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어우 락이라는 나라는 없어 인도차이나 ~Indochine~


이번 수능의 "동아시아사" 과목 문제라고 합니다.
저 5번 선택지의 "어울락(어우락) 왕국"에 대한 글을 번역해보아야겠군요.


Liam Kelley 교수님의 There was Never a Kingdom called "Âu Lạc"을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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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락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필자는 어우 락 왕국(甌) 이야기를 듣는데 질렸다. 그 어떤 나라의 이름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계속해서 입에 올리는 것이다. 

오늘날 "어우 락"이라는 용어는 안양왕(安陽王, 안즈엉브엉)이라는 왕이 기원전 3세기 홍하 삼각주 지역에 세웠다는 왕국의 이름으로 일컬어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안양왕이라는 사람이 왕국을 세웠는지 증명하기에 충분한 (문헌적, 고고학적) 역사적 근거는 없다. 안양왕이 홍하 삼각주 지역의 지배 계층을 공격해서 굴복시켰다는 문헌 기록도 있고, 오늘날 "꼬 로아(Cổ Loa)"라고 불리는 곳에 당시 이미 존재했던 성벽 안에 왕궁을 지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밖에는 이 "왕국"에 대한 정보가 없다. 그러므로 안양왕이 실제로 "왕국"을 다스렸는지는 말하기 어려운데, 꼬 로아 성벽 너머까지 진정 "지배"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관료를 파견해서 지방을 다스리게 했을까? 세금은 걷었을까? 여기에 대한 정보는 없다.


이 "왕국"이 "어우 락"이라고 불렸다는 언급도 당시로부터 약 1700년이 지난 15세기에나 등장한다. 영남척괴(嶺南怪, 링 남 칙 꽈이)와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다이 비엣 스 끼 또안 트)라는 책인데, 이 책들은 어찌 된 일인지 이때까지 한 번도 기록된 적이 없는 먼 옛날에 대해 방대한 정보를 "밝혀낸다"...

필자는 여기 등장하는 문제적인 정보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어우 락"이라는 이름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전통"일 뿐이다.  

안양왕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이자 유일하게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기록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아주 믿을 만하다고는 할 수 없다)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인데, 수경주에는 보다 조금 이른 시기의 문헌 몇 편이 인용되어있다. 


수경주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교주외역기에 말하길, 교지(交趾)가 옛날에 아직 군현이 없었을 때, 토지에는 락밭(雒田)이 있었고, 그 밭은 조수(潮水)의 오르내림을 따랐다. 그 밭을 개간해서 먹고사는 백성의 이름은 락민(雒民)이었다. 락왕(雒王)과 락후(雒侯)를 세워 여러 군현을 다스렸다. 현에는 여러 락장(雒將)이 있었다. 락장은 구리 도장(銅印)과 푸른 끈(青綬)을 가졌다.


交州外域記曰,交趾昔未有郡縣之時,土地有雒田,其田從潮水上下,民墾食其田,名為雒民。設雒王雒侯主諸郡縣。縣多為雒將。雒將銅印青綬。

"이후 촉나라() 왕자가 병사 3만을 이끌고 와서 락왕, 락후를 토벌했고 여러 락장을 복속시켰다. 촉나라 왕자는 그리하여 안양왕(安陽王)이 되었다."  

後蜀王子將兵三萬來討雒王、雒侯,服諸雒將,蜀王子因稱為安陽王。

"이후 남월왕(南越王) 군위(郡尉) 타(佗)가 무리를 이끌고 안양왕을 쳤다. 안양왕에게는 고통(皐通)이라는 신인(神人)이 밑에서 보좌하였는데, 안양왕에게 귀신을 다스리는 석궁[1] 한 장(張)을 만들어 한 발을 쏘면 300명을 죽였다. 남월왕은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물려 무녕현(武寧縣)에 자리잡았다."

後南越王尉佗舉衆攻安陽王,安陽王有神人名臯通,下輔佐,為安陽王治神弩一張,一發殺三百人,南越王知不可戰,却軍住武寧縣。

"진태강기(晉太康記)"를 보건대, 이 현은 교지에 속해있다. [남]월나라에서 태자[조타의 아들]를 보냈는데 이름이 시(始)였다. 안양왕에게 항복하고, 신하를 칭해 그를 섬겼다. 안양왕은 [고]통이 신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를 무례하게 대했다. 통은 결국 떠나면서, 왕에게 말였다. '이 석궁을 가지면 천하의 왕이 될 수 있고, 이 석궁을 못 가진다면 천하를 잃을 것입니다." 그리고 통은 떠났다. 

按《晉太康記》,縣屬交趾。越遣太子名始,降服安陽王,稱臣事之。安陽王不知通神人,遇之無道,通便去,語王曰:能持此弩王天下,不能持此弩者亡天下。通去。


"안양왕에게는 미주(媚珠)라는 딸이 있었는데, 시(始)가 단정한 것을 보았다. 주는 시와 교통하였다. 시가 주에게 묻기를, 아버지의 석궁을 가져와 보여달라고 하였다. 시는 석궁을 보고는, 석궁을 몰래 톱으로 끊고는, 남월왕에게 도망쳐 돌아가 보고하였다.   

남월은 병사를 이끌고 공격하였다. 안양왕은 석궁을 쏘았으나, 석궁이 부러져 결국 졌다. 안양왕은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쳤다. 지금 평도현(平道縣) 뒤에 왕궁성이 보이니 그 옛터다.

安陽王有女名曰媚珠,見始端正,珠與始交通,始問珠,令取父弩視之,始見弩,便盜以鋸截弩訖,便逃歸報南越王。南越進兵攻之,安陽王發弩,弩折遂敗。安陽王下船逕出于海,今平道縣後王宮城見有故處。 



이야기는 이렇다. 말했듯이, 안양왕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왕국"을 다스렸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 왕국 이름이 "어우 락"이 아니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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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獠子)가 석궁을 잘 다뤘다는 내용과 연결짓는 이들도 있다. 


P.S.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027옥저(沃沮)028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이 나라로 돌아와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 딸에게 알려서 말하기를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병력이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다. 그런 까닭에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면(面)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쪼개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아 대비하지 못하였다. 우리 병력이 갑자기 성 밑에 도달한 연후에야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을 멸하려고 청혼을 해서 그 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고,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병기와 기물을 부수게 하였다.”029고 한다

중러무역 전쟁, 그리고 대황 수출금지령 Recipes Project~사후약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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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가(珠巢街)에서 저를 찾으셔요 - 청나라에서 만병통치약으로 통한 대황 환약 

허 비엔(He Bian)

18세기 말, 화기삼이라는 미국산 인삼이 청나라에서 새로운 틈새시장을 열고 있었다.[1] 그와 동시에, 청 제국의 북서부 지방에서 채취한 대황(大黃) 뿌리는 중국 상인들에 의해 동남부 연안까지 운반되어 칸톤에서 외국인 고객들에게 판매되고 있었다. (그림1) 대황 교역의 일부는 유구 왕국(오늘날 오키나와 열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유구국은 청나라의 조공국인 동시에 서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세계 무역의 주요 거점이었다.[2] 1789년 청나라 조정은 유구 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청나라가 대대적인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던 상대인 러시아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황을 판매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청나라가 고안한 전략에서 대황은 무척이나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는 유럽인들이 대황을 워낙 많이 수입해서 하루라도 대황이 없으면 못 버틸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림 1. 중국 대황 (혹은 터키 대황, Rheum palmatum): 열매가 열리는 부위인 꽃대와 이파리 그림. 
M. A. Burnett의 그림을 본 뜬 아연 판화. 1842년 경. 출처: 웰컴 도서관, http://wellcomecollection.org/works/cvty3qqk 

그렇다면 과연 근세 중국과 유럽의 의약학적 시각이 너무 다른 나머지 대황의 성질에 대해 동의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까? 고전 중국 의서는 대황이 "몹시 찬" 성질을 띈 약재라고 기록하였고, 이후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의사들은 찬 성질의 대황을 차가운 기운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써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대황을 만병통치약처럼 쓰는 러시아인은 (그리고 이 근세 영국에서의 대황에 관한 글에 보이듯이, 다른 서양인도) 청대 중국인들과 체질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3] 다시 말해, 의약학 이론은 좁힐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차이를 가시화했다. 

그러나 최근 필자는 청대 약방문 책을 읽으면서, 청나라에서도 대황이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이 쓰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경(嘉慶, 1796-1829) 연간에 등장한 편용양방(便用良方)이라는 문헌을 읽어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2권 분량 밖에 안 되게) 간결하고 (목판으로 찍어) 인쇄 품질이 아주 좋은 편용양방은 증상별로 환약, 가루약, 술에 타먹는 약, 탕약을 분류한다. 쪽수로는 120쪽 분량이고, 대부분의 약방은 몇 줄 길이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13쪽이나 차지하는 몹시 긴 약방문을 보고는 놀랐다. 비수청녕환(秘授淸寧丸)이라는 이 약방은 "수십 근"이나 되는 양질의 대황 뿌리가 주재료다. 껍질을 깨끗이 벗기고 쌀뜨물에 담군 다음, 채썰고, 햇볕에 말리고, 3일 간 "그을음 없는 좋은 황주(無炭好黃酒)"로 가공한 다음, 15차례 찜통에 들어가는 길고 정교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매번 찔 때마다 다른 약초가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결과물로 나온 대황 반죽을 "누런 우유"(우유가 없으면 대신 불에 익힌 꿀), 사내아이 소변, 생강즙과 섞어서 작은 환약으로 빚는다. 약방문에 따르면 두통에서 출혈 증상과 부인병까지 이르는 수백 종의 일반 병명을 비수청녕환으로 고칠 수 있다고 했다. 

그림 2. 나본립 편저. 편용양방. 2b권, 50b쪽. 1796-1820년경. 프린스턴 대학 도서관. 
http://pudl.princeton.edu/objects/fn107159v에서 PDF 다운로드 가능.

필자는 더 이른 시기의 중국 의서에서 이 약방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초탐 결과에 따르면 아무리 일러도 17세기부터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비수청녕환은 18세기에 널리 유행하였는데, 당시 약방을 기록한 서적들을 보면 얼마나 널리 퍼져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편용양방의 마지막 쪽(그림 2)을 보면, 편저자 나본립(羅本立)은 중국 남서부 귀주(貴州)에 파견나갔을 때 대황 환약을 잔뜩 만들어놓았다면서 긴급시에는 독자들이 "주초가(珠巢街)에 있는 우리집까지" 몸소 찾아와서 "병부에서 일하는 나씨네 집(兵部羅宅)"을 물으면 된다고 한다. 청대의 북경에 위치한 골목인 주초가는 자금성 근처였고 당시 부동산 가치로 따지면 노른자위 땅이었다. 국경 지방에서 복무한 무관이었던 나본립은 당대 의학적 관습에 덜 매여있었고 이처럼 정교한 환약을 제조하기 위한 금전적, 정치적 자본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당시에는 나본립 같은 무관들이 이끄는 보건/의학의 하위문화가 고전적 처방과는 별개로 존재했던걸까? 

마지막으로 이 약방문을 통해 근세 중국에서 서로 다른 문화세계가 연결되어있었다는 힌트를 찾아볼 수 있는데, 중세 문헌을 꼼꼼히 살피며 고대 문헌의 흔적을 추적한 손성연(孫星衍)이라는 유명 학자가 학술 서적을 내면서 똑같은 비수청녕환 약방을 출판했다는 것이다. 고대 문헌 사이에 청대 문헌을 끼워넣었다는 것 때문에 현대의 문헌학자들은 혼란을 겪었고 심지어 비수청녕환의 약방문을 쓴 주인공이 7세기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손성연은 이것이 당대의 약방문이는 것을 명확히 밝혔을 뿐 아니라 대황이 뜨거운 기운과 찬 기운의 질병을 모두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의 효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정교한 학술적 주장을 덧붙였다. 손성연은 또한 "상스러운 의사들"은 비수청녕환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누구나 다 이 처방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의사로서의 생업이 끊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황을 놓고 볼 때는 청나라에서 러시아인들에 대해 상상한 것 만큼 당대 중국의 문인과 무인도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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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 이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는 창 처챠(Chang Che-Chia)가 쓴 훌륭한 글(페넬로피 바렛 번역)을 추천한다. 

(역주: 창 처챠의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청나라 조정은 대황이 변비약이라는 중의학 이론에 따라 러시아의 대황 수입을 이해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생선을 주식으로 하는 러시아인이나 육류와 유제품을 먹는 영국인의 식습관 때문에 대황과 차를 많이 필요로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정작 서양 의학에서 대황은 변비약을 포함한 다양한 약에 들어가는 재료였을 뿐이다. 이렇듯 중국과 유럽의 의학 이론의 차이에 따라 대황의 효능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달랐다는 주장에 대해 허 비엔은 자신의 주장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역주:
[1] 18세기 말의 화기삼 교역에 대해서는, 적륜재에서 1784년 화기국 뉴욕, 화기삼(花旗蔘)의 출현... 참조.

[2] 유구국의 약재 교역에 대한 또다른 에피소드는 [느릿느릿 유구만화 21] 유구의 다시마 편 참조.

[3] 서양과 동양의 서로 다른 체질, 그리고 먹거리에 대해서는 역시 적륜재의 18세기 동아시아 크로스보더 파티장 - 왜관 그리고 데지마 (下) 를 참조.
"자,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타이먼 스크리치는 이런 설명을 위의 책에서 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외국인들을 접하면서 이들이 어떻게 그들과 다른지 같다면 어떻게 같은지와 같은 의문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체신서와 같은 네덜란드 외과의학서가 번역되고 난학자들이 주로 난방의(蘭方醫)들의 분야에 천착하면서 해부와 분석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의견에 동의하는지는 차치하고, 음식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의문이 되고 해석이 됩니다. 이방인들은 일본인이 몸에 안좋다고 꺼리는 음식(주로 육식이겠지요)을 먹는데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다른 인종의 외양이 다른 것이 요리 탓이라면 다른 나라 음식을 먹으면 결국 이방인의 신체가 되는가? 그런데 우선 점차 중국요리가 퍼지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구나 하는 이해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통신사가 가는 루트를 통해 조선 음식의 조리법이 전해지게 된 것도 조금씩 이해가 확장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란다 음식의 경우는 여전히 상당히 이해가능한 레벨 저 너머에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4] 저자는 고전 의서에 기반한 문인 및 유의(儒醫) 들의 세계와 구분되는 실용주의적인 무관들의 의약 문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가 거두어들인다. 
개인적으로는 손성연이 말하는 "상스러운 의사"와 대항하는 새로운 의학 지식의 세계는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보이는 일본의 난학과 유사한 맥락에서 말이다. 

RECIPES PROJECT 원문 게재 순서 Recipes Project~사후약방문~

인도차이나 ~Indochine~ 항목에서 처럼 여기서도 원문 게재 순서대로 목록을 작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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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2013년 7월 11일 (2018년 8월 21일 재게재) - 연금술사가 투잡을 뛰면 생기는 일!


2017년 7월 19일 - 뇌피셜과 갈리아 전기
2017년 12월 14일 - 19세기 중국의 불임치료



아이를 가지려면 노오력을 해야한다! - 19세기 중국의 불임 치료 Recipes Project~사후약방문~

Recipes Project 합동 블로그에서 Storytelling and Practical Skills in Medical Recipes를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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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방문에서 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과 실용적 기술

장 잉(Ying Zhang)

후기 제국시대 중국에서 의약 처방에 해당한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유의(儒醫)들은 종종 약방문의 효험을 선전하면서 그 처방이 제왕와 신하의 전통적 질서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1] 또한 특정 개인이 앓는 병을 다스리는데 적합하다는 약재의 혼합을 내세울 때도 있었다. (본 블로그에서 중국 의약학 지식을 논한 또다른 글 참조.) 학계의 관심을 받은 문헌은 대개 유의(儒醫)가 쓴 글인 탓에,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가장 널리 퍼진 약방문은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후기 제국시대 중국에 살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해 다양한 민간 유통 문헌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시기를 보면, 민간 문학이나 인맥을 통해 행동 중심의 처방이 많이 유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상에 쓰이는 백과사전인 일용유서(日用類書)부터 달력, 선서(善書), 소설까지, 여기에 나오는 처방은 가정에서 유용한 실용적 지침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문학 서사를 통해 실용적인 보건 지식을 소개하는 문헌 형태의 자료였다. 약방문을 비전문가도 집에서 따라할 수 있다는 부분의 핵심으로 약 제조의 기술적 측면을 강조했다.

오늘 필자가 소개하고자 하는 흥미진진한 사례는 19세기의 아무개가 고양씨(高陽氏)[2]라는 필명으로 쓴 의방편람(醫方便覽)에 수집 및 기록된 "적각대선 어표종자 환방(赤脚大仙魚種子丸方, 맨발 신선의 물고기 부레로 만든 아이 갖는 알약)"[3]이라는 이름의 처방이다. 이 처방전은 우선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운남 지방에 살면서 정실 1명과 첩 9명을 두었음에도 자식을 보지 못한 61세 주(周)씨 아무개가 어느 명산(名山)에 올랐다가 신선과 마주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래 수련하여 득도한 진인을 만나서) 집안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후사가 없음을 말하고, 또한 좋은 처방을 구하였다. 신선(仙眞)은 그 지극정성을 가엾게 여기어 하나의 약방을 주었다. 약의 성질은 맑되 차갑지는 않고 따뜻하되 뜨겁지는 않으며 남자가 복용하면 근골이 건장해지고, 정력(精)이 더해지고, 골수(髓)를 보충하고 음기(陰)가 붙고, 근본(本)이 단단하진다. 여자가 복용하면 월경 주기가 바로 잡히고 혈액을 보충하고 태아가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기운이 순화되고 음기가 더해지고 아이를 쉽게 갖는다. 주 씨는 절하고 그 처방을 받아서(拜而受之), 처방에 따라서 약을 정제하고 섞었다.(依方修合)

▲적각대선어표종자구방의 첫 페이지. 이미지 출처: 베를린 국립 도서관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처방에 필요한 개별 약재를 나열하고, 어떻게 가공해야하는지 지침을 제공한다. 예컨대 천부자(川附子, 사천 지방의 오두, Aconitum carmichalii Debx)[4]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각각 무게가 4냥 5전 나가는 천부자 두 뿌리를 준비한다.
줄기를 잘라내고 4등분한다. 
안 익힌 감초(Glycyrrhiza uralensis)즙에 7일 간 담군다.
감초즙은 매일 아침 바꾼다.
젖은 밀가루 반 근으로 덮는다.
느린 숯불로 익힌다. 
잘게 잘라서 마를 때까지 가열한다.

약재를 모두 나열하고 나서, 약방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나열한 재료를 약방대로 가공하고 준비할 것.(以上諸藥如法炮製)" 여기서 "포제(炮製)"라는 것은 각 약재 밑에 적혀있는 지시사항 대로 약재를 가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처방전에서는 어떻게 약재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고 환약으로 섞는지에 대한 지침을 내리고, 약을 복용하는 방법도 설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처방전 앞부분에서는 "의방수합(依方修合)"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표현을 써서 개별 약재를 가공하는 것부터 환약으로 섞기까지 모두 일컫는다는 것이다. 
환약을 만든 것은 의원도 약방(藥房)도 아니었고 주 씨엿다. 서사적인 줄거리는 약방문의 신비로운 출처를 언급함으로써 약효의 진실성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주 씨가 약을 먹은 뒤 아들을 여럿 낳았고 본인은 97살까지 살았다고 전함으로써 그 효능을 증명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약을 제작하는 과정을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개인적인 노력으로 제시하였다.[5] 약방문은 약물질과 도구를 다루는데 필요한 실용적인 기술의 세계를 담고있지만, 이야기에서는 약을 가공하는 특화된 기술을 일상적인 가정 지식으로 선전하고있다. 또한 문학적으로 꾸밈으로써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는데, 약방문이 의학적인 맥락을 벗어나 문인의 사교계, 수집욕구, 도덕의 실천이라는 맥락에서의 수집품이 되었을 때에는 더욱 문학적인 가치가 중시되었다. 문학 창작과 도덕적 가르침으로 장식된 약방문을 수집한 사람들은 덕을 쌓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하게 되었다. 그러니, 의학적 맥락 밖에서의 약방문 활용과 유통을 살펴볼 때, 가정용으로 만들어진 약방문에는 스토리텔링이 핵심 요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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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가 정확히 설명은 안 했지만, 예를 들자면 사상에 대추, 밤, 배, 감 순서로 놓는 것이 씨앗의 갯수에 따라 왕, 3정승, 6판서...의 순서라는 식의 논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천상의 위계질서(hierarchy)를 모방해 지상의 위계질서가 실현된다는 논리는 전근대 동서양 모두에 걸쳐 편재해있었다.  

[2] 네코 상(ネコさん)이 아니다.

[3] 부레가 주재료로 들어간다는 점은 흥미롭다. 물고기의 부레가 원시적인 콘돔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생식/임신 관련 처방은 동서고금 모두 공감요법(다른 동물의 생식기를 섭취하는 것)이 다른 의학 이론보다도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을 보면 오히려 의아하다.

"그러나 14,15세기 수고본에서 볼 수 있는 약방문은 많은 경우 열과 무관한 것이 명백하다. 대신 다수의 처방전은 남자나여자가 (혹은 둘다) 동물의 특정 부위, 특히 성기를 먹으라고 한다. 이와 같은 처방전은 고대 세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또다른 이론적 틀에서 작용한다. 특정 물질이 생식 기관과 감응하는 성질을 가져서 생식기관을 자극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중세처방전으로 보는 열과 여성 생식의 관계 中)

[4] "오두의 원뿌리는 부자(附子)라고 불리는 곁뿌리에 비해 더 독성이 있다고 여겨졌고, 야생 오두가 밭에서 기르는 오두보다 더 강력했다."

[5] 신선이 오랫동안 도를 닦은 수련 행위(久修)와 약을 가공하는 행위(修合)이 마찬가지로 수(修)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인 정신수양과 의약품을 만드는 과학적 수행이 일치시된 것.

"갈고리주둥이 풀"의 비밀 Recipes Project~사후약방문~

Recipes Project 합동 블로그의 Transmission of Drug Knowledge in Medieval China: A Case of Gelsemium를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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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고리주둥이 풀"의 비밀

옌 리우(Yan Liu)
그림 1. 본초품휘정요(本草品彙精要, 1505)의 구문 그림. 
사진 출처는 정진셩 편저 "중화대전" (2008).  


전통 중의학의 특징적인 면모로는 독성 물질을 풍부하게 사용한다는 것이 있다. 대표 사례로는 오두(烏頭), 비소(砒素), 우황(牛黃) 등이 있다. 이러한 물질의 독성(전근대 중국인들이 말한 "독毒")을 익히 알고 있던 중국 의사들은 독성 물질을 가공하고 치료에 쓰는데 다양한 방법을 개발했다. 전근대 중국에서는 이런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었을까? 지식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어떻게 이동했을까? 필자는 7세기 의학 문헌에서 남부 중국에 자생하는 "겔세뮴(Gesemiium, 구문鈎吻 혹은 야갈野葛/冶葛)"이라는 독초를 중심으로 위와 같은 질문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그림 1)

중국 의학사에서 7세기는 중요한 시점이다. 당나라(618-755) 전기의 안정적인 정치 환경 덕분에 의학 이론이 활발히 유통되었고 영향력 있는 문헌이 여러 편 만들어졌다. 그중에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국가가 후원한 의학사전 신수본초(新修本草, 659)가 있다. 조정에서 학자 20명 이상을 동원하여 집성한 신수본초에는 의학적 지식을 표준화하고자 했던 정부의 노력이 드러난다. 신수본초에 나오는 850종의 약재 중에는 "겔세뮴"도 있다. (그림 2) 뜨겁고, 쏘는 맛이 있고, 독성이 몹시 강하다고 정의된 겔세뮴의 뿌리는 다른 증상 보다도 날붙이에 다친 상처, 종기, 염증, 발작을 고칠 수 있었다. 신수본초의 저자들은 겔세뮴 이파리 한 두 잎에서 짜낸 즙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설명하면서 겔세뮴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하지만 염소는 겔세뮴을 먹어도 죽지 않는다. 오히려, 겔세뮴 새순을 먹인 동물은 덩치가 커졌다.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세상 그 무엇이라도 적수가 있다는 이치라고 하였다. 

당대 의사들도 겔세뮴을 사용하였다. 손사막(孫思邈, ?-682)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의사로 손꼽히는데 천금요방(千金要方, 7세기 중반)이라는 책을 쓰면서 이 약재를 포함시켰다. 겔세뮴은 독초임에도 불구하고 19가지의 처방에 등장하고, 특히 증상별 치료에 나타난다. 특히 독성 염증, 팔다리의 통증과 마비, 종기, 발에 힘이 없을 때 등의 증상을 치료하는 겔세뮴 연고(야갈고野葛膏) 제조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손사막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이 처방은 천박한 사람에게 제공해서는 안 된다. 조심할 것.(此方不可施之猥人, 慎之)"

손사막은 왜 이 처방이 천한 사람, 즉 평민들의 손에 닿지 않도록 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번째는, 겔세뮴을 다루는 것이 섬세함을 요했기 때문이다. 독성이 워낙 강한 탓에, 자칫 잘못 썼다가는 끔찍하고 더러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평민들은 겔세뮴을 다루는데 제대로 된 지식을 보유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 처방을 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겔세뮴은 약인 동시에 독이었기 때문에, 일반인은 이것을 써 남을 해치려 할 수 있었다. 이들이 겔세뮴을 손에 넣지 못하게 함으로써 손사막은 이와 같은 악용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당대 사료를 보아도 손사묘의 우려에 공감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8세기의 의료 관련법을 보면 개인 가정은 겔세뮴을 소지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정부는 겔세뮴이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겔세뮴에 대한 접근성을 강하게 통제한 것이다. 

그림 2. 신수본초(659)에서 말하는 구문. 
이 사본의 출처는 돈황 문서(P.3714)이며, 667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 출처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 (Gallica). 
                              (羊食. 獸, 大物肥, 有相伏, 如此)
왼쪽에서 10번째 줄: "양은 먹는다. 짐승은 몸집이 커지고 살이 찌니, 상복(相伏)이 있기가 이와 같다."


이렇게 되니 겔세뮴이 실제로 약으로 쓰이긴 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사회 상류층에서는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나라(奈良)의 토다이지(東大寺) 사원에는 756년 코묘(光明) 황후가 덕을 베풀기 위해 기증한 희귀 약재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여기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중국과 일본 사이 오갔던 활발한 문화 교류로 인해, 중국에서 유래한 약재가 많이 일본으로 향했다. 그중에는 겔세뮴도 있었다. (그림 3) 나라 조정과 당나라 조정이 모두 겔세뮴의 의학적 가치를 높이 산 만큼, 겔세뮴은 교역 품목이었을 수도 있다. 

그림 3. 나라 토다이지 절의 쇼소인(正倉院)에 보관된 8세기 추정 겔세뮴 뿌리. 뿌리 직경은 0.5-2.0cm이고 길이는 17-24cm이다. 출처는 일본 궁내청 웹사이트.

지역 사회에서는 여건이 달랐다. 당 제국의 서쪽 끝, 실크로드 상에 위치한 돈황이라는 거주지에서 발견된 7세기 사본에서 사뭇 다른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 사본에는 사소한 처방들이 적혀있고, 많은 경우 피부에 바르는 식이다. 회초고(茴草膏)라는 이름의 연고에 주목해봄직하다.(그림 4) 필자가 위에서 제시한 손사묘의 처방과 매우 유사하지만, 겔세뮴을 쓰지 않는다는 중대한 변형이 일어났다. 당륙(當陸)이라는 약재 이름 밑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있다. "본래 처방은 겔세뮴을 쓴다. 오늘날에는 얻을 수 없으니, 당륙으로 대체한다.(本方用冶葛, 今不可得以當陸代之)"[1] 왜 이런 변형이 일어났는지 추측해볼 수 있는데, 겔세뮴의 자생지는 중국 남부 즉 돈황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앞서 설명했듯이 평민들의 손이 닿지 않게 금지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당륙은 현지에서 자라는 약초로 약효는 겔세뮴과 상당부분 겹쳤고, 멀리 있어 얻을 수 없는 겔세뮴 대신 쓸 합리적인 대용품이 된 셈이다. 

이처럼 약재를 대체해서 쓴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회지도층과 달리, 지역사회의 일반 백성들은 의료 자원이 한정되어있다는 어려움에 직면해있었다. 그에 따라 이들은 대안책을 찾았다. 제국의 중심에서 등장한 권위있는 문헌은 그리하여 다양한 지리적 사회적 영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유동적인 변화를 겪었다. 의학 지식은 전파됨에 따라 분해되고, 사회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그림 4. 돈황 문서(P. 3731)에 보이는 약물 대체. "회초고" 제조법에는 파란색 상자를 쳐놓았다.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작은 글자로 쓰인 주석으로, 겔세뮴을 당륙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진 출처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Gall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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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원문에는, "본래 처방에는 야갈(冶葛)을 쓴다"고 적혀있다. 

야갈(冶葛 혹은 野葛)은 겔세뮴(구문)의 또다른 이름이다. 일본 궁내청 기록에도 "야갈"로 기록되어 있다. (칡과 연관은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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