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사절



남중생 블로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 메타블로그


오늘 방문자 수가 왜... 폭등하는 걸까요?





에 이어, 오늘은 4,000명 넘게 제 블로그를 방문해주셨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내일 통계를 봐야 알 것 같네요.^^


P.S.
네이버 블로그도 만들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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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화> 붓다 더 드래곤 슬레이어 헬렐레ㅔㄹㅔ레

옥스포드 대학교의 고전학자, 르웰린 모건 교수님의 블로그에서 2017년 4월 22일자 글을 옮깁니다. On St George and his day입니다. 
아래는 추천 배경음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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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게오르기우스 축일을 기념하여

가장 최근에 성 게오르기우스(Saint George)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은 아마도 아프가니스탄에 있을 무렵이었다. 필자는 바미얀 지역을 조사하고 있었고, 다레-예 아즈다하(Darre-ye Azhdaha)라는 계곡을 방문했다. 바미얀 마을로부터 몇 마일 서쪽에 있는 곳이었다. 오늘날 계곡 입구에는 이란에서 돌아온 난민을 수용하기 위한 주택지구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비좁게 깍아내지른 계곡을 따라 올라가보면 높은 화산성 산맥으로 가로막혀있는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민담이 얽혀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산은 하즈랏 알리(Hazrat-e Ali)가 죽인 용(아즈다하)의 시체라고 한다. 하즈랏 알리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고, 대다수가 시아파에 속한 바미얀 지역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한 인물이다. 산등성이 꼭대기를 따라 생성된 크레비스는 알리가 검을 뽑아 용을 벤 자국이고, 그 주변의 불긋불긋한 광석이 노출된 부분은 용의 피다. 지하수가 흐르는 소리는 용이 죽으면서 내는 신음소리고, 산등성이 끝자락에서 흘러나오는 희뿌연 암반수는 참회하는 용의 눈물이다.

이 용은 바미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1930년대 고고학자 아흐마드 알리 코자드와 리아 해킨이 수집한 민담에 따르면, 용은 마을 주민으로부터 매일 600파운드 가량의 먹이, 낙타 두 마리, 처녀 한 명을 바치도록 하였다. 마침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라는 구원자가 나타났다. 구원자 알리는 돌돌이라는 이름의 말을 타고 줄피카르라는 이름의 검을 휘둘렀다. 알리는 용을 베어죽이고, 처녀를 구출하고, 여지껏 이교도였던 바미얀 주민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 신의 가호 덕분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알리의 위업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감탄한 나머지 교화된 것이다.

사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걸친 여러 암석 형상에 얽혀있다. 필자가 이 설화를 처음 들었을 때 보인 첫 반응은 물론 성 게오르기우스 설화와 빼어닮은 점에 놀라워하는 것이었다. 게오르기우스 성인도 용을 죽이고, 처녀를 구하고, 사람들을 개종시킨다. 단지 기독교로 개종할 뿐이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떠올린 것은 필자가 최초가 아니다. 1840년 1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영국 장교들은 영국의 수호성인인 성 게오르기우스와 흡사한 설화가 카불 주변 지형에 서려있다는 것을 듣고는 불편해했다. 

그렇다면 이토록 동일하다시피 한 민담이 아프가니스탄과 영국에 모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용을 물리치는 자의 전설은 태초부터 역사와 함께 해왔다. 페르시아와 인도 문명권의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을 보더라도 이미 이 전승이 정립되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와 기타 고대 중동 문화권에서도 유사한 전승을 찾아볼 수 있다. 캘버트 왓킨스의 저서, "드래곤 죽이기"는 태초의 인도유럽어족 구사자들이 노래한 시적 언어의 메아리를 규명하려는 시도다. 해당 전승은 인도유럽인들의 조상이 스텝 지대의 고향에서 떠나기 전부터 이미 전해지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성 게오르기우스와 하즈랏 알리의 유사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옛 시절까지 거슬러올라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용을 무찌르는 자의 형상은 이슬람이 도래하기 이전에 이란을 다스린 사산조 왕가에서 특히 중시하였다. 용을 무찌르는 자의 이야기의 요지는 항상 혼돈의 힘에 맞선 질서와 문명의 승리다. 전승 중에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 많았는데, 수자원은 농업에 필수적이었고, 다시 말해 정착된 문명 생활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각종 성 게오르기우스 민담에서 물은 용이 독차지하고 있다가 영웅이 방출시킨다. 동방의 설화에서도 마찬가지로 흔히 보이는 요소다. 예컨대, 리그베다의 영웅 인드라는 용을 베어 무찌르고 "일곱 줄기의 강이 흘러나오도록" 함으로써 세계를 창조하였다. 한편, 고대로부터 전래되는 이란의 명절인 노루즈(Nowruz)와 메흐레간(Mehragan)은 모두 용을 무찌르고 풍족함을 되찾고 지켜낸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다. (바미얀의 아즈다하 산기슭에서도 물이 흘러 지나간다.) 그런데 이슬람 도래 이전의 이란에서 용을 무찌르는 자의 이름은 가르샤스프(Garshasp)나 페레이둔(Feridun)이나 다른 여러 이름을 띠곤 하였지만, 그 이야기는 사산 왕조의 국교, 조로아스터교의 심오한 교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세계사를 두고 극명히 구분된 선과 악 사이의 영원한 세력 다툼이라고 이해한다. 괴물을 죽이는 여웅의 이야기에 이 끝없는 다툼이 담겨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라니카 백과사전Encyclopaedia Iranica에 등재된 "아즈다하Azdaha"항목이 몹시 흥미롭다.)

여기에 따르면,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교로 대체되었을 때, 민담은 여전히 살아남았으며, 단지 알리가 기존의 페르시아 영웅의 자리를 차지했고, 용은 조로아스터교 대신 이슬람교에서 설파하는 종교적 의미를 갖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멀리 서쪽으로 눈을 돌려본다면 게오르기우스 성인은 중동 지역 천주교의 산물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쓰는 도상과 교리는 오래 전부터 이웃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빌려오곤 했지만, 성 게오르기우스의 용 토벌 이야기 자체는 상당히 후대에나 나타나는 것으로, 최초 기록은 기원후 11세기이다. 이 이야기는 특히 조지아와 코카서스 지방에서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역은 이란 문화권의 경계에 놓여있었으며 페르시아의 예술적, 사상적 전통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사라 쿠엔의 저서, "동방 기독교와 이슬람교 미술의 용"에 나와있는 상세한 연구를 참조.)

그러므로 바미얀에서 필자가 하즈랏 알리를 통해 성 게오르기우스가 용을 죽이고, 처녀를 구하고, 왕국을 개종시킨 일을 떠올렸다면 필자는 결국 동일한 페르시아 신화를 보고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야기하는 빛과 어둠의 싸움을 워낙 극명하게 표현해놓은 나머지, 이 신화는 조로아스터교의 쇠퇴를 넘어 이란 고원에서 서로 반대편에 자리잡은 이슬람권과 기독교권 모두에서 민간 전승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코카서스 지방에서 영국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성 게오르기우스가 영국의 수호성인으로 변신한 것은 사실 십자군 원정의 간접적 결과였다. 전투 성인 게오르기우스의 묘소와 숭배 중심지는 이스라엘의 릿다(Lydda)였다. 십자군은 릿다를 성 게오르기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곳은 십자군이 정복한 이래로 2세기 동안 대부분 기독교권의 통치 하에 놓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 게오르기우스는 서유럽에서 숭배자 세력이 늘었고, 영국에서도 차차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영국 하면 세인트 조지"라는 연결고리는 1348년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가터 훈장(Order of the Garter)을 창설할 때까지는 없었다. 이는 가터 훈장이 성 게오르기우스를 수호성인으로 두고 윈저 궁의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에 본적을 두게 됨으로써 굳어진 연결고리다.

바미얀으로 돌아가 지질학적으로 형성된 드래곤을 보자면, 이 녀석은 이전부터 바미얀 계곡의 불교사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고고학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한 가지 유명한 가설로는, 1천 피트 가량 되는 이 산등성이가 전설 속의 1천 척(尺) 길이의 "파리니르바나 붓다"(열반에 든 부처님)와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이 와불의 존재는 바미얀의 불교 시대를 가장 생생히 보여주는 현장 법사의 기록에 언급되어있다. 구미가 당기는 가설이지만, 아마도 사실은 아닐 것이다. 대체로 현장 스님은 지리적인 정보를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기록한 편인데, 천척 와불(千尺臥佛)은 바미얀으로부터 동쪽으로 몇 마일을 가면 있다고 했지 서쪽으로 5마일이 아니다. 현장이 보았다는 이 와불상의 거대한 크기로 말할 것 같으면, 아마도 그가 남긴 기록이 와전되면서 일어난 현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미얀의 불교 시대에 아즈다하가 이미 숭배 대상이 아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화의 뿌리는 워낙 깊이 뻗쳐있어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자 평화를 사랑하는 부처님조차 용을 무찌르는 전사가 되었다. 여정의 후반부에서 현장 스님은 우드야나(優塡, 스와트)를 방문하는데, 용 한 마리가 스왓 강의 강물이 계곡 사람들의 밭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틀어막고 있다가 부처님이 금강저로 산을 내리쪼개서 용을 억누르고 물을 방출시켰다는 옛 이야기를 전한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바미얀 용의 계곡에 얽혀서 한 때 전해지지 않았다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하즈랏 알리와 세인트 조지가 그토록 닮은 이유는 둘 다 진짜 정체가 페레이둔이기 때문인걸까? 필자는 이와 같은 유사성이 보일 때, 최선의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세계의 여러 종족과 종교가 각기 다른 깃발과 영웅 뒤에 줄서는 모습을 보며 실망하기 십상이지만, 그 각기 다른 영웅들이 사실 기본적으로는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해본다면 또 꽤나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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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 맥스! 매드 조지! 매드 알리! 매드 붓다!!"



3. 도돌이표: 월인 이주 가설 [도돌이표]

Liam Kelley 교수님 블로그에서 번역합니다. 3. Going Backwards: The Yue Migration Theor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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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돌이표: 월인 이주 가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프랑스의 선교사, 군인 관료, 학자들은 모두 베트남인에 대해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 질문은 정작 베트남인들은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베트남인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민족에 속하는가? 언어는 어떤 어족에 속하는가? 등등의 질문이었다.

그때 이미 베트남인은 자국 강역의 역사에 대한 문헌을 집성해놓은 상태였으나, 그 문헌만으로는 위 질문을 명쾌히 답할 수 없었다. 반대로 이들 문헌은 서로 다른 지도자와 왕조를 엮는 정치적 계보도를 따라 그리는 것을 관건으로 삼은 문헌이었다.

베트남인이 서술한 가장 이른 시기의 역사서는 14세기(월사략)와 15세기(대월사기전서)의 문헌이다. 그러나 더 옛날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다. 1,000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지배받은 시기라던가, 대월사기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기원전 몇 천년 동안의 시기에 대한 정보도 있다.

이들 문헌을 집성한 사람들은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었을까? 우선 옛 중국의 사료를 참고했고, 또 기원전 1 ,2천년에 대한 정보를 작성할 때는 15세기 베트남 사회의 상류층이 만들어낸 이야기에서 나온 정보도 쓰였다. 


프랑스 학자들이 보기에, 15세기 대월사기전서에 나와있는 고대사 관련 정보는 당황스러웠다. 예를 들자면, 중국 전설 속의 군주 신농(神農)으로부터 뻗어나와 고대 홍하강 삼각주 지역의 집권층에게로 이어지는 정치적 계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사료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월사기전서의 기록이 정확한 것일까? 만약에 부정확하다면, 이 정보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베트남인은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베트남사를 최초로 연구한 프랑스 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다. 또한 다른 주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뇌리에도 이런 사안들이 맴돌고 있었다. 예컨대 사마천의 1세기 역사서, 사기(史記)를 20세기 초에 번역한 에두아르 샤반느(Edouard Chavannes)도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기를 번역하던 샤반느는 "월(越)"이라는 표현이 절강성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이어지는 넓은 지역 상의 서로 다른 인구집단과 정치집단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복건과 광서(i.e. 동구東嫗와 서구西)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지역의 인구집단과 정치체를 가리키는데도 "구()"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샤반느는 번역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이들 용어의 유사성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들이 동일한 인구집단에 연관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한 인구 집단이 절강성 지역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점진적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1901년에 에두아르 샤반느가 최초로 제시하였고, 레오나르 오루소가 1923년에 더욱 발전시켰다. 오늘날 이 이론은 "월인 이주 가설"이라고 부르는데, 역사학계에서는 더 이상 이 이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1983년, 역사학자 키스 테일러는 "베트남의 탄생(The Birth of Vietnam)"에서 부록 한 장을 통틀어 "베트남인의 유래가 월인 이주 집단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레오나르 오루소의 얼마 가지 못한 이론"을 다룬다. (314)

이 부록에서 테일러는 "권력 승계에 실패한 집권 계층"의 일부가 홍하 삼각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아래의 피지배층 사람들도 함께 이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않는다. (315)

다시 말해, 테일러는 오루소가 주장한 바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오루소의 학문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루소의 학문과 방법론은 손쉽게 반박할 수 있다.


월인을 언급한 옛 중국 사료에 대해 에리카 브린들리가 펼친 논의를 다룬 이 포스팅에서 지적하였듯이, 오루소가 인용한 정보를 통해 상류층의 이동이라도 있었는지 입증하기란 불가능하다.

한편, 필자 본인이 (오루소가 따른) 샤반느의 방법론을 검토한 결과, 샤반느가 얼마나 사료 상의 연결고리를 짜맞추었거나 만들어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면, 기원전 1, 2천년기에 오늘날 중국 남부와 홍하 삼각주 지역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남북"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고고학자들이 밝혀내었다.


고고학자 주디스 카메론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남부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된 방추(紡錘)가 베트남 북부의 기원전 2천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으며 유사하게 북쪽에서 유래한 수놓은 직물 또한 기원전 1천년기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고고학자 남 낌(Nam Kim)도 기원전 1천년기의 꼬 로아(Cổ Loa) 성터에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북부에서 유래한 (기와 등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그렇다는 것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카메론은 저서에서 "레온오나르 오루소 학설의 재검토: 역사와 고고학의 접합"이라고 제목붙인 장을 통해 고고학적 증거가 오루소의 월인 이주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인정한 바 있다. 

카메론이 내린 결론은 이들 증거가 단순히 "베트남 정치체의 유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고 할 뿐이다. (228)


그러니 역사학계와 고고학계는 레오나르 오루소의 월인 이주 가설을 이미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벤 키어넌의 신간 "베트남 통사"에서 화려한 복귀를 하였였다. 이번에는 오히려 더욱 강력해진 것이, 키어넌은 홍하 삼각주의 북방 방추라는 카메론의 근거를 이용해 두 차례의 월인 이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 기원전 2천년기부터 월강 평야를 찾아온 월인 이주 세력은 그들만의 특징적인 방추를 가져온 결과, 월강 평야의 풍 응우옌 유적지에서는 해당 방추가 발굴된다."

"중국어 문헌은 기원전 1천년기 후반에 중화 제국의 정복을 피해온 월인 망명 세력이 오늘날 중국 남부로 다시 한 번 이주하였고, 이번에는 '월'이라는 단어를 남쪽으로 끌고 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중국 동남부와 베트남 북부의 원주민이 남월국의 새로운 백성이자 이웃 민족이 되면서 망명세력의 종족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47)


키어넌에 따르면, 이 이주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이 두 지역의 사람들은 동일한 문화권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이 문화권은 다른 지역의 고대에서 처럼, 민족성이나 언어의 종속성마저도 유동적이었다." (47)

이 "동일한 문화권"에 대한 근거로 키어넌은 오늘날 절강성에 위치한 기원전 5세기 월나라와 고대의 홍하 삼각주 지역 세계 사이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준비하시라.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월나라의 강역은 락 비엣과 많은 유사성을 공유했다. 중국의 한 기록에 따르면, 월나라 왕 구천(勾践, 기원전 496-465 통치)은 '동해 바닷가에 위치한 나라에 살면서 몸에 문신을 한 오랑캐를 다스렸다.'고 한다." 

"3세기 중국 문헌을 보면, 구천의 치세 중에 월나라에 농경을 도입한 대부종(大夫種)이라는 인물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인물의 역할은 베트남을 건국한 신화 속 "수달 용의 군주" 락룡군을 닮았다. '월나라 왕을 위해, 대부종은 들판을 개간하고 도시들을 세웠다. 땅을 넓히고 씨를 뿌려 수확하였다.'"

"이처럼 기원전 5세기 초에 일어난 사건은 이후 월인 망명 세력과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중국 세력이 월인들을 (주로 해로를 경유했겠지만, 육로도 통해) 락의 땅으로 피난하게끔 밀어냈을 것이다. 여기서 락인의 농경 설화는 바다에서 온 '수달 용의 군주'에 대한 유사한 지역 전승과 혼합되었다." (48-49)


와우!

그렇다면 이제 위 인용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키어넌의 책에 "Tai-fu Chung"이라고 표기한 "대부종(大夫種)"은 기원전 5세기 월나라에서 대부 벼슬을 한 문종(文種)이라는 사람이다. 

문종은 원래 내륙의 초나라 출신이고, 바다나 "수달 용의 군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한 문종은 월나라에 농경을 도입하지 않았다. 월나라는 문종이 벼슬하러 오기 전부터 오래도록 있어왔고, 월나라 백성은 바로 그 초창기부터 수렵채집을 일삼지는 않았으리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미 그 당시에도 수천년간 벼농사를 해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문종이 들판을 개간했다는 구절은 월나라가 이웃하는 오나라에게 전쟁에서 패한 다음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문종은 농경을 "도입"하려던 것이 아니라, 월나라의 기간을 "재건"하고 "확장"하려 했던 것이다.

키어넌이 인용한 구절 다음에 나오는 문장을 보면 문종이 군과 백성을 이끌어 월나라의 패권을 (재)성립하고자 하였다.

大夫種為越王墾草耕邑,必地殖谷,率四方士,上下之力,以禽近吳,成霸功。


리고 마침내, 지난 글에서도 보았듯이 락룡군은 "신화 속" 인물이 아니다. 기원후 15세기 상류층 문인 문화에서 창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학적 창조물은 수달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록 기원전 1천년기 양자강 이남 지역에 문화적 공통성이 있었다는 것이 아주 일반적인 단계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수많은 차이점도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으로는 언어적 차이가 있었다.

몇몇 고고학적 근거에 따르면 1,2천년기 동안 양자강 이남 지역과 홍하 삼각주 지역 사이의 남북 교류를 볼 수 있지만, 대대적인 이주가 일어났다는 근거는 없다.

그리고 "바다에서 온 수달 용의 군주가 농경을 도입"한 것을 기리는 공통 문화 전통에 대한 근거는 단연코, 단연코, 단연코 없다. 사실, 그러한 전통이 어디에서도 존재했다는 근거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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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마르코) 폴로 헬렐레ㅔㄹㅔ레

옥스포드 대학교의 고전학자 르웰린 모건 교수님의 블로그에서 2013년 12월 31일자 글을 옮깁니다. Polo on Alexander on Polo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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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마르코) 폴로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에서 필자는 여러분이 셰익스피어 연극을 조금 보았으면 하는데, 너무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여주려는 연극은 "헨리 5세"의 첫 장이다. 여기서 프랑스의 황태자는 새로 왕위에 오른 영국왕 헨리의 성격을 심각하게 잘못 짚었다. 그 결과 프랑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헨리 왕에게 "성품에 보다 걸맞는" 선물로 답을 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테니스 공이었다. 헨리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므로 어린아이한테 어울리는 물건이나 가지라는 것이 선물의 의미였다. 그러나 헨리 왕은 프랑스 측에게 농담을 되받아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어른스럽고 결단력 있는 적수인지를 보여준다.

(한글 자막이 달린 다른 버전의 영상도 올려놓았으니 본문 최하단 참조.)

브라이언 블레시드[역주: 선물 상자를 여는 엑세터 공작 역의 배우. 헨리 5세 역의 배우는 케네스 브래나인데, 모건 교수의 착오인듯 하다.]는 제한적인 대본으로도 명연기를 선보인다. 10대 학창시절의 필자는 헨리 5세를 공부했다. (물론, "네 알이 불 붙은 대포알로 변하길"이라는 대사를 읽으면서 낄낄거렸다.) 그런데 최근에야 "알렉산드로스 기사도 문학"(이게 무엇인지는 뒤에서 설명하겠다)에 대한 몹시 흥미로운 저서를 읽으면서 이 장면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에 기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필자가 이를 깨닫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100년도 더 전에 누군가가 이와 똑같은 사실을 진작에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학계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쩝... 하지만 그래도 흥미롭긴 마찬가지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사건은, 페르시아 침공을 고려하던 알렉산드로스에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보낸 사절단이 선물을 갖고 찾아온 일이다. 이야기에 따라 어떤 선물이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변동이 있지만, 항상 같은 것은 다리우스 왕이 알렉산드로스에게 보낸 선물의 의미는 알렉산드로스가 여전히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다던가 그런 일 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례로 알렉산드로스도 선물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을 내리는데, 아주 정반대의 해석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이 이끌 페르시아 원정이 오히려 대단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더 오래된 버전에서는 다리우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회초리, 공, 황금으로 채운 상자를 보내면서, 그 뜻을 설명하는 편지도 딸려 보낸다. 회초리는 소년 알렉산드로스가 여전히 훈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공은 가지고 놀라는 것이고, 황금은 페르시아 제국이 이토록 부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에게 자신만의 해석으로 답한다. (여기서는 올로호쟌이 번역한 아르메니아 버전을 따른다.) 

"그대는 과인에게 선물하였소. 회초리와 공, 그리고 황금 궤짝. 이 선물을 통해 짐을 조롱하고자 한 것이지. 그러나 나는 이 선물을 받고 좋은 징조로 받아들였소. 회초리는 짐의 무용과 무력으로 오랑캐를 털어버리고, 호되게 매질을 가한 다음, 노예로 복속시키겠다는 것이오. 그리고 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에게 맡겨주었는데, 짐이 세상을 지배하고 내 권세 아래에 둘 것이라는 것이오. 왜냐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이지. 공처럼 말이오. 그리고 황금 궤짝은 당신이 내게 보내온 대단한 선물이오. 그것을 보냄으로써 내게 순종하겠다는 것을 선언하였기 때문이오. 왜냐면 내게 패배하고 내 권세 아래 놓였을 때, 당신은 내게 공손히 조공을 바쳐야 할테니." 

셰익스피어의 장면과 유사성은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이 둘이 매우 의미있는 평행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연극 내내 셰익스피어는 헨리 왕을 알렉산드로스와 연관짓고 싶어한다. ("그 어떤 정치적 사안일지라도, 고르디우스 매듭처럼 그가 풀어내리" 등등. 필자의 이름이 플루엘렌Fluellen이라서 여기에 대해 한 마디 얹고 싶은 것도 있다.[역주: 플루엘렌은 "르웰린"이라는 이름의 유래로, 헨리 5세의 등장인물 이름이기도 하다.]) 둘다 예상을 능가하는 실력을 발휘하는 젊은 왕인 만큼, 헨리의 정당한 프랑스 침공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원정과 같은 반열에 놓은 것이다. 그러니 설령 헨리 5세의 테니스 공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시대보다 훨씬 더 전에 창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셰익스피어 본인은 이 이야기를 실제 헨리 5세가 통치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료에서 찾았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연관성을 유지했다. 

그 다음으로, 이걸 먼저 확실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다리우스가 선물을 보내는 일화는 실제 알렉산드로스의 일생에 있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고대와 중세의 민간 전승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연관지어진 각종의 환상 기담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총칭하여 알렉산드로스 기사도 문학(Alexander Romance)이라고 부른다. 알렉산드로스 기사도 문학의 전승은 한 편의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이 소설은 현재 전하지 않는데, 아마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이집트에서 그리스어로 쓰였다. 그러나 그 소설 속 이야기는 재가공되고 부풀려지면서도 항상 하나의 전승으로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이 문학 전통은 궁극적으로 서쪽으로는 아이슬란드까지,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이동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국 지리서에 이들 이야기가 흔적을 남기게 된데에는 무슬림 상인들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상상 속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역사적인 실체와는 거리가 멀다. 이야기 속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다이빙벨에 들어가 바다를 탐험하고, 날틀을 타고 하늘을 탐험하며, 거대한 장벽을 세워, (Gog)과 마곡(Magog)이라는 부정한 민족들로부터 세계를 지켜 내고, 영생의 물을 찾아나섰다가 결국은 실패한다. 

알렉산드로스 기사도 문학이 얼마나 습합성과 지속력을 갖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가 있다. 13세기에 중국으로 향하던 마르코 폴로가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바다흐샨(Badakhshan)에서 접한 이야기다. (율Yule의 번역을 따른다.) 

"바다샨에는 마호멧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언어가 독특하다. 아주 큰 왕국을 이뤘고, 왕위는 세습된다. 왕실 혈통은 모두 알렉산드로스 왕과 페르시아 대제국의 군주, 다리우스 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이다. 그리고 이곳의 왕은 모두 사라센 언어로 줄카르냐인(Zulcarniain)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이는 알렉산드로스라는 뜻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기리는 뜻에서 그리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가 들은 이야기는 이슬람권 전역에 걸쳐 아랍어, 페르시아어, 만딩카어, 말레이어로 들을 수 있다. 이 창작된 알렉산드로스 일대기에서는 알렉산드로스의 아내 록산느(Roxane, 사실 바다흐샨이 아니라 박트리아 출신이다)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의 딸로 등장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본인도 쿠란의 18번째 수라에 묘사되어있는 줄카르나인(Dhu'l-arnayn, 뿔이 두 개 달린 자)이라는 전설적 존재와 동일시된다. 알렉산드로스 기사도 문학에 대한 탁월한 연구서를 저술한 리차드 스톤맨은 알렉산드로스의 "전설이 그리스를 제외한다면 지구 상 어떤 지역 보다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오랫동안 구전 전승으로 남았다"고 한다. 서양이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발걸음을 할 때까지도 이 이야기들은 여전히 활발히 전해지고 있었다. 19세기 영국 군인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알렉산드로스 설화를 건너들음으로써 낯익고 환대하는 장소에 와있다는 환상에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같은 요소를 공유하는 이야기의 전통은 이슬람권 말리, 기독교권 에티오피아, 몽골리아, 영국 뿐만 아니라 이 장소들을 잇는 공간에서도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 현지 문화에 알맞게 조금씩 번안된 결과, 이슬람권 알렉산드로스는 독실한 무슬림이 되었고, 기독교권 알렉산드로스는 기독교인이었으며, 유대교권에서는 유대인이 되었다. 몽골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유목군주 칸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셰익스피어가 차용한 장면인 다리우스의 선물에 집중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이 일화가 알렉산드로스 전승의 역동성과 지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일화가 시간과 문화권에 걸쳐 덧칠되는 모습이 흥미진진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나폴리의 대사제 레오가 (외교 사절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다가 발견한 그리스어 버전에서 번역하여) 들려주는 10세기 라틴어 버전은 유럽에서 알렉산드로스 신화가 전파되는 주요 수단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다리우스의 회초리와 공은 이제 공과 "구부러진 채"가 되어있다. 그리고 레오가 번역한 이야기의 12세기 확장판인 히스토리아 데 프로엘리이스(Historia de Proeliis)를 보면, 필라 루드리카(pila ludrica, 놀이 공)와 조카니(zocani)라고 되어있다. 조카니라는 단어는 비잔틴 그리스어로는 추카니온(tzukanion)이지만 사실 페르시아어 초간(چوگان, chowgan)에서 온 말이다. 이 초간이 쓰이는 경기는 페르시아 전통 놀이로 "공과 채"라는 뜻의 "구이 오 초간(guy-o-chowgan)", 즉 폴로 경기다.


이렇게 본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우스가 선물로 건넨 유치한 장난감이라는 상투적인 함의는 정식 경기를 떠올리게 되는 정교한 연상작용으로 굳어진다. 페르시아 전통에서 (그리고 레오의 이야기에서도 되풀이되듯이)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폴로를 치고 놀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연극 헨리 5세에서 젊은 왕은 테니스나 치고 놀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런데 페르시아어 알렉산드로스 기사도 문학과 헨리 5세에 들어가있는 이야기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두 가지 전승이 그저 자연스럽게 독립적으로 발달한 것이 상투적인 놀이에서 정식 경기라는 동일한 방향을 따르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해당 종목들이 몹시 흡사하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영국에서는 "왕실(royal)"의 경기인 리얼 테니스(Real Tennis, 옛날 방식의 실내 테니스), 페르시아에서는 왕의 경기라는 별명이 붙은 폴로 경기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또다른 흥미진진한 가능성은 미궁처럼 복잡하게 꼬인 알렉산드로스 기사도 문학의 역사 속에서 페르시아 전승의 요소가 유럽의 전승에 영향을 주었다는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영국 헨리 5세가 받은 테니스 공은 페르시아 폴로 경기의 먼 메아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관객층은 연극 속 헨리 왕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현신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헨리/알렉산드로스 이야기가 알렉산드로스 기사도 문학 전통이라는 가장 놀라운 국제적 스토리텔링의 용광로 속에서 빚어졌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페르시아로부터 유래한 핵심 요소까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말이다.

중세 시대 문화간 상호교류의 사례로 들기엔, 이만한 것이 없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이 새해 복 많이 받길 바라며, 부디 여러분의 알이 포탄으로 변할 일은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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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분 30초부터 21분 30초 참조.)


"월인越人"은 누구였는가? [도돌이표]

Liam Kelley 교수님 블로그에서 번역합니다. Who Were the Yu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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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越人은 누구였는가?

역사학자 에리카 브린들리의 저서, 고대 중국과 월인(Ancient China and the Yue: Perceptions and Identities on the Southern Frontier, c. 400 BC - 50 CE)의 첫 장은 "월인은 누구였는가"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얼핏 쉬운 질문처럼 들린다. 중국의 사료를 보면 기원전 1천년기 말부터 남방에 사는 월(越/粤)인에 대한 많은 언급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백월(百越/百粤)이라고 통틀어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니 이들 사료를 살펴본다면 이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파악을 하고 월인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첫 장에서 브린들리는 중국 문헌을 통해 월인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적은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월인"이라는 용어를 쓸 때의 가장 큰 문제는 최초의 중국 문헌들을 보면 중국인들이 다른 인구집단을 지칭하기 위해 쓰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월"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데 "월"이라고 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브린들리의 책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대체로 월인들이 ...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이들이 스스로를 어떤 인종적 문화적 차이점으로 구분하였는지도 알지 못한다." (22)

중국 측 사료의 저자들은 월인이라고 부른 민족이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종종 이들을 무분별하게 "오랑캐(만蠻, 만이蠻夷)"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한 오랑캐를 가리키는 용어에 비해 백월과 같은 용어는 "문화적, 인종적 의미가 실린 경향을 보인다"고 브린들리는 지작한다. (32)

그러므로, 이 장에서 브린들리는 "월"이라는 용어가 가리켰을 문화적 또는 인종적 구분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알아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 장에서 브린들리가 사용하는 것은 문헌 상의 근거다.


중국인들이 문헌 상에서 "월"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것은 원전 6세기의 일이었다. 우리가 "중화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체들이 있던 중부지역(中國)의 동남쪽에 붙어있는 왕국을 일컫는데 쓰였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월나라를 양쯔강 남부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한다. 오늘날 절강성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월나라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이들은 어떤 언어를 구사했을까?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브린들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 본토의 동남부 지방이 대만 선주민의 본고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감안할 때, 대만의 인구집단이 중국 동남 해안의 '월'과 유사하다고 마땅히 생각해볼 수 있으리라." (25)

또한 대만 사람들이 본고장에서 이주해 도서부 동남아와 태평양 지역으로 나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감안할 때, "대륙부 동아시아의 월인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아마도 프로토-오스트로네시안의 역사를 다룬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언어적으로 (어쩌면 유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전근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해양 식민세력과 연관된 인구집단일 수 있다." (25) 다시 말해 월인은 오스트로네시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인들은 중국 남부와 남서부(멀리는 광서성과 베트남 북부까지) 사는 사람들도 "월"라고 불렀다. 그리고 브린들리의 책에서 언어적 근거를 다루는 장에서 보여주듯, 이토록 광활한 영토 내에서 쓰인 단일 언어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백 가지 월족이라는 뜻으로 "백월(百越)"이라고 불린 것이다. 백월이라는 표현에는 해당 지역에 서로 다른 인구집단이 여럿 살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니 옛 중국인들은 이들 사이에 모종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알아보았다. 그러나 조금씩 다른 사람들을 같은 용어를 써서 묶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차이점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특정 집단 사이의 연관상을 찾을 수 있을까? 

이는 모두 몹시 어려운 질문이고, 브린들리는 구(甌)라는 용어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현대 중국어로 "오우", 베트남어로 "어우"라고 발음하는 한자 구(甌)는 같은 지역에 살던 몇몇 인구집단을 가리키는데 쓰인 용어다.


기원전 3세기에는 옛 월나라를 계승한 국가가 절강성, 복건성 지역에 있었다. 이 나라는 월동해(越東海)라고 불렸다. 월동해의 수도는 동구(東)라는 곳이었고, 기원전 2세기에는 이 나라의 이름도 동구라고 불리곤 하였다.

한편, 같은 시기에 오늘날 광서성(에서 어쩌면 북부 베트남까지)에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서구(西甌)라고 불렸다.

동구와 서구라는 용어를 보면 이 둘이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증명해줄 증거는 없다.

그리하여 브린들리는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편에는 복건성, 다른 한편에는 광서성/베트남 북부로) 수 천 킬로미터나 떨어져있는 서로 다른 두 월인 집단을 묘사하기 위해 어째서 '구'라는 용어가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이 나와있지 않다. 현재로서 필자는 결정적인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어쩌면 이 두 집단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공유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문신의 특정한 문양이나 위치로 인해 중화의 인구집단이 이 둘을 같은 항목으로 묶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어쩌면 동일한 용어를 쓴 것이 그저 우연에 불과할 수도 있다. 각 집단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이름이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듣기에는 비슷하게 들렸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어쩌면 실제로 같은 계통의 민족에서 일부가 떨어져나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한 것일 수도 있다." (35)


옛 문헌 만으로는 "동구와 서구 사이에 연관 관계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명확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 것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브린들리는 해당 질문에 대해 가설 형태의 해답을 여럿 내놓음으로써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가설 형태로 된 질문은 우리를 불확실성의 수렁으로 더 깊이 밀어넣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가설을 잠재적인 해답으로라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마련되어있지 않은 몇몇 조건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화의 사람들이 이 두 인구집단을 묶은 이유가 특정 표식을 공통으로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자. (이는 아주 논리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중화 사람(들)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두 집단과 만나보았어야 한다. 그리하여 위와 같은 공통점을 알아보고, 그 사람(들)의 관찰 결과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어 이들 인구집단을 이름붙이는데까지 이어져야 한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맞아떨어지기 어려운 조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와 유사하게, 서구와 동구 사이의 연관관계가 인구 이동이었다면, 여기에 대한 근거도 남아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평민들이 이주하는 것 보다는 훨씬 가능성 있는) 지배 계층의 이동이었다면 기록에도 남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를테면, 한나라 혜제(재위 기간: 기원전 195-188)가 옛 월나라 왕(구천句踐)의 후손을 동구의 왕으로 공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한나라에서는 월나라의 집권세력과 후대의 동구를 통치한 세력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상류층 이민집단이 서구를 세운거였다면, 이 또한 알려지고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는 주변 국가들의 집권 계층이 누구인지 알았고, 그들의 연관관계도 알았기 때문이다.

가장 수락하기 쉬운 가설은 두 이름 사이의 유사성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시 한번 묻게 된다. 그 "우연"은 정확히 어떤 것이었길래 두 이름이 유사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없다.


위의 논점들은 브린들리의 주장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문헌 상에 나타난 월족 관련 정보에 대해 브린들리가 보여준 논의는 훌륭한데, 브린들리는 자신의 생각을 미리 정해서 보여주거나 독자들이 믿어야 할 주장만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월인이 누구였는지, 서로 다른 집단 사이의 연관성과 차이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틀림없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정보 더미가 필자의 눈 앞에서 정리되어진다면 좋겠다. 월인이 누구였는지를 명확히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근거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너무 많이 때문이다.

브린들리는 제 1장 "월인은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지만, 독자들에게 현존하는 문헌 근거를 제시하고 이들 문헌의 문제적인 요소를 명확히 지적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더할나위 없이 중대한 학술적 공헌을 한 셈이다.

무언가를 명확히 알 수 없다면, 적어도 무엇을 알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해야 한다. 제 1장에서 브린들리는 바로 그런 류의 확실함을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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