에 학자 기질의 교양인이기도 하여, 일본문화에 끊임없이 강한 흥미를 보였다. 일본 상관장을 3번에 걸쳐 역임한 뒤에도, 통사나 난학자들과 개인적인 서신을 이어나갔다.[2]

1784년 8월 19일, 일본 상관장을 3번째 맡기 위해 내항한 티칭은, 이례적으로 도착과 동시에 상관장의 지위와 권한을 인수인계 받았다. 그리고는 풍설서 서명을 거부한 것이다. 이 사이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상관장 일기의 기사를 보도록 하자.

상관장의 직책을 이어받자마자 나는, 회사 수입품의 가격 인상에 대해서도, 상관장에 대해 불명예스럽다 여겨지는 몸수색의 면제에 대해서도, 지난 상관장이 에도에서 제출한 요구가 거부된 사건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전 상관장의 보고에 의하면 몇 번이나 신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끔히 무마된 상태라고 하여, 나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동인도나 조국의 최신 정보를 통사들에게 제공할 때, 서류에 서명을 거부했다. 그 종이에 회사의 일본 무역이 쇠퇴한 것에 관한 안타까운 사정이 적혀있지 않는 한 서명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 해의 마치도시요리(町年寄)가 오후에 데지마에 나타나, 풍설서는 무역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서명 거부는 에도 막부가 나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여, 끝내 나를 설득시켜 최신정보(풍설서)에 서명하게 하였다.

이것은 무역조건 완화를 위해 상관장이 풍설서에 서명을 거부한 보기 드문 사례다. 나가사키 부교를 곤란하게 하려고 풍설서에 서명을 거부한 것이지만, 결국 설득되어 이 날 중에 서명을 한 것이다. 계획은 실패했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일부러 현지인 관료(地役人)중 급이 제일 높은 마치도시요리가 데지마에 찾아와 필사적인 설득을 할 정도의 사건이었다. 시급히 에도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풍설서에 상관장의 서명이 없으면 부교 만이 아니라 현지인 관료들도 질책을 피할 수 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11월 26일을 마지막으로 티칭은 일본을 떠나, 벵골이나 중국 등지에서 근무한 뒤, 유럽에 돌아갔다.[3]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1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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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92년에 아담 킬리로비치 락스만이 표류민 다이코쿠야 고다유 등을 데리고 홋카이도에 왔다. 이때 러시아는 어디까지나 표류민을 송환시킨다는 인도적인 목적을 내세웠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이들을 우호적으로 접대했다. 그리고 일본은 러시아와 교역을 할 의사가 없으며 앞으로 표류민 송환등은 일본의 대외 교섭 창구인 규슈의 나가사키로 올 것을 요구했다. 사실상 일본이 러시아의 교역 요구를 거절한 것이었으나, 러시아는 나가사키에서 교역하라고 허가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김시덕,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2015 : 메디치미디어), pp. 188.


[2] 이삭 티칭에 대해서는, 적륜 님의 
를 참조.

또, 타치바나 난케이의 서유기 中 84. 기기 (네덜란드)에 언급된 이사아테츠신키(イサアテツシンキ)와 동일인물.


[3] 〔⑥〕티칭 각하는 황제폐하(건륭제)께 대사(大使)로 부임해 중국에서 특별한 후대를 받았다.
1795년, VOC가 전해주는 소식을 통사가 받아적은 것으로 보이는 초안 中. (바타비아에서 미리 써서 갔을까? 참조.)

이 사절단에 대해서는, 적륜 님의 연경의 하란국 조공사절단 - 한 세계가 끝나갈 즈음 참조.


네덜란드 풍설서의 황금 시대 (118-121) 아란타 풍설서



네덜란드 풍설서의 황금 시대 


18세기 중엽, 일본에게 정보제공을 하는데 있어 네덜란드인에게는 경쟁 상대가 없었다. 네덜란드인이 말하는 것이라면 일본인은 뭐든지 믿는다고 상관장이 느낄 정도였던 것이다. 중국 발 정보는 유구나 조선을 경유해 흘러들어왔지만, 거기에 막부가 커다란 위협을 느끼는 요소는 없었다. 정크선은 더이상 동남아시아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인이나 스페인인 등 선교사의 밀입국도 중단되었다. 그때문에 오늘날 말하는 베트남 보다 서쪽의 정보는, 네덜란드인이 독점적으로 공급한 것이다. 

네덜란드인이 해외정보를 대체로 독점했다는 의미에서, 18세기 중엽은 네덜란드 풍설서의 황금 시대다. 게다가 막부는 네덜란드인이 건네는 정보를 더 이상 기타 주체와 비교하여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있는 나가사키 관료조차 이를 불안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시기, 구미 여러 나라가 세력 다툼을 벌인 주 무대는 벵골이나 실론 섬이었다. 일본의 전통적인 대외적 관심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막부는 흥미를 갖지 않은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구석에서 막부는 잠깐의 평온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막부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나 가톨릭 세력이 다시 일본에 다다를지도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근대"의 새로운 움직임은, 일본인 사이에서는 아직 위협이라고는 인식되지 않았다. 해외에 두려워할 만한 것이 없는 이상, 일본인은 네덜란드인에게 정보를 제공하도록 요구할 적극적인 이유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측에서도 따라잡아야만 하는 경쟁상대가 없어져, 정보를 제공하는 동기는 감소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네덜란드 풍설서는 대개 짧고 내용도 가볍다. 상관장 일기에도 내용이 아니라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만 적어놓은 경우가 많다. 

내용이 가볍다는 의미에서, 이 시기는 풍설서가 정체된 시대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아유타야 왕조의 멸망이나 플라시 전투, 미합중국의 독립 등, 당연히 전해야할 법한 대사건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 이를 상징한다. 

네덜란드 풍설서가 정체된 시대는, 동시에 일본-네덜란드 무역이 쇠퇴한 시대기도 했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주던 대일본 생사(生絲) 수입 무역은, 이제 풍전등화의 상태였다.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중국 생사의 집하지였던 대만을 1660년대에 상실한 이래, 회사는 통킹(베트남 북부) 산, 페르시아 산, 벵골 산 생사를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그러나 수출이 금지된 일본의 은을 대신해 통킹에 수출할 유력한 상품을 찾지 못한 채 통킹의 정세 불안도 겹치는 바람에, 1700년 회사는 통킹 무역에서 철수한다. 더욱이, 페르시아 산의 생사도 매입과 수송의 비용이 올라서 단념하였다. (1759년에는 페르시아 상관을 폐쇄). 1705년부터는 벵골 산 생사 만을 실어나르게 되었으나 이익은 오르지 않았다. 한편, 일본의 생사 생산은 순조로이 늘어났다. 1720년대에는 교토 니시진(西陣) 지역의 방직업(機業) 수요가 국내산 생사로 대개 충족되었다고 한다.

1641년에 포르투갈인 추방을 결정할 때, 막부는 네덜란드인으로부터 "포르투갈인이 가지고 오는 것과 동일한 양의 생사를 수입할 수 있습니다."라는 언질을 얻어낸 뒤에 최종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 정도로 수입 생사의 수요는 대단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자, 절대적으로 수입이 필요한 품목은 약재와 서적 정도 뿐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관심의 저하는, 자신들의 사회(그걸 "일본"이라고 인식하였는지는 별개로 하더라도)나 경제, 문화에의 자신감이나 자부심의 반영이기도 했다. 기근이 발생하거나 막부의 권위가 흔들리는 등 내부적으로 심각한 모순이나 문제를 떠안으면서도, 천하는 태평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이쿠(俳句)나 가부키(歌舞伎) 등 오늘날 우리가 자랑할만한 "일본"적인 문화가 성숙해나간 것이다.


출처: 松方冬子, オランダ風説書, (中公新書, 2010), pp. 11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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