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느릿느릿 19) 태양이 지나는 통로 그 나라의 이름은, 유리구슬






P.S.
일본과 유구의 아치 건축에 대해서는, 아래 포스팅 참조.


전근대적 평면지구론에 대해서는,


(느릿느릿 53) 유구의 조선어 통역관 그 나라의 이름은, 유리구슬



P.S. 
유구인의 이름은 화명(일본식 이름)과 당명(중국식 이름)이 혼합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시미네 영서"라고 표기했습니다.
"이시미네 니야(仁屋) 영서"라고 쓰기도 하는데, 여기서 니야는 관직명으로 말단 관리를 의미합니다.
이시미네 참봉... 정도였던거죠.

한편 페친(親雲上) 역시 오키나와 본섬의 귀족계급을 일컫는 호칭인데, 치쿠둔페친은 하급 귀족으로서 영지가 따로 없었고, 왕부(조정) 관료로 발탁되는 경우는 과거시험에 합격했을 경우 뿐이었다군요. (서유기의 냉난옥 포스팅 주석 참조.)

아니, 그런데 사쿠모토 씨는 어떻게 조선말을 할 줄 알았던거야?!
의외의 의외지만, 1800년대까지도 오키나와 본섬(유구 왕국)에는 조선어 통사/역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시미네 참봉이 유학을 가게 된 계기도 조선인 표류민을 (통역관이 상주하는) 오키나와 본섬으로 인솔한 거였거든요...

[느릿느릿 20] 유구국의 군함? 그 나라의 이름은, 유리구슬




앗... 아앗!

명명제: "번왕아, 이게 나라냐?" 인도차이나 ~Indochine~

원문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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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 시기를 재고하다 (4): 권력 구조의 재편



1834년, 베트남 캄보디아 연합 세력이 성공적으로 샴 세력을 캄보디아 밖으로 축출하였고, 베트남으로 망명했던 찬 왕(지난 포스팅 참조)은 프놈 펜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A History of Cambodia에서 데이비드 챈들러는 "1834년 초, 텅 빈 폐허가 된 왕궁에 돌아간 찬 왕은 베트남의 더 강력한 통제 하에 놓였다. 태국이 육로를 이용한 공격에 성공함으로써 명명제는 크메르인들이 베트남 남서부 국경에 믿음직한 '울타리'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문회의 난을 진압한 뒤, 명명제는 통제력을 강화하고 집중하고자 하였다." (제 1판의 123-124쪽; 제 4판의 149-150쪽)

챈들러가 쓴 "울타리"라는 용어는 베트남에서 캄보디아 왕과 신하들을 가리키는데 썼던 "번(藩)"이라는 용어다. 이 용어는 글자그대로 "울타리"라는 뜻이지만 중국에서 인종적으로 다르고 열등하다고 여긴 사람(오랑캐)들이 지배하는 "국경" 지대를 가리키는데 오래도록 써온 용어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 용례를 따른 것이다.   

(중략: "번藩"을 번역할 적절한 영어 표현에 대한 내용.)


챈들러에 따르면, 샴 왕국과 전쟁을 치루던 중 명명제는 "크메르인들이 베트남 남서부 국경에 믿음직한 '울타리'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명명제는 통제력을 강화하고 집중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베트남의 더 강력한 통제 하에 놓였다.

위 주장들은 부분적으로 옳지만, 상당한 오류가 있다. "크메르인"이라는 용어는 문제적이다. 명명제는 전쟁 도중 "크메르인"을 믿을 수 없다고 깨달은 것이 아니다. 명명제는 "크메르인 중 일부"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샴 왕국에 맞서 싸운 이들이다.



1834년, 전쟁이 한창일 때 베트남의 관료 장명강(張明講)과 원춘(阮春)은 명명제에게 "번료의 두목(藩僚頭目)들이 섬구(暹寇)를 여러 차례 토벌하였으며 다수를 베었고 포로도 많이 잡아 [우리에게] 바쳤습니다"라고 보고했다. (119/9b)
이 보고를 들은 명명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섬인(暹人)이 도적질하러 들어오자 번왕은 먼저 도망쳤지만, 번료 등은 이내 적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남은 무리를 수습하여 섬라 도적(暹賊)을 포획한 자가 많다. 이는 몹시 포상할만 하다! 2,000 전(錢)을 발행해 두목(頭目)에서 병사(番兵)까지 포상할 것을 비준한다."

"두목으로 공이 있는 자는 품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비단(錦緞), 추사(紗), 명주(紗紬)로 지은 옷을 사람마다 한 벌 씩 주고, 함께 비룡은전(飛龍銀錢)[1]도 주고 교지를 읽어 장려하여라."

명명제는 또한 공을 세운 군인들의 이름과 공훈을 기록하여, 이들이 나중에 관직을 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 (119/10a) 


그러니 챈들러가 적은 것과는 달리, 명명제는 캄보디아인 중 일부는 믿음직스럽다고 여겼다. 그러나 찬 왕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고, 그를 따라 1833년 말 혹은 1834년 초에 영륭현으로 망명해온 1,800 명의 관료와 추종세력도 포함되지 않았다.

1834년, 전쟁이 끝난 뒤 명명제가 찬 왕에게 보낸 교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명명제는 찬 왕의 태만함을 꾸짖으면서 캄보디아가 스스로 방어할 수 있게 개혁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자격이 있는" 관료를 승진시키고 "자격이 없는" 관료를 해고하는 것을 포함했다.

명명제의 교지는 다음과 같았다:

"너(爾)는 전에 섬라의 위협으로 두 번이나 파천했다. 모두 평일에 분발해서 자강(自彊)[2]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료를 위임하는데 현명한 자와 아닌 자를 섞은 나머지 맡은 일에 마음을 다하려 들지 않기에 이르렀다. 이에 병량과 성보(城堡)가 모두 정비되지 않았고 일일히 공허했다. 도적이 왔을 때 이를 능히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지금 진중히 생각컨대 [응우옌 왕조] 조정은 빨리 순리대로 다스려야 한다. 또 안하(安河)[3] 총독 장명강(張明講)과 순무 여대강(黎大綱) 등이 이를 바로잡아 앞으로는 개선되도록 하였다." 

"너는 마땅히 지난 날의 실수를 통감(痛懲)하고, 스스로 깊이 경계(警)하고 참회(悔)해야 할 것이다. 번료 중 현능(賢能)한 자를 승진시키고, 불초(不肖)한 자를 해고시켜라." (131/21a)

그 다음 명명제는 캄보디아가 자체적인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찬 왕이 취해야 할 구체적인 조치를 언급했다.



다시 말해, 챈들러가 쓴 것과 달리 명명제는 "자신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명명제는 몇몇 캄보디아인들이 "그들의" 통제를 강화하고 집중하기를 원했고, 그 이유는 그들이 "베트남 남서부 국경에 믿음직한 '울타리' 노릇"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챈들러가 쓴 것과 다른 또다른 점은, 명명제는 이 일을 맡길 믿음직한 캄보디아인들이 있다고 믿었다. 바로 "현능한 자"들이다. 이 현능한 캄보디아인들은 누구였을까? 샴 군대에 맞서 싸운 이들이었다. 

위 내용이 전쟁이 끝난 뒤 찬 왕은 "베트남의 더 강력한 통제 하에 놓였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찬 왕이 베트남의 통제 보다는 강한 압박을 받았으며, 캄보디아 측에서도 많은 압박을 받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명명제는 찬 왕에게 캄보디아의 권력 구조를 재편하라고 명령했다. 권력 구조 재편이 일어날 때마다 득을 보는 사람이 손해 보는 사람이 있다.

명명제는 찬 왕에게 그러한 권력 구조 재편을 하라고 했고, 찬 왕과 왕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관료들은 샴 군대에 맞서 싸워지 않았으니 이 재편 과정에서 손해를 보게 되어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버티기 힘든 압박이었다. 왜냐하면 다방면에서 압박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첫째, 명명제는 캄보디아의 권력구조 재편을 보고 싶어했으니 당연히 베트남 조정에서 압박이 가해졌을 것이다.  

둘째, 캄보디아의 여러 권신이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이들은 명명제가 제시한 지시사항에 따르면 샴 군대에 맞서 싸우지 않았으니 "불초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권세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세번째, 베트남에서 "현능한 자"로 여긴 사람들이 가하는 압박도 아마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전에 누리지 못한 권세를 얻게 되었고, 샴 군대에 맞서싸움으로써 이 권세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찬 왕은 정말 많은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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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룡진보(飛龍進寶): 화면 상단 이미지 참조.
[2]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자강"은 (보통 서구열강에 대처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는데, 여기서는 베트남이 캄보디아에게 자강을 제안한 점이 흥미롭다.
[3] 안강현(安江)과 하선현(河)


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 시기를 재고하다 (3): 찬 왕과 베트남 인도차이나 ~Indochine~

원문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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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캄보디아 병탄시기를 재고하다 (3): 찬 왕과 베트남





1830년대 초, 베트남은 샴 왕국과 전쟁을 치뤘다. 당시 남부 베트남에서 반란(여문회의 난, 黎文亻+褢의 亂)이 발생했고, 샴 군대는 캄보디아를 통과해 반란군을 지원하러 왔다. 이는 베트남과 샴 왕국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한창일 때, 캄보디아의 군주 찬 왕은 베트남에 도착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걸까?


A History of Cambodia에서 데이비드 챈들러는 "베트남 세력이 ... 찬 왕을 데리고 망명길에 올랐다"고 적었다. (제 1판의 123쪽, 제 4판의 149쪽)

챈들러는 이 정보의 출처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든다. 한편, 챈들러의 학위논문을 보면 "베트남 세력은 찬 왕과 그의 추종세력을 강 하류의 용호현(龍湖縣)으로 데려가, 노잣돈, 먹을거리, 거처를 제공했다."고 썼다. (114)  

이 구절에 달린 주석에는 태국과 캄보디아의 사료(캄보디아 사료는 현지 사원에 보과되어있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으나, 태국 사료는 필자가 확인하겠다)와 함께 대남식록(大南寔錄)을 인용한다. 그러나 대남식록의 정보는 챈들러가 여기서 말하는 것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대남식록에는 1833년 말(음력 달력을 계산하면 1834년 초에 해당한다), 캄보디아의 찬왕이 1,800명 이상의 관료와 100여척의 배를 타고 베트남 남부의 영륭성(永隆省)에 도착했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 보고에서는 찬 왕이 안강현(安江縣)에 여러 차례 찾아와 가정성(嘉定省, 사이공)에 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당시 가정성은 여문회 반란세력이 장악해서 응우옌 왕조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영륭현에는 응우옌 왕조의 관료 두 명(단겸광段謙光, 윤온尹蘊)이 찬 왕에게 연회를 베풀고 어째서 "놀라 달아났는지(驚走)"를 물었다.


찬 왕의 대답에 따르면 샴 왕국은 방콕에 인질로 있던 찬 왕의 두 아들을 데려와 캄보디아 왕국을 샴 왕국에게 넘기도록 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소식이 퍼지자, 항복이 불가피하다고 여긴 군인들이 샴 왕국에게 투항해꼬, 찬 왕의 가까운 신하들은 샴 왕국에 투항할 것을 부추겼다. 

찬 왕은 자신이 프놈 펜에 남아있었다면 이들이 샴 왕국에 투항하도록 종용했을 소지가 있었으나, 체념하지 않고, 명명제(明命帝)의 아버지 가륭제(嘉隆帝)께서 은혜로이 베푸셨던 비호(찬 왕은 과거에도 분쟁을 피해 베트남에 망명한 적이 있었다)를 기억하고 망명길을 택했다고 주장했다. (115/18b-19b) 



명명제는 이 보고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번왕(藩王)이 이곳에 도착했는데, 여전히 백여 척의 배가 있고, 사람 수는 천팔백 명에 이르도록 많다. 그중 어찌 부끄러움을 알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겠는가? 단겸광은 교지를 번왕에게 전해 번료(藩僚)들을 모아 누구든 분발할 수 있고 섬구(暹寇)를 정벌하는데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로 용감한 오륙백 명을 가려 뽑아, 스스로 배에 오르도록 하여라. 한달치의 돈과 쌀을 주고 [샴 왕국] 정벌에 종군할 수 있도록 하여라.

그러나 명명제는 단겸광에게 "모두 겁에 질렸다면, 강요할 필요는 없다. 땅을 골라 한 곳에 안착시키고, 살기에 문제가 없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115/19b-20a)



대남식록은 "베트남 세력이 ... 찬 왕을 데리고 망명길에 올랐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오히려 찬 왕이 영륭현으로 "놀라 달아났다"고 기록했다.

이 정보는 중요한데, 이후 대남식록의 기록을 보면 샴 왕국에 맞서싸운 캄보디아인과 그렇지 않은 캄보디아인 사이의 구분이 명명제와 베트남 관료들에게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명명제와 베트남 관료들은 샴 왕국에 맞서싸운 캄보디아 관료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모든 캄보디아 관료들이 맞서싸운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당시에 "베트남인"과 "캄보디아인" 사이의 한 가지 구분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캄보디아인들 사이에도 맞서싸운 이들과 싸우지 않은 이들 사이의 구분이 있었다. 

이 구분/분별은 1830년대 후반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차후의 사건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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