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NHK]공자묘는 종교시설인가? - 일본 최고법원에서 판단 예정 기타 번역




공자묘와 정교분리를 둘러싼 소송 - 최고재판소는 대법정을 열어 심리하기로

2020년 7월 30일 4시 16분


일본 오키나와 현 나하 시가 관리하는 공원에 위치하여 유교의 교조(敎祖) 공자 등의 인물을 기리는 시설이 공원 사용료를 면제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에 해당)는 헌법의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을 위반하는지 여부를 15인의 재판관 전원에 의한 대법정(大法廷)에서 심리하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나하 시 공원에서 공자 등을 기리는 "공자묘(孔子廟)"는, 유구왕국 시대에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자손들이 설립한 단체가 시의 허가를 받아 2013년에 지은 것으로, 시에서는 공원의 사용료를 전액 면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나하 시에 거주하는 여성이 헌법의 정교분리에 위반된다고 하여, 시에 대하여 설치허가 취소와 공원사용료를 지불하게 할 것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해, 시 측은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는 시설로 종교시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후쿠오카 고등재판소 나하 지부는 "해당 시설은 종교시설로 간주해야하며, 정교분리를 정한 헌법에 위반한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 양측이 모두 상고하였습니다.

이 재판에 대해 최고재판소는 29일, 15명의 재판관 전원에 의한 대법정에서 심리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대법정은 행정처분이 헌법에 위반하는지 여부 등, 중요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 열리는 것으로, 나하 시의 행정처분에 대한 판단이 이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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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링크: https://www3.nhk.or.jp/news/html/20200730/k10012539851000.html



[하스다 타카시] 주인선 무역・니혼마치 관련 지도 고증 (3)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주석은 전부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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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여기서는 주인선 무역의 시대에 해당하는 시대의 베트남 각종 지명 표기에 대해 정리하지만, 그 전에 베트남어에서 고유명사 표기의 특징을 확인하도록 하겠다. 베트남 지명이나 고유명사 (사원 및 사당 등)에서는, 한자로 쓰고 한월음(漢越音, 베트남 한자음)으로 읽는 한자명(뗀 쭈, tên chũ)와 베트남어 고유어를 주로 쓰는 구어 이름, 속어명(뗀 놈, tên nôm)이 있다. 뗀 놈의 경우, 종종 한자표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쭈놈으로 표기할 수 밖에 없고, 어순도 베트남어 어순이 되는 경우가 많다.[7] 정확히 대응하지는 않지만, 浅草寺를 "센소우지"와 "아사쿠사데라"라고 2가지로 읽는 것과 비슷하다. 

17세기 중엽의 시점에서 존재한 것은 여조(黎朝) 대월국(大越國)이다. 대월(大越, Đại Việt)이라는 국호는 스스로를 부른 이름이지만, 중국이나 일본 등 한자문화권과 교류할 때는 당나라 안남도호부에서 유래해 역대 중화왕조가 부른 국호 "안남(安南, An Nam)"을 썼다.[8] 여조 베트남은 황제는 실권이 없고, 왕을 칭하는 정(鄭) 씨가 최고 권력자였다. 이 때문에 정씨 정권이라도 불린다. 그러나 정씨와 대적하는 완씨가 순화(順化)를 거점으로 두고 그 이남[9]의 지역을 지배하여, 여조 황실을 섬기면서도 독립세력으로 존재하였다. 다시 말해, 정치권력은 사실 상 둘로 분열되어있었던 것이다.[10] 또한, 현재 빙투언, 닝투언 성 지역에는 참파가 존재했고, 그보다 남쪽으로 바리아-붕타우 성 이서의 지역에는 캄보디아의 세력권이었다. 그러나 17・18세기를 통틀어 남진을 이어나간 완씨의 압박으로 인해, 이들 지역은 서서히 완씨의 영토로 편입되어갔다. 

[8] 일본 국내에도 안남(安南)을 통용하는 경우는, 모모키 시로우(桃木至朗)「근세 베트남 왕조의 '우리나라'」 키무라 히로시(木村汎), 응우옌 주이 중(Nguyen Duy Dung), 후루다 모토오(古田元夫) (편) 『일본 베트남 관계를 공부하는 사람을 위해』 (世界思想社, 2000년), 18-39쪽.

[10] 완씨의 입장에서 쓴 사료에서는 정씨 측을 "북하(北河)", 완씨 측을 "남하(南河)"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또한 구어에서는 전자를 당 응오아이(Đàng Ngoài, 바깥쪽), 후자를 당 쫑(Đàng Trong, 안쪽)이라고도 부른다.

현재의 하노이에 해당하는 지역의 당시 정식명칭은 동경(東京, Đông Kinh)이다. 서양 사료에서 정씨 정권 하에 있는 지역 및 그 지역을 지배하는 국가를 가리키는 "통킹(Tonkin / Tonking)"은 여기서 유래한다. 한편, 구어로는 께 쩌(Kẻ Chợ, 시장 지역)라고 불리었고, 서양 사료에도 종종 보인다. 나가즈미 지도, 키무라 지도, 아라노 지의 "케쵸우"라는 것은 이것을 가리킨다. [11] 또한, 리조(李朝) 이래의 승룡(昇龍, Thăng Long)도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일본 사료에는 완씨정권 및 그 지배 하에 있는 지역을 "교지(交趾)" 또는 "광남(廣南)"이라고 적고 있다. 교지는 유명한 "다옥 교지 무역 도해 회도(茶屋交趾貿易渡海繪圖)"에 "하내(河內)"라고 되어있듯이, "코우치(こうち)"라고도 읽는다. 이것은 한나라 때 홍하 삼각주에 설치한 교지군에서 유래하여, 10세기 베트남 독립 후에도 베트남 전의 별칭으로 안남과 함께 쓰인 용어다. 한편, 서양인은 완씨 지배 하의 지역을 "코친차이나(Cochinchina)", "코치시나" 등으로 불렀다. [12] 일본사료에서 중부베트남에 자리잡은 완씨 영토를 가리키는데 "교지"를 쓴 것은, 서양사료의 "코치시나", "코친차이나"를 옛 한문 문헌(漢籍)에 보이는 "교지(交趾)"라는 한자로 대입한 새로운 용법이라고 생각한다. 키무라 지도에서 베트남 남부에 있는 "코-친(コーチン)"이라는 카타카나 표기는 아무래도 적절한 표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또한 위치도 참파 대신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교지지나(交趾支那)"라는 표기는 필자가 아는 한 동시대 사료에 존재하지 않는다.[13]

 
[12] 말레이어 쿠치 치나(Kuchi China)를 음차한 것으로, 쿠치는 교지(交趾)의 고음(古音) 내지 광동어음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6세기 전반에 성립한 토메 피레즈의 "동방제국기"에서는 베트남 전체를 가리키며, 정씨와 완씨의 분립/대립에 따라 후자 만을 가리키게 되었으나, 로홈(Michel van Lochom)의 "아시아 지도(Carte de l'Asie" (1640년) 등, 베트남 전체 및 통킹을 주로 가리키는 사용법도 남았다.

안토니 리드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 2권 확장과 위기" (히라노 히데아키・타나카 유우코 번역, 호세이대학출판국, 2002년), 459쪽 주석1.
토메 피레즈 "동방제국기" (이쿠타 시게루 등 역주, 이와나미쇼텐, 1966년), 227-228쪽.
Li Tana and Anthony Reid eds., Southern Vietnam under the Nguyễn: documents on the Economic History of Cochinchina(Đang Trong), 1602-1777. (Singapore: ISEAS, 1993), pp. 2-3.

[13] 베트남을 식민 통치한 프랑스는 19세기 말에 응우옌 왕조 영토를 보호령 통킹(東京), 보호국 안남(安南), 직할식민지 코친시나(交趾支那)로 삼분하였다. 각각의 이름은 본고에서 다루듯이 근세 이전으로 소급되지만, 이들 이름이 가리키는 지리적 범위의 직접적 유래는 19세기 응우옌 왕조의 북기(北圻), 중기(中圻), 남기(南圻)라는 지리 행정적 구분이다. 


명나라 사람 장섭(張燮)의 『동서양고(東西洋考)』는 "교지(交阯)"[14]를 베트남 전체에 대입해, 그 일부인 완씨 영역을 "광남(항)"이라고 부른다. [15] 청나라 기록에도 완씨 영역을 광남이라고 한 것이 다수 있다. [16] 네덜란드 사료는 "뀌남(Quinam)을 쓰고 있으나, 것은 광남의 중국어 남경음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17] 일본사료에 보이는 "광남"에도 "쿠이나므クイナム"라고 읽는 것과 "쿠와우난くわうなん(코우난こうなん)"이라고 읽는 두 가지가 있다. [18]

[14] 교지(交趾)와 교지(交阯)는, 양쪽 모두 예로부터 쓰여왔으나 일반적으로는 교지(交趾)를 많이 쓰는 편이다.


완씨 영역은 순화(투언 호아: 현재의 꽝빙 성과 트아 티엔-후에 성)와 광남(꽝 남: 현재의 꽝남 성 및 다낭 중앙직할도시 이남의 지역)이라는 2 지역으로 나뉜다. 일본사료에 보이는 "순화(順化)"는 "손하ソンハ", "스노하이スノハイ" 따위로 읽힌다. 이와오 세이이치는 서양사료의 세노아(Senoa), 시노아(Sinao), 신호아(Siñhoa) 등에 대응하여, 모두 투언 호아(Thuận Hoá)를 음차한 것이라고 하지만, 필자는 베트남어의 쓰 호아(xứ Hoá)의 음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22] 완 씨의 본거지는 일관되게 순화에 있었으나, [23] 상술한 대로 완씨 영역 전체를 "광남"이라고 부르는 표현이 존재한다. 광남에는, 완씨 영역 최대 교역항인 호이안(Faifo)[24]가 존재했기 때문이다.[25]

[22] 교지(交趾)와 교지(交阯)는 예로부터 혼용되어왔으나, 일반적으로는 교지를 쓰는 경우가 많다. 


위와 같이, "안남"이나 "교지" 등의 지명이 가리키는 범위는 복수의 개체이기 때문에 용례를 개별로 검토할 필요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주인장에 기록한 도항지로 한정한다. 주인장에 기록된 도항지 및 실제 주인선의 목적지에 대해서는 이제껏 이와오 세이이치의 『신판 주인장 무역사의 연구(新版 朱印船貿易しの研究)』 127쪽의 표 2번(연차별 지방별 도항 주인선 선수 표)가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에 한정하더라도 이 표는 171쪽 표 4번(주인선 도항지별 집계표)과 별도의 설명도 없이 일부 수치가 불일치하는 등 불충분하거나 불친절한 점이 있기에 그 점을 보충하고자 한다. 주인선 무역 시대의 초기에는 도항지로서 안남(安南), 교지(交趾), 동경(東京), 순화(順化), 광남(廣南), 가지안(迦知安), 천남국(天南國)이 보인다. [26] 안남(安南)에는 정씨 영토로 도항한 경우와 완씨 영토로 도항한 경우 모두가 포함되지만, 1611년에 발급이 중단된다. 이를 대신하여 등장하는 것이 교지(交趾)다. 1612년 이후는 정씨 영토는 동경(東京), 완씨 영토는 교지(交趾)라는 구분이 정착하고, 전체 수량으로 보더라도 2곳이 다른 곳들을 훨씬 뛰어넘는 다수를 차지한다.

순화는 표 2번에서는 1이지만, 표 4번에서는 2로 나와있다. 이는 케이쵸우慶長 11년(1606) 9월 19일부 천남국 행 주인장(하라 야지에몬原弥次右衛門에게 발급)이 실제로는 "스노하이"로 항해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27] 4번 표에서는 순화로 계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광남은 2번 표에 보이지 않지만, 본문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28] 교지로 계산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2번 표는 한눈에 망라하게끔 집계한 것으로 보이면서, 이와오가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숫자를 계산한 부분이 있기에 주의가 요구된다.[29] 가지안 행 주인장은 케이쵸우 9년(1604)의 한 통 밖에 안 나왔지만, 이것은 베트남어 께 찌엠(Kẻ Chiêm, "참족 사람의 땅"이라는 뜻)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호이안 등 현재 꽝남 성 및 다낭 중앙직할시 주변, 또는 그 중심지에 있는 광남영(廣南營)을 가리킨다. [30]

[26] 점성 행 주인장도 실제로는 완씨 지배하의 항구로 도항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여기서는 배제한다.


[하스다 타카시] 주인선 무역・니혼마치 관련 지도 고증 (2)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 [지도3: 나가즈미 지도] 나가즈미 요우코, 『朱印船』 (吉川弘文館, 2001년), 237쪽. 
역주: 항로 상의 주요 국가명, 도시명 정도를 기재한 지도임을 알 수 있다. (굵은 글씨는 기항 도시명)


▲ [지도4: 아사오 지도] 『주간 아사히 백과 일본의 역사 31 중세에서 근세로 - ⑨ 데지마와 토우진마치』(아사히 신문 출판, 1986년), 269쪽.
역주: 항로가 닿는 곳 외에도 지명을 다수 표기해놓았으며, 각각 어떤 형태의 일본인, 화인 거주 구역이 있었는지를 기호로 명시하고 있다.




II

아라노 선생님께 받은 서신에 따르면 "일본의 시대사" 지도는 나가즈미 요우코 『주인선』 (吉川弘文館, 2001)의 소재 지도[지도3: 나가즈미 지도]와 "주간 아사히 백과 일본의 역사 31  중세에서 근세로 - ⑨ 데지마와 토우진마치"(아사히신문출판, 1986년)의 소재 지도[지도4]를 조합하여 요시카와코우분칸의 편집부에게 작성을 의뢰했다고 한다. "루-킹"이 기재된 것은 [지도 4]였다. 이 지도는 "니혼마치와 토우진마치: 안과 밖"(집필: 나카무라 타다시)이라는 부분에 게재된 것이지만, 목차에 의하면 아사오 나오히로(朝尾直弘), 시바 요시노부(斯波義信), 요코이 시게유키(横井成行)의 3명의 합작이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아사오 지도"라고 부르기로 한다.

아사오 지도에는 "주인선 항로와 일본인, 화인 재주지(朱印船航路と日本人・華人在主地)"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일본인에 관련해서는 니혼마치와 일본인 재주지가 구별되어있다. 이 구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필자가 아는 한 이와오 세이이치(岩男誠一) "근세 초기의 대외관계"(국사연구회 편저 "이와나미 강좌 일본역사", 이와나미쇼텐, 1934년)의 부록, "남양 이주 일본인 분포도(南洋移住日本人分布図)"로 소급되며, 이후 다소의 개정을 거치면서 이와오의 저작에 종종 등장한다. 아사오 지도도 이 이와오의 저작 중에 있는 지도를 이어나갔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와오의 여러 저작에서 니혼마치의 정의는, 일본인 만이 특정 지역에 집단을 이루고 집락을 형성한 경우를 "니혼마치"라고 한다는 정도로, 규모나 자치・내부통제 여부, "일본인"의 범위 등을 포함한 적극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 "일본인 재주지"는 정의에 가까운 것조차 보이지 않고, 일본인과 타국인이 잡거하는 경우인 것이, 니혼마치에 비해 완화된 정의를 논리적으로 유추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일본인의 잡거지", "일본인 거주지" 등 표기도 일정치 않다. 또한 관련 연구나 고등학교 역사 교육 교재에서는, 니혼마치(日本町)와 니혼진마치(日本人町)라는 두 가지 표기가 병립하나, 이것도 필자가 아는 한 구별・정의되어있지 않다.

화인(華人)에 대해서는 "화인 활동지(華人活動地)"로서 남송(12~13세기), 원(13~14기), 명(16~17세기)에 해당하는 서로 다른 색상의 3가지 ●표시가 쓰였다. 상당히 장기간의 데이터를 한 장의 지도에 그린 것이기에, 같은 지도임에도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대체로 한정된 주인선 무역 및 니혼마치 관련 정보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 때문에 지명의 표기도 화인 관련의 지명은 12~17세기의 한 시점에 존재했다는 표기가 되고, 주인선 무역시대의 문맥 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 [지도 5: 아사오 지도에서 하노이 부근 확대도]


아사오 지도의 하노이 근교를 확대한 [지도 5]에 나와있듯이, 현재의 하노이 부근에는 송원명 세 시대의 ●표시가 있고, 그 오른편에 "루-킹"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하단에 "교도(交都)"라는 문자와 함께 "일본인 재주지"를 가리키는 ▼표가 나와있다. 즉 아사오 지도의 단계에서는 "루-킹"은 화인활동지(거주지)의 명칭으로, "일본인 재주지"는 "교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도 제작의 사정 상, 하노이 부근에 많은 기호가 병치되어있기 때문에,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장소에도 기호가 배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아라노 지도 작성의 단계에서 모종의 실수로 인해 "루-킹"이 "일본인 재주지"로, 홍하를 사이에 두고 케쵸우의 건너편에 그려지는 바람에 케쵸우와 루-킹이 분리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루-킹 = 케쵸우 = 통킹(東京) = 현재의 하노이인 것이고, 모두 동일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케쵸우에 일본인이 재주한 것은 확실하나, 니혼마치 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6]는 없기 때문에 위치의 문제는 이로써 설명이 된다. 더욱이, 아라노 지도, 키무라 지도에서는, 루-킹 이외에도 통킹과 케쵸우와 별도의 마을인 듯이 읽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지도를 전재하는 경우에는 적절한 범례와 주석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마을의 위치는 케쵸우의 장소가 정확하다.

"루-킹(龍京?)"은, 중국 사료에 그러한 표기가 있어 중국사 및 화교사를 전문으로 하는 시바 선생님이 채용하였다고 생각하였으나, 필자가 아는 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교도(交都)"는 "교지의 도읍"이라는 것으로 추측하지만, 마찬가지로 전거를 찾지 못하였다. 둘 다 추후에 재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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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기서 니혼마치의 요건은 위에서 서술한 이와오의 정의를 따른다.





[하스다 타카시] 주인선 무역・니혼마치 관련 지도 고증 (1) 용틀임하는 동아시아 근세



[지도 1: 키무라 지도] 키무라 나오키 「근세의 대외관계」
『이와나미 강좌 일본역사 근세 2』, 이와나미쇼텐, 2014년), 119쪽


[지도2: 아라노 지도] 아라노 야스노리 편저 『일본의 시대사 14 에도막부와 동아시아』 (요시카와코우분칸, 2003년), 31쪽




주인선 무역・니혼마치 관련 서적 소재 지도 
베트남 부분의 표기에 대해


하스다 타카시(蓮田隆志)


I

이번에 간행을 시작한 『이와나미 강좌 일본역사』 근세 2편에는 키무라 나오키(木村直樹)의 「근세의 대외관계」라는 논고가 있고, 그 119쪽에 「주인선 기항지와 일본인 마을・화교 마을」이라는 지도가 게재되어있다. [지도1 : 키무라 지도] 여기에 따르면, 「케쵸우」(현재의 하노이)에 화교 활동지가 있었고, 홍하(紅河 sông Hồng)을 낀 연안에 「루-킹」이라는 별도의 지역이 있어, 그곳에 「일본인 재주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되어있다. 지도의 출전은 아라노 야스노리(荒野泰典) 편저 『일본의 시대사 14  에도막부와 동아시아』(요시카와코우분칸, 2003)으로 되어있다. [지도2 : 아라노 지도]

이 "일본인 재주지 루-킹"의 실체에 대해, 필자는 오래도록 의문을 가졌으나 추궁하지 않은 채로 두었다. 그리하였던 것은, 여기에 해당하는 지명이 떠오르지 않았을 뿐더러, 17세기 중엽 통킹 정권에 개입하며 활약한 상인, 와다 리자에몬(和田理左衛門)[1]이 현재는 요업(窯業)으로 유명한 하노이 건너편 연안 마을, 밧짱(Bát Tràng, 鉢塲)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냈음을 현지의 가보(家譜)를 통해 확인할 수 있고[2], 시대도 일치하기 때문에, 서양 사료에 그러한 기록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배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필자는 아라노 야스노리 선생님께 이 사안을 질문할 기회를 얻었다. 본고에서는, 그 자리에서 판명한 바를 소개함과 동시에, 이 기회에 대표적인 주인선 무역・니혼마치 연구서에 수록된 지도의 베트남 부분에 관하여 현재의 연구상황을 정리하고, 정정 및 주석을 더하고자 한다.

이들 지도는 중고등학교의 (일본사와 세계사 모두를 포함한) 역사교육 및 대학 교양강의용 교재 작성, 전문분야 밖의 사람이 교과서 및 개설서를 집필할 때 의외로 큰 영향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양(南洋) 니혼마치 및 주인선 무역의 연구는 일본사와 (동남아시아 각국사 뿐 아니라 중국사 지식도 필요한) 동양사, 서양사(동서교섭사)가 겹치는 흥미진진한 영역임에도, 전후(戰後)에는 어떤 분야에서도 비주류(傍流)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개별 사실확인 단계에서 연구 성과가 서로 반영되기 어렵고, 전전(戰前)부터 오류가 그대로 이어지는 일조차 있다.[3] 사실 이 점은, 한번 출판하면 수정이 어려운 학술서 보다도 정기적으로 개정하는 중고등학교 지리 역사 과목의 교재가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지만, 그 성격상 "수정된 결과" 만 보여지고 그 근거가 명시되는 일은 대체로 기대하기 어렵다.[4] 본고는 베트남 부분에 한정하지만, 가능한 한 자세히 해설을 더함으로써, 고전적 연구의 어느 부분이 지금까지도 가치를 지니고, 어느 부분이 변경되어야 하는지를 명시하고자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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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실은 나가즈미 요우코(永積洋子), 『주인선(朱印船)』 (吉川弘文館, 2001년), 209-211쪽 참조.

[2] 판 다이 조안(Phan Đại Doãn), "17세기 베트남 - 일본인 가족에 대하여: 밧짱의 "완씨가보(阮氏家譜)"를 통해" (오오니시 카즈히코大西和彦, 번역), 사쿠라이 키요히코(櫻井清彦), 키쿠치 세이이치(菊池誠一) 편저 『근세 일본 교류사: 니혼마치・도자기』 (柏書房, 2002년), pp. 89-93. 

[3] 교과서에 채용된 경우, 입시 문제에 출제될 가능성도 있다.

[4] 물론, 전문서보다 간략히 기록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틀린 옛 정보를 게재하지 않는 것만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5] 여기서 기록하였듯이, 본고는 고등학교 교육현장을 위한 정보제공도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에, 원출처가 외국어 연구더라도 (그럴 만 하면 해당기록이 있는) 일본어 문헌을 우선으로 인용한다.

이 밖에 모모키 시로우 선생님이 개인 블로그엣에서 정보를 게재하는 등, 개선의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모모키 시로우 「동남아시아사 오해와 진실」 (「제4회 전국 고등학교 역사교육 연구회」 발표자료 (2006년 8월 2일), http://www.let.osaka-u.ac.jp/toyosi/main/seminar/2006/momoki_honbun.pdf, 최종열람일: 2015년 1월 1일) 5-6쪽, 동일 출처 『이해하는 역사 재미있는 역사 쓸모 있는 역사』 (오사카대학 출판회, 2009년) 196쪽 주석 3도 참조할 것.




1783년 네덜란드 풍설서 橘南谿의 서유기(西遊記)



18세기 의사 타치바나 난케이의 여행기, "서유기(西遊記)"에는 네덜란드 관련 이야기가 있는데요. 제가 6년 전에 소개한 84. 기기 (네덜란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때 번역한 것은 출판본 서유기의 내용이고, 사본 서유기에는 더 추가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 해의 네덜란드 풍설서가 실려있다는 점입니다. 

시기 상으로는, 이사크 티칭이 풍설서 서명 거부를 시도(1784)하기 전 해입니다. 여기서는 그 풍설서의 내용과 타치바나 난케이가 이에 대해 한 말을 번역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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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明三癸卯年風説書
텐메이 3년 (계묘년) 풍설서


一、当年来朝之阿蘭陀船一艘、六月七日咬(口+留)出帆仕り、海上無別条、今日御当地へ着岸仕候。外に類船無御座候。
하나, 올해 내조한 아란타(네덜란드) 선박은 1척으로, 6월 7일 교류파를 출항하여, 해상에서 별일 없이 오늘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이 밖에 다른 배는 없습니다.

一、去々年御当地より帰帆仕候船、直にモラカ国へ罷越、諸用等仕舞、去年八月朔日海上無滞咬(口+留)へ着船仕候。
하나, 재작년 일본에서 귀항한 배는 곧바로 몰루카 국으로 가서, 제반 업무를 마치고, 작년 8월 초하루에 해상에서 지체없이 교류파에 도착했습니다.

一、去々年も申上候フランス国、イスパンヤ国、一致仕、ヱゲレス国と合戦に及び、近国の儀に御座候に付、阿蘭陀国専用心仕、軍用之儀、急に咬(口+留)表へ申越候に付、兵糧等積乗、追々差使申候。然る所、其末、阿蘭陀国へも乱入仕候に付、専、防戦之用意仕候に付、国中も不穏候旨、申越候。
하나, 재작년에도 말씀드렸듯 프랑스국, 이스판야국(스페인)이 힘을 합쳐 에게레스국(영국)과 전쟁에 이르러, 가까운 나라의 일이 되었기에, 아란타국은 오로지 예의주시하여, 군비(軍用)의 일을 급히 교류파 쪽으로 전언하였고, 병량 등을 적재하여, 추후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급기야 아란타국에도 전란이 들어서, 오로지 전쟁을 막는 대비를 하기에, 국내도 평온치 못하다는 뜻을 말씀드립니다.

一、去々年申上候コスト国商館に於てマカサル国之人と争論中、同所隣国モゴルと申大国より押寄奪取候て、同所の商館潰れに及び申候に付、彼地の産物買入不相成、咬(口+留)表出帆仕難く、去年来朝不仕候。当年とても同様に御座候へども、年来通商御免被仰付候儀に付、漸、取凌ギ此節来津仕候
하나, 재작년 말씀드린 코스트국(코로만델 해안) 상관(商館)에서 마카사르국 사람과 쟁론(爭論) 중, 이곳에서 가까운 무굴이라 하는 큰 나라에서 침공하여 약탈을 하니, 이곳의 상관이 괴멸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기에, 그 땅의 산물을 매입하지 못 하게 되고, 교류파 쪽에서 출항하기 어려워, 작년에 내조(來朝)하지 못한 것입니다. 올해도 대단히 마찬가지입니다만, 여러 해 동안 통상 허가(通商御免)를 분부받아온 것이기에, 겨우 빠져나와서 이제야 내항한 것입니다.

一、去々年申上候蝦夷近辺より漂流仕候者をリユス国え留置、日本詞稽古仕候風説、本国より申越候得共、其後一向不承及候。
하나, 재작년 말씀드린 에조(蝦夷) 근방에서 표류한 자[1]는 류스국(러시아)에 억류되어, 일본어 교습을 하고 있다는 풍설을 본국에서 전하였으나, 그 후 줄곧 들은 바가 없습니다.

一、去々年御当地より帰帆仕候カビタン、アシント・ワヱルレンヘイト儀、於船中病死仕候。依之右代り去々年迄帳面懸り之儀相勤候ヘンデレキ・カスプル・ロンベルゲへ新役カビタン申付候て此度渡海仕候。
하나, 재작년 일본에서 귀항한 카피탄, 아런트 빌럼 페이트는, 선상에서 병사(病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 대신 재작년까지 장부 담당을 역임한 헨드릭 카스파르 롬베르흐를 신임 카피탄으로 임명하여 이번에 건너왔습니다. 

一、此節、洋中、台湾近辺にて唐船三艘見懸候得共、日本渡海の船とは相見へ不申候。
하나, 이 때 바다에서 대만 근처에서 당선(唐船, 정크선) 3척을 보았습니다만, 일본으로 건너오는 배는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右之外、相替之風説無御座候。
이 밖에 다른 풍설은 없습니다.

古カビタン イサアカ・テツシンキ
구 카피탄,               이사크 티칭


新カビタン ヘンデレキ・カスプル・ロンベレゲ
신 카피탄,              헨드릭 카스파르 롬베르흐





[타치바나 난케이의 해설]

위 두 사람의 구상서(口上書)[2]를 아란타통사가 화자(和字)로 고쳐서 말씀올린다. 교류파국은 과거에 아란타인이 와서 지점(出店)을 세우고 거주하는 곳이다. 고로 일본 등 동방의 나라에 건너올 때는 반드시 교류파에서 배를 준비하고, 화물을 실어넣어 출항하는 것이다. 그 까닭에 풍설서에도 교류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 예년에는 2척 씩 오던 것이었지만 근년에는 그 본국에 변이 있는 까닭에 1척 씩 오고, 호랑이 해(1782)에는 1척도 오지 않았다가, 토끼 해(1783)에 다시 겨우 1척이 왔다. 이 까닭에 풍설서에도 재작년이라고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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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조 근방에서 표류한 자: 다이코쿠야 코우다유우(大黒屋光太夫)를 가리킨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적륜 님의 글 "오로시아국 이야기" 참조.

[2] 두 사람의 구상서: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상관장과 여름에 파견되어온 신임 상관장이 둘 다 나가사키에 근무했고, 때로는 둘이서 '신新 구舊 상관장'으로 행동했다." (부교의 호불호에 맞춰 제출한 풍설서? 中)
※구상서(口上書): 말로 설명한 것을 다시 글로 적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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